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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희, ‘불멸의 남자 현승효’
1974년 경북대 의대 본과2년, 박정희유신독재 철폐운동 주도하다 제명후 강제징집돼 제대 4개월을 남기고 폭염에 완전군장 구보훈련중 사망한 현승효. 그에겐 뼈가 녹고 피가 말라도 식지않는 불멸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28개월간 수첩에 빽빽이 적어놓은 그립고 애달픈 연인의 사연들, 30년만에 빛을 본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를 뉴스로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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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 (28)

이제 곧 노야가 온다
글쓴이 : 현승효노천희 날짜 : 2021-04-25 (일) 05:23:04

이제 곧 노야가 온다

 


 

10월 17일 금, 1975년

돌아와 라면으로 아침을 때우고 종일 잠잤다. 낮잠이란 방해를 많이 받아 짜증스럽다.

 

모두들 얼굴이 어둡다. 죽은 전우와 자신을 비춰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막연한 공포이다. 점심 먹고도 계속 자버렸다. 빌어먹을 이럴 땐 잠이 제일이다. 환자실에서 터놓고 자버려서 내가 자는지 안 자는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찾지못해 서너 시간 신나게 잤다. 등잔밑이 어둡다.

 

죽은 병사때문에 여러가지 책임문제가 있는 모양이다. 애매한 앰블런스 운전수가 영창에 갔다. 군에서의 죽음이란 개죽음이다. 어처구니가 없다. 그 병사는 30여 세 나이에 외동아들이고 돐 지난 아들도 있는 아버지라 한다. 애석해 하는 사람이 많다. 한창의 젊음이 아깝고 애석하다. 그의 명복을 빌었다. 찜찜하고 마음이 무거운 하루였다.

 

10월 18일 토, 1975

상쾌한 아침,구보를 나간다. 알몸에 와닿는 가을 새벽 공기가 몹시 신선하다. 노야를 부르며 달린다. 하나 불만이 있다면 구보거리가 너무 짧다는 것이다. 좀 더 멀리 달리면 노야를 부르는 시간도 더 길텐데 아쉽다. 요즘 새벽길은 안개가 자욱하다. 江이 가까와서 그런지 안개가 무척 짙다. 그 속을 달릴 때는 異國의 정취에 흠뻑 빠진다,

이제 곧 노야가 온다. 내 사랑, 나의 귀여운 마돈나.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 봐도 작으나 야무지고 눈은 샛별같이 반짝이고 또렷한 노얄 표현할 말을 발견하지 못한다. 이번에 오면 그냥 가만히 보리라. 보고 또 봐서 못생기고 미운 구석을 찾아 내리라.

 

노얀 머리가 조금 짧은 것이 더 예쁘다. 나의 생명 이 세상의 누구도 널 나에게서 뺏지 못한다. 神조차도 나로 하여금 널 부정케 못한다. 아! 이제 얼마 후면 노야가 온다. 이 기다리는 시간을 오랫동안 연장하고 싶다. 와 버리면 곧 이별의 시간이 오기 때문이다. 노야 노야.

 

10월 19일 일, 1975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이 일기장이 다 써지면 노야가 오곤 했다. 이번에도 그러리란 느낌이다. 아마 노야가 16일날 왔다면 오늘 19일은 이별의 날이 되었을테지. 그리고 일기도 다 채워지지 못했다. 아침에 기상.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인식인 틀림없이 오리라. 오전을 기다리며 보냈다. 일지대 군의관과 대화하고 있으니 면회를 왔다는 기별이 왔다.

처음엔 나의 천사가 왔다는 줄 알고 경황이 없었다. 막 달려가 보니 꼭같은 옷 색깔을 한 공군 중위와 예쁜 여자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놀랬다.

그녀는 인식의 애인,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란다. 상당히 미인이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임을 타인 앞에서 결코 감추지 않는다. 인식일 무척 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 말끝마다 자기다. 그러나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내일이 검열날이기 때문에 오늘은 일요일인데도 외출 외박이 없다. 좆같은 군대다. 그래서 위병소에 2시간여 앉아 있었다.

