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화전 초대를 받고 망설였다. 장소가 맨해튼이기 때문이다. 맨해튼은 접근하기 싫어하는 마법의 성이다. 곽상희 김송희 하운 장석렬의 시화전에 최정자시인의 강연까지 있어서 안 갈수도 없다. 관계자 한사람에게 따졌다.
“왜 자동차를 끌고 가기 힘든 복잡한 맨해튼이요? 한인들이 많이 살고 파킹하기 편한 후러싱으로 할 것이지.”
“한국문학의 르네상스시절 서울의 문학과 예술이 모여 있는 거리가 명동인 것처럼 뉴욕의 중심은 맨해튼이지요.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이 있는 한인타운 맨해튼 32가에서 4인시화전 ‘봄이 오는 길목’을 여는 게 얼마나 근사해요. 등촌선생은 돌섬에서 농사만 지을게 아니라 이참에 맨해튼으로 봄나들이를 나와 보시라 구요. 일찍 와서 맨해튼 봄 거리를 걸어보고 저녁6시에 여는 시화전 리셉션에 참석하는 거예요.”
돌섬노인의 맨해튼 봄나들이! 그럴싸 해보였다. 시화전(詩畵展)리셉션을 빌미삼아 맨해튼의 오후를 걸어보자. 아침 10시에 차에 올랐다. 후러싱에 들려 일을 보고 맨해튼 쪽으로 차를 몰았다. 맨해튼이 빤히 보이는 퀸즈블러바드 40가에 주차를 하고 7번 전철에 올랐다.
동양인들이 많이 타고 러시아워에는 급행으로 달려줘서 오리엔탈 특급이라 부르는 7번 전철. 교각위로 달리는 전철이라서 공중을 달리는 기분이다. 은하철도 999를 타고 마법의 성으로 쳐들어가는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들떴다. 전철 안에서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약속을 만들었다.
42가에서 6번 전철을 갈아타고 23가에서 내렸다. 3에비뉴 선상에서 세탁소를 하고 있는 배희남선생을 찾았다. 배선생은 기독문우회회원이다. 나는 요즘 ‘2012 해외기독문학’ 출판준비로 머리가 복잡하다. 4월말까지 원고와 출판협조비(200$)를 부탁하는 메일을 두 차례나 보냈다. 이제까지 들어온 원고는 12편, 협조비는 겨우 400$. 만나자마자 배선생에게 출판이야기를 꺼냈다.
“배사장님 ‘2012해외기독문학’ 원고 좀 보내주십시오.”
배선생은 기다렸다는 듯이 체크를 내밀었다.
“제가 원고는 어렵지만 대신 출판비를 조금 드리겠습니다.”
체크를 받는 내손이 떨렸다. 1000불이었기 때문이다. 거금이다. 메마른 땅에 내리는 단비라고 할까? 하나님의 선물처럼 고마웠다.
점심을 먹으러 가는데 Washington irving PI를 걷고 있었다. 놀랍고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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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길 이름이 단편소설의 원조이면서 미국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 유명한 워싱턴어빙 Place가 아닙니까?
“그래요. 저 앞에 보이는 게 어빙의 동상이지요. 동상 뒤에 있는 빌딩이 230년 전 어빙이 세운 고등학교이구요. 그리고 그 건너편에 보이는 건물이 어빙의 생가(生家)이지요. 우리는 지금 어빙의 생가로 가는 겁니다. 그 집 지하층에 유명한 일본요리 집 ‘야마‘(Yama)가 있으니까요.”
식당입구 벽에 붙어있는 어빙의 그림들이 우리를 영접하고 있었다. 이곳이 어빙생전에 집필실이었는지 침실이었는지 아니면 마굿간 이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어빙의 드나들었던 건 분명 했을 것이다.
“전통 일본요리에는 꼭 일본정종이 나옵니다. 술이라기보다 일종의 세리머니이지요. 한잔 들어보실래요?”
배선생은 성찬식 잔처럼 작고 예쁜 하얀 사기잔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정종을 조르르 따라 부었다. 우리는 풍신수길과 덕천가강처럼 잔을 부디쳤다. 은은하게 취기가 올라오자 벽 사이에서 어빙의 혼백이 나타나 속삭이는 듯 했다.
‘너희 한국인들은 벤윅(Van Wick) 엑스프레스를 타고 후러싱과 케네디공항을 잘도 다니면서 내가 쓴 단편소설 'Rip Van Winkle'을 모른단 말이냐? Van wick은 Rip Van Winkle의 줄인 말이니라.’
식사를 끝내고 식당을 나와 보니 주변은 온통 랜드마크였다. 230년 전 어빙이 살던 시절에 지은 건물들이라 모두가 정부지정 기념물들이다. 고급일식요리를 먹고 주머니에 1천불짜리 체크를 넣고 기념물사이를 걸으니 난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맨해튼은 부자들의 천국이구나.
배선생과 작별하는데 웬지 어빙과 헤어지는 기분이었다. 맨해튼을 걸어 다니자. 30분을 걸어 브로드웨이로 갔다. 거기에 뉴스스탠드장사를 하는 심양아줌마 최정옥선생이 있다. 심양에서 30년 동안 문학교사를 지낸 최선생은 열렬한 돌섬통신 애독자다.
최선생을 만나보고 시화전이 열리는 맨해튼 32가를 행해 걸어갔다. 구경하면서 걷다보니 한 시간이 걸렸다. 걷는 발끝마다 맨해튼의 봄이 활짝 피어있었다. 돌섬의 꽃들은 흙속에 바람 속에 피는데 맨해튼의 꽃들은 사람들 속에서 피는 것 같았다. 그것도 걸어 다니는 사람들 사이에서, 걸어 다니는 꽃으로 말이다.
(문둥이시인 한하운이 보리피리에서 노래한 ’인환(人患)의 거리‘에도 꽃이 피는구나)
시화전장소인 김옥기관장의 다움 갤러리에 가보니 아직도 한 시간 넘게 남아있었다. 건너편 고려당으로 가는데 김문조옹을 만났다. 80노인이 무거운 배낭을 메고 있었다. 한양공대교수로 있다가 도미하여 컨설팅으로 이름을 날렸던 실력자. 지금은 한국고대사연구에 매달려 지낸다. 아내와 아들은 캐나다에 있는데 맨해튼이 좋아 브롱스에서 혼자 지내는 독거노인이다.
“매일 맨해튼에 나와서 배낭을 메고 하루 종일 걸어 다니지요. 골프보다 좋은 건강운동입니다. 맨해튼은 평생을 걸어 다녀도 볼거리가 차고 넘치는 곳입니다. 점심은 대개 파크에서 먹어요. 집에서 만들어 배낭에 넣어 갖고 온 점심을 센트럴파크 잔디에 앉아 먹으면 소학교 때 소풍 기분입니다. 하루에 서너 군데 도서관에 들려 한국고대사 자료를 찾다보면 금방 하루가 지나가요. 매일 맨해튼을 걷는 게 그렇게 즐겁습니다.”
맨해튼은 부자들의 천국만이 아니다. 80된 독거노인도 걸어 다니면서 행복을 얻어내는 곳이다. 맨해튼 나들이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돌섬에만 처박혀 지낼게 아니라 앞으로는 나도 자주 맨해튼에 나와야지!
나는 김옹을 모시고 시화전이 열리는 22 w 32St #6층으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