이 표제는<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이라는 책에서 딴 것이다. 이 책은 1885년에 퍼시발 로우웰(Percival Lowell)이라는 미국인이 펴낸 것이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호칭이 나는 좋다.
그 책의 특징은 퍼시발 로우웰이, 1883년 12월 중순에 견미 사절(遣美使節) 즉 보빙사(報聘使)의 전권 부대신 홍영식(洪英植)을 따라 서울에 와서, 그 해 겨울을 지내는 동안에 보고 들은 지식을 적은 것이다. 퍼시발 로우웰은 전권 대신 민영익(閔泳翊) 일행을 안내한 공로로 고종(高宗)의 환대를 받았다.
압권(壓卷)은 첫째 쪽에 있는 고종의 어진(御眞)이다. 정부편(政府篇)에는 왕과 삼공 육경(三公六卿)과 외아문(外衙門)의 신설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히 씌어 있다. 조선 시대에는 유교의 경전에 통효(通曉)하여 과거에 급제를 해야만 벼슬을 할 수가 있었다고 하였다.
사서(四書)의 하나인 <논어(論語)>의 헌문편(憲問篇)에는 ‘子曰 爲命 裨諶草創之 世叔討論之 行人子羽修飾之 東里子産潤色之’라는 말이 나온다. ‘공자(孔子) 가라사대, 정(鄭)나라에서는 외교 문서를 작성할 때, 비심(裨諶)이 초안을 만들고, 세숙(世叔)이 검토를 하고, 외교관인 자우(子羽)가 수정을 가하고, 동리의 자산(子産)이 문채(文彩)를 내었다고 하셨다.’라는 뜻이다. 정나라는 중국의 중원에 있었던 작은 나라이다. 비심, 세숙, 자우, 자산은 정나라의 대부(大夫)들이었다.
조선 선조(宣祖) 때의 명상인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지은 <징비록(懲毖錄)>이라는 문헌에 보면, 선조 23년(1590) 경인(庚寅) 3월에 교토(京都)로 갔던 통신사가 이듬해인 신묘년(辛卯年) 봄에 돌아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만난 결과에 대해 어전에 엇갈린 보고를 하였다고 쓰여 있다.
서인(西人)이요 상사(上司)인 첨지(僉知) 황윤길(黃允吉)이 “병화가 반듯이 있을 것입니다(以爲必有兵禍)” 하고 아뢴 반면에, 동인(東人)이요 부사인 사성(司成) 김성일(金誠一)은 “신은 그러한 징조가 있음을 보지 못하였습니다(臣不見其有是)” 하고 아뢰었다고 하였다. 그들이 가져온 왜서(倭書)에는 ‘군사를 거느리고 명나라에 뛰어 들어가겠다(率兵超入大明)’라는 말이 있었음에도 그랬다는 것이었다. 이에 조신들은 혹은 윤길의 의견을 주장하고(或主允吉) 혹은 성일의 의견을 주장하였다(或主誠一)고 하였다.
그런데 문학 평론가인 이어령(李御寧) 박사는, 저 유명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라는 에세이집 중 ‘눈치로 산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만약 그때 눈치가 아니라 과학적 판단에 의해서 그것을 처리했던들 임진왜란이라는 그 처참한 전화는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명나라의 군사를 미리 주둔시킬 수도 있었겠고, 혹은 순순히 길을 빌려주어 오히려 어부지리를 볼 수도 있지 않았나 싶다.” 하고 말하고 있다. 정말 그럴까?
규장각(奎章閣)의 개화기 외교에 관한 문헌을 보면, 조선의 전권 대관(全權大官) 신헌(申櫶)과 미국의 전권 대신 로버트 슈펠트(Robert W. Shufeldt) 제독이 고종 19년(1882) 5월에 제물포의 화도진(花島鎭)에서 역사적 조미 수호 통상 조약에 서명을 했다고 하였다.
그 문서는 화문(華文)과 영문으로 씌어 있다. 화문본에는 ‘만약 일방(一方)이 제3국으로부터 불공 경모를 당하여 이를 알리는 경우에는 타방은 필수 상조하고 조정하여 우의를 표한다(若他國有何不公輕藐之事 一經照知 必須相助 從中善爲調處 以示友誼關切)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영문본에는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기기 이전에 고종이 그토록 기대했던 ‘필수 상조’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 그 영문본의 내용은 이렇다. ‘If other Powers deal unjustly or oppressively with either Government, the other will exert their good offices, on being informed of the case, to bring about an amicable arrangement, thus showing their friendly feelings.’
그런데도 역사 학자 이선근(李瑄根) 박사는, 필생의 대작인 <韓國史(最近世篇)>의 ‘淸國의 알선과 한 · 미 조약 체결’의 장에서, “비록 후일 ‘데오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大統領 당시 日本을 지지하여 이 조문의 정신을 무시해 버리고 말았으나, 歷年 이 조약의 체결을 위해 고심한 ‘슈펠트’ 제독의 그날의 심정만은 진실로 ‘必須相助’할 성의도 있었으리라.” 하고 말하고 있다. ‘必須相助’라는 말은 화문본에만 있다.
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한 2002년 <고등 학교 국사(하)>의 ‘근대 사회의 전개’ 편에 보면, “조선이 서양 여러 나라와 맺은 최초의 조약인 조 · 미 수호 통상 조약에서는, 양국 중 한 나라가 제3국의 압박을 받을 경우에 서로 도와 주겠다고 규정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서로 도와 주겠다’라는 말이 영문본에는 없다.
공자는 <논어(論語)>의 위정편(爲政篇)에서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알면 능히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느니라(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라고 하였다. 고전을 공부하라는 소리다. 고전을 공부함에 있어서는 ‘실수’에 관한 것도 소중히 해야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는 법이다
글 이경구(Kyung Ku Lee)
청주 출생 (1934) 한국외국어대 졸업 <한국수필> 등단 (1998) 한국문인협회, 한국수필가협회 회원 외교관 생활 (1961년부터 30여 년간). 외교안보연구원 명예 교수 역임 제9회 해외한국수필문학상 수상 (2012) 수필집 <소렌토 아리랑>, <시애틀의 낮달> 학술서 <外交文書作成法>, <英語書翰文作成法>, <영문편지 쓰는 법> 현재 워싱턴주 뷰리엔 거주
‘반일종족주의를 읽고서’ (이경구 2020.5.24.)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reporter&wr_id=5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