그들은 친구 결혼식에서 우연히 만난 사이라 한다. 살짜기 뒷 마을로 도망을 가서 셋이서 소주를 마시며 시골 점심밥을 사먹었다. 그녀가 우리의 일원이 된 걸 환영한다. 그들의 사랑이 변함 없기를 가슴으로 빌어주었다. 오후 4시에 작별을 햇다. 언젠가 노야를 전송하던 천서리로 나가는 오솔길 어귀에서 헤어졌다. 그들의 모습이 산을 돌 때까지 눈으로 배웅하다. 손을 잡고 그들은 걸어간다. 그대들의 사랑도 아름다워라. 산을 돌면서 나에게 손을 흔든다. 나도 손을 흔든다.

이제 곧 노야가 오면 나는 또 이렇게 손을 흔들겠지. 그들은 저녁 7시에 인식母와 약속이 있단다. 성당이겠지. 인식 어머니는 나를 무척 보고싶어 하신단다. 인식이 너는 결코 공군 중위에 머물 수 없는 사람이다. 넌 훌륭하고 존경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 술에 취해서 고양이처럼 돌아왔다. 소주를 마셔 그런지 골이 몹시 아프고 마구 먹은 김치랑 밥이 위에 부담을 준다.

 

저녁 점호 받으면서 조금 아프다. 좀 엄살을 떨어 환자실에 누웠다. 실컨 자고 나니 지금 20일 아침 9시가 다 되었다. 신나는 하루였다. 빌어먹을 이제 노야가 오면 만나고 나선 어떻게 하더라도 1지대로 파견을 갈테다. 그곳에 가면 시간이 무한정 난다. 하나님 도와주소.

 

10월 20일 월, 1975년

실컨 자고 나니 동료가 밥을 먹으라고 갖다준다. 나도 낯짝이 있지 배가 아프다고 못 먹는다 했다. 그리고 인상을 쓰면서 라면을 하나 맛잇게 홀딱 먹어버렸다. 아침에 또 책을 한권 빌렸다. 야스퍼스가 쓴 <哲學入門>이다.

좀 있으면 노야가 짤랑짤랑 달려 온다. 신나는 일이다. 그녀가 피곤할까봐 오지 말라 했지만 역시 오는 게 잘하는 일이야. 내가 이렇게 기다리는걸.

누가 뭐래도 너는 나의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이다.

우리 중대는 나로 인하여 점점 분위기가 이상해진다. 왜냐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저들의 쫄병이지만 고참들은 점점 나를 어려워 한다. 그래서 기압도 잔소리도 마음껏 하지 못하여 군기가 전체적으로 해이해 진다. 어제도 몰래 빠져 나갔다 와서 나에게 잔소릴 하고 기압을 줘야 할텐데 저희들끼리 서로 미룬다. 그래서 황진원 상병이 곤란한 얼굴로 무어라고 한다. 조금 미안하다. 가슴이 확 터지고 넓은 세상을 본다면 그게 중요할 것도 없다.

 

늦잠을 자서 그런지 오전이 휘딱 가버렸다. 곧 점심을 먹고 태권도 한시간 하고....시간이 빨리 간다. 오늘이 지나면 또 하루가 당겨진다. 이 아니 즐거운 일이냐. 어제 오늘은 인식이가 가져다 준 대한민국서 제일 좋은 SUN 담배를 계속 피운다. 지금도 한 개피 물고 가을이 스며든 산을 보고 있다.

저녁에 상열이가 고대하던 노야의 편지를 가져왔다. 23일날 온댄다. 노야가 오면 계획이 많다. 이것 저것 가슴에 새겨 본다. 책을 읽는다는 것 그것은 진정 즐거운 일이다. 한 50년만 꼼짝 않고 책만 보고 싶다. 철학적 思考란 인간이 향유할 수 있는 최대의 기쁨이요 사치요 고상한 것이다. 철학은 경이와 의심과 상실에서 그 本原的 동기를 가진다. 경이에서 인식(앎)을, 의심에서 확실성을 그리고 그 앎에서의 확실성에서의 상실에서 자기생성을 획득한다.

그러나 결코 나는 stoa 철학적인 자기내면으로만 침몰해서 무한한 자유를 만끽하는 사상을 지니고 싶지 않다. 우리는, 아니 '나'라는 존재는 결코 나 개인으로서는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기에 우리들 속에서만 생명을 가진다. 그것은 모든 소외, 괴로움과 슬픔, 악과 부정 불의를 불식하는 인간과 인간과의 교통 속에서 철학의 진정한 생명이 있는거다. 그것은 행위를 수반한다. 나는 행동하는 철학인이 되고 싶다.

