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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경북대 의대 본과2년, 박정희유신독재 철폐운동 주도하다 제명후 강제징집돼 제대 4개월을 남기고 폭염에 완전군장 구보훈련중 사망한 현승효. 그에겐 뼈가 녹고 피가 말라도 식지않는 불멸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28개월간 수첩에 빽빽이 적어놓은 그립고 애달픈 연인의 사연들, 30년만에 빛을 본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를 뉴스로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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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회향학적 원리(20)

글쓴이 : 현승효 날짜 : 2023-09-07 (목) 18:38:07


이처럼 개체화의 영역인 인식의 세계에서만 우리의 대상이 객관적 실재성을 얻는다면, 이 제약된 세계에서 우리의 지상과제인 자유의 통일장 영역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그 회향의 길을 어떻게 찾을 것인지가 문제다. 이 문제는 우리에게 다시 투쟁을 요구한다. 문제는 제약 속에서 무제약을, 유한의 영역에서 무한의 가치를 산출하는 데에 있다. 이 대립물의 상충을 해소지양하는 것은, 인식 영역에 엄연히 실재로서 존재함과 동시에 그 제한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어야 한다.

 

회향적 존재인 인간이 회향이라는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사용하는 인식과 의지라는 수단 중 의지는 그 정당한 경로에서 늘 인식의 완결에서 시작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행위를 결정할 때 일차적으로 인식에 의한 파악을 전제로 의지에 의한 결정에 이르 기 때문이다. 그런데 회향 과정 속의 인식은 결여로서 불완전 상태에 있으며 유한한 한계 내에 머물 뿐이다. 이에 반해 의지는 지극히 광대하며 완전성에 다가간다.

 

유한한 한계성의 제약 속에 갇혀 있는 인식의 종결에서 출발하는 의지의 본질은 자유다. 왜냐하면 첫째로 의지의 본질은 행위로 이어지는 결단에서 행위 하는 것도 행위하지 않는 것도, 긍정하는 것도 부정하는 것도, 추구하는 것도 기피하는 것도 자유로이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의지의 전단계에 있는 인식을 긍정 또는 부정할 때, 즉 추구 또는 기피할 때, 우리는 어떤 외적인 힘에 의해 결정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의존적 결정은 독자적 존엄성을 지니는 자유의 특성이다.

 

여기서 의지가 비결정상태에 있더라도 그것이 자유라는 점에서 하등 장애를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욱 확연히 확인된다. 왜냐하면 일방에 편중되지 않고 어떤 제약된 성향을 가지지 않는 비결정 그 자체야말로 자유의 첫째 조건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의지의 비결정 문제는 인식의 결함을 증명한다. 의지가 인식에 이어지는 것이므로 인식이 무엇이 참이며 선인가를 전면적으로 통찰할 수 있다면, 이러한 인식에 이어 의지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무엇을 선택할지에 일말의 주저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지는 그것이 자유일 때 비제약적이며 완전성으로 통하는 그런 것이다. 우리가 자투의 이면인 자유의지를 경험할 때에는 이미 그 이상으로 큰 의지란 것을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신적 의지도 나의 의지보다 크다고 생각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은 유한한 제약 속에 있는 인식에 안주하지 않고 자유의지를 가짐으로써, 제약을 끊임없이 탈피해가고 자유로이 완전성을 지향한다.

 

우리는 자신의 현존재, 즉 실향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의식할 때 그로부터 탈출하려는 자투를 해야 한다고 느낀다. 이러한 입장은 키르케고르와 니체에게도 동일하다. 이는 허무주의의 극복 문제로 귀결된다. 그러나 존재를 무와의 단절로, 즉 존재와 무를 영원히 이질적인 것으로 볼 경우, 자투의 태도는 절망과 신앙의 양자택일로 귀결 될 수밖에 없다.


회향적 존재

 

즉 인간이 능동적으로는 자살로, 수동적으로는 광기로 무와 대면하든지, 아니면 키르케고르처럼 단독자로서 신 앞에 섬으로써 신앙의 절대적 비약에 의해 적극적인 방식으로 무로 되든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갈등 속의 불안한 존재를 오직 영원한 무에 침몰시킬 뿐이다. 실향의 세계에서 탈출하려는 자투는 그 자체로 투쟁을 의미한다. 그것은 무의 심연 위에서 표류하는 현존재를 극복하려는 것이다.

 

용맹이란 소망이나 욕망을 이루려는 투지로서, 일찍이 볼테르가 적절하게 언급했듯이 미덕이 아니며, 악당이든 위인이든 공통적으로 갖는 하나의 성질이다.” 그러나 용기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 모든 사람들이 갖는 것으로서, 삶의 무의미함, 자신의 유한함, 그리고 후회와 죄책감 등, 삶을 위협하는 모든 절망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힘이다. 그래서 신학자 파울 틸리히는 존재하려는 용기에서 용기를 자아 긍정이라고 정의하고 자기의 참된 본질, 자기의 내적 목표, 혹은 생명을 긍정하는이라고 주장했다. 현존재의 극복은 무화(無化)가 아니라 진정한 실재인 유이자 무에 도달하는 것이다. 자살과 신앙에 의한 허무의 극복은 존재를 무로 대체하는 것으로 귀결될 뿐이다. 현존재의 참된 극복을 위해서는 현존재의 유한성에 대한 긍정에 기초하여 자투해야 한다. 현존재의 유한성이라는 것은 이 경우 영원한 실향에 맞서 회향의 가능성을 살려내기 위한 담보가 된다. 현존재의 유한성에 대한 긍정에 기초하는 자투는 자유를 위한 투쟁이다. 그 투쟁은 무의 소멸인 현존재의 자기 고양 과정이다.

