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러싱 서점에 들려 보니 돈키호테가 꽂혀 있다. 어릴적에 즐겨 읽던 생각이 나서 한권 샀다.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안에서
읽고 있었더니 옆에 앉아있는 50대가 의아해 한다.
어린애들이 읽는 돈키호테를 70노인이 읽고 있는게 이상해 보였던 모양이다. 혹시 저 노인이 약간 돈 돈키호테가 아닐까?
하는 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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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하니 70은 넘어 보이는데 돈키호테를 읽고 계시는군요. 노인장께서는 어린 시절에 돈키호테를 안
읽어보셨나요?”
“웬걸요. 초등학교때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만화로 읽어 봤지요”
“아니, 그러면 만화 말고 다른 돈키호테가 또 있단 말입니까?”
“그럼요. 아동문학가가 다이제스트로 줄여서 만든 ‘동화 돈키호테’도 있고 성인용 ‘세계문학전집 돈키호테’도 있지요.
한국에서는 2004년에 세르반테스 탄생 400주년에 맞춰 스페인어판에서 ‘완역 돈키호테’를 출간했어요. 이게 그 책입니다”
“맙소사. 난 돈키호테는 애들이 읽는 만화뿐인 줄 알았구먼요. 그런데 보니 성경처럼 두꺼운 대작이네요”
책을 본 그는 돈키호테에게 꾸중을 들은 바보산초처럼 어쩔줄을 몰라했다. 책에 놀라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난 어릴 때
만화로 읽은 돈키호테처럼 단숨에 읽어버릴줄 생각했다. 그런데 읽어도 읽어도 읽어야 할부분이 더 많이 남아있다. 무려 730페이지가 되기
때문이다. 보다도 재미가 없어서 더 그랬다. 스페인어를 원문대로 충실하게 번역(飜譯)하다 보니 표현이 여간 지루한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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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가 풍차를 거인으로 알고 공격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만화 제목.
“풍차를 공격하는 용감무쌍한 돈키호테”.
그런데 완역본 제목은 만리장성보다 길다.
“용감한 돈키호테가 상상도 못해본 굉장한 풍차모험에서 거둔 대단한 결과와 유쾌하게 기억할만한 사건에 대하여”
무슨 놈의 중간 제목이 이리 길단 말인가? 노천명의 사슴 모가지보다도 더 길다. 원문을 고스란히 번역해 놓았기 때문이다.
제목이 이런 식이니 내용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느려터진 바보산초의 당나귀처럼 읽어도 읽어도 진전이 안 나갔다.
여름에 산 돈키호테는 독서의 계절인 가을이 와도 독파(讀破)가 안 됐다. 믿음 없는 집사님이 성경 읽듯 난 억지로
읽어갔다. 그만 포기하고 쓰레기통에 던져버릴까? 풍차에 대롱대롱 매달린 돈키호테가 떨어질까 봐 발 버둥치면서 창을 휘두르듯 난 읽기를 포기할 수
없었다. 오인동박사 때문이다.
2년전 LA에 사는 오인동박사가 뉴욕을 다녀갔었다. 하버드에서 강의한 적이 있는 세계적인 인공고관절수술전문가다.
평양의대에서 고관절수술을 가르치다가 통일전문가가 됐다. 그의 통일론은 북한정권도 남한정권도 싫어하지 않는다. 이름하여 대박통일론. 아홉 차례나
평양을 다녀왔다. ‘평양에 두고온 수술가방’을 펴내기도 한 문인이다. 긴 얼굴에 멜랑코리한 목소리, 갑옷처럼 두꺼운 쟈켓으로 무장한 패션,
독특한 통일론 말고도 영낙 없는 동키호테다.
“오박사님에게 동초(冬草)란 아호를 선사해 드리겠습니다. 동초는 김대중대통령을 상징하는 인동초(忍冬草)의 준말이며
동키호테의 풀(草)을 의미하지요”
“동초? 맘에 들어요. 그런데 한가지 걱정은 나에게 산초가 없는데 이를 어쩌지요?”
“내가 산초(山草)가 돼드리지요. 산에 산에 피는 산유화 보다, 산에 산에 널려있는 산풀-산초가 난 맘에 듭니다. 꽃도
아닌 것이 열매도 없는 것이 아무도 보아주지도 않는 산풀-산초가 난 좋습니다”
돈키호테의 유일한 부하 바보산초. 그래서 나는 등촌말고 산초라는 아호를 또 하나 갖게 됐다. 산초의 주군 돈키호테가
11월 9일 통일강연차 뉴욕에 왔다. 난 아직 90페지를 더 읽어야 하는 돈키호테를 끼고 동초를 만나러 맨해튼으로 갔다. 끝까지 들어보니 동초의
통일론에 이해가 간다.
유일무이한 완벽한 통일론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섯개쯤 되는 통일론중 하나라고 할까? 돈 안 드는 통일론, 통일후에
경제대박이 오는 통일론이다. 돈키호테다운 기발한 발상이다. 동초의 통일론을 이해하고 나니 갑자기 배부른 산초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돌섬으로 가는
전철 안에서 돈키호테를 꺼내어 읽어 내려갔다. 2시간후. 여름내 끌고 다니던 돈키호테를 독파했다.
신기하다. 맨해튼 왕복 4시간 지하철에서 난 돈키호테에 빠져드는 신기한 체험을 했다. 돈키호테가 읽히기 시작한 것이다.
뒤에 남아있는 90페이지에 감동을 받다보니 지겹게 읽었던 앞부분이 소록소록 살아 올라온다. 월드컵 축구의 명장면을 슬로우 비디오로 다시
비쳐주듯.
세계최고작가 100인이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을 투표로 뽑았다. 미국 대통령선거보다 바티칸 교황선출보다 어마어마한
세기의 투표다. 100인의 선거인단 모두가 문호들이었기 때문이다. 찰스 디킨스, 허먼 메빌, 도스토예프스키, 프란츠 카프카, 버지니아 울프,
티에스 엘리옷, 월리암 포크너, 토마스 만.....등등
놀랍게도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뽑혔다. 톨스토이를 제치고 셰익스피어를 제치고 빅톨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제쳐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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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김길홍목사가 전화로 물었다.
“등촌, 등촌이 읽고 나서 그렇게 흥분하는 돈키호테는 도대체 어떤 책이오?”
“인생이 즐겁기만 한 초등학생들은 재미있어 깔깔거리며 돈키호테를 읽지요. 모험과 용기로 도전해야 하는 30대들은
통곡하면서 돈키호테를 읽는답니다. 인생을 은퇴한 노인들은 성경을 읽듯 경건하게 읽는 책이 돈키호테이지요”
“도무지 어떤 책이기에 그렇게 어마어마한가요? 서평(書評) 해설좀 해봐요”
“이 책은 작품해설을 아무리 읽어봐도 몰라요. 아는 방법은 단한가지. 처음부터 읽기 시작해서 마지막 731페이지를 다
읽어야 스스로 알게 되는 책이지요. 심봉사가 마지막 순간에 눈이 떠지듯 말입니다”
돈키호테를 읽고 나니 바보산초가 위대해 보인다. 떠돌이 기사 돈키호테를 고향집으로 돌아오게 한건 산초이기 때문이다.
돈키호테는 산초보다도 더 바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