 

바슐라르는 초의 불꽃 에서 불꽃과 몽상의 관계를 달콤하고 감미롭게 몽상적으로 서술을 하고 있다. 그것은 시공을 넘어설 가능성 및 포괄의 세계인 자존의식 영역과 명료한 실체의 세계인 인식세계의 대비에 불과하다. 개개의 인식 영역은 자존의식의 객관적 실재이며, 이에는 자존의식이 투여되어 있다. 가능성 차원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자유의 실체에 가장 근접하는 이 자존의식이 인식에서는 그 근원적 독자적 존엄을 자투에 의해 스스로 포기한다. 인간은 자존의식의 존엄성인 가능성과 포괄성 및 시공을 초월해 있는 자신의 지고의 위치를, 제약적이고 의존적인 시공 속의 인식의 개체화된 명료성에 의탁함으로써 스스로 에덴의 상태에서 자연이라는 나락으로 내려온 것이다.

 

이 자투 속에 인류 문화의 모든 비밀과 종교 및 신의 밀의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있으며, 인간의 한계와 숙명적 비극과 동시에 인간의 존엄이 숨 쉬고 있다. 왜 인간은 자유의 영역에서 스스로의 자투에 의해 인고의 저급 영역으로 내려오지 않을 수 없었는가? 사실 이 하강과 함께 인류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단적으로 인식을 택함으로써 인간의 비극은 시작된 것이다.

 

자투는 절대 독립적 존재를 포기하고 의존을 택하는 것이다. 이 피하고 싶은 자투는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그것은 진정 우리에게 숙명적인 것인가? 그렇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운명이다. 인간은 변화와 운동의 덩어리인 자연, 즉 운동의 실체인 불일치의 세계 속으로 떨어짐으로써 운명적으로 자투를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투에 의해 비극은 이미 막이 열렸지만 이제 자투는 비극 그 자체에 머물지 않는다. 자투는 지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처절한 투쟁이요, 자유를 지키기 위해 택하지 않을 수 없는 아가페의 황금창이다.

 

인간은 자유의 실체 그 자체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저 부단한 투쟁과 창조, 시공을 초월한 개념들의 존재는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인간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운동과 불일치의 덩어리인 자연으로 떨어졌다. 일치와 불변의 인간 실체가 불일치의 상반된 자연 속에서 존립하게 되었을 때 이 불일치의 정체를 인간은 파악하게 된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조건이다. 그리고 시공 속에 제약된 자연을 알기 위해서는 역시 시공 속의 제약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자투와 인식이 시작된다.

 

일단 자투가 시작되면, 그것은 엄밀한 명료성과 한계와 개체화의 무서운 독소로 작동한다. 자투에 의해 시작된 인식은 시공 속에 제한되는데, 그것은 유한성의 영역이다. 인간은 자연 속에 있음을 앎으로써 자신도 자연의 한 부분임을 실감하게 된다. 이는 인류의 숙명적 비극이다. 그러나 동시에, 아련히 자신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네 실체는 자유의 영역이라는 신탁과도 같은 목소리. 사실 인간은 자연과 불일치 관계를 지닐 뿐이다. 이미 자연을 떨쳐버릴 수도 없지만 자기의 실체로 돌아가야 하는 인간은 이제 이 자연을 등에 짊어지고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자투와 회향

 

이 불일치 속에서 인간의 투쟁은 전개된다. 그러나 그 투쟁은 고향에로의 복귀라는 의미에서 자연의 운동양태인 반복과는 다르고 창조와 발전의 힘을 수반한다. 여기서 인간은 새로운 환희를 맛보게 되고 자기존재의 위대함이 본유적 자존의식에서보다 더 위대함을 비로소 알게 된다. 이것은 짐을 진 자만이 위대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깨달음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연 속에 떨어지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던 자유의 진정한 의미, 즉 적극적 자유를 지향하는 가운데 발전한 자유를 알게 되었고, 자신이 자유의 실체임을 새삼 자각하게 되었다. 여기에 인간의 존엄이 있는 것이다. 즉 이 제약된 세계를 자신의 모습으로 변조해가고, 자연 상태에 안주하지 않고 법칙으로써 모든 것을 종속 시키는 데에 자유로운 인간의 존엄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자투에 의해 스스로 투쟁을 결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투쟁은 고향의 회복이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의 투쟁은 자유를 향한 투쟁이다. 이 투쟁에 의해서만 완전 한 자유, 적극적 자유가 성취될 수 있다는 확신 속에서 이제 인간의 비극은 종언을 고하고 이미 외롭지 않다는 신념을 지니게 된다. 이 투쟁이 완전한 자유와 창조에 이르는 길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문화의 정수이기도 하다. 그것은 개체화와 한계를 절대적 자유, 인간 본원의 고향 속에 합일시키고 융화시켜 가는 길, 인간성 회복의 길이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노천희,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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