하나님, 신을 생각한다. 그것은 결코 인간적 사유의 대상물이 될 수 없다.

인간적 자유의 개념 위에서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자유란 자유의 존재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부여받은 것이다. 그것은 인간실존 그 자체다. 결코 압제와 권력과 힘에 강요되어 포기해서는 안될 그런 것이다. 나의 머리, 나의 가슴, 나의 생각의 깊이는 저 가을 하늘과 같이 풍성해 가고 있음을 감득한다. 신이란 실존을 통해서 실재를 초월하여 현실성으로 감득되는 그런 것이다.

 

노얄 생각한다. 어느 시간 어느 때를 막론하고 네 모습이 나의 뇌리를 떠난 순간이 없다. 너는 나의 명예, 나의 생명임을 무어라 표현할까. 가을 밤이 깊어간다. 나는 네 속으로 푹 잠겨든다.

 

10월 21일 화, 1975년

이제 모레면 노얄 만난다. 22일날 적어도 대구내지 서울까지만 와도 23일날 일찍 만날 수 있을테고 몸도 덜 피곤할텐데. 오늘은 김장김치 사역을 자원해서 나왔다. 새로운 경험을 의해서 또 김치통이 어떻게 생겼나 보기 위해서다. 통은 가로가 2미터 새로가 2미터의 직사각형 깊이는 3미터 되는 장방형이다. 그런 것이 6개가 있다. 여기에 우리가 먹을 김치를 담근다. 그 준비로 시멘트 구덩이를 씻으러 왔다.

모레가 무직이 쌓였다. 물로 씻고 도로 퍼내고 장화를 신고 한다. 위생관념이란 강 건너 등불이다. 그래도 아무 탈이 없다. 문득 훈련소 시절이 회상된다. 식기를 닦아야 하는데 물이 없다. 검사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먹은 것을 씻어야 했다. 물이란 하수도 수채물이다. 여기에 씻는다. 밥풀을 뗀다. 그리고 다음에 그대로 그 그릇에 밥을 담아 먹는다. 잘하는 날은 신문지로 쓱쓱 닦아서 먹곤 했다.

그때에 내가 배운 지식이란 것은 거지가 어떻게 해서 죽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다. 기가 막힌 곳이었다. 거기에 비하면 이곳은 호텔 이상이다. 밥이라야 개밥이다. 국엔 모래가 버적거린다. 그걸 한 그릇 더 먹을려고 따귀를 맞으면서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던 우리들. 돼지 밥통에 손을 넣던 시간들. 그때부터 나는 불변의 인간성을 나의 철학에서 버려 버렸었지. 그리고 모든 인간을 신비적 베일을 벗기고 보는 지혜를 배웠다. 그리고 사람이란 얼마나 환경과 대우에 따라 민감한 반응을 보일 수 있는가를 보지 않았던가.

오늘 나는 그 김치 탱크를 정성들여 잘 씻었다. 남들이 하루 걸리는 일을 둘이서 3시간만에 해치우고 마음껏 시간을 활용했다. 책을 실컨 읽었다. 내 옷안 품속엔 항상 책이 간직되어 있어 어디서나 꺼낼 수 있다. 성경도 있고 철학책도 있다. 그래서 군대에서 나의 배는 항상 불룩하다. <철학입문>, 보던 책이었으나 상당히 어려웠다. 이해를 못하는게 아니라 시간이 걸린다.

같이 간 동료는 낮잠을 자고 나는 책을 읽는다. 그들의 그 심오한 사상적 깊이에 한없는 경의를 보낸다. 그리고 나를 이런 희열 속에 살 수 있게 키워준 부모님께 한없는 감사를 드린다.

고우고우 말초적 삶을 사는 이들이 도저히 접근을 할 수 없는 이 가슴이 터지는 환희 그것을 맛보고 있다. 마치 계란을 삶아서 까놓은 것같은 노야도 있지 않은가? 나는 나의 성장을 스스로 느끼고 있다. 같이 간 동료가 (24세) 자기가 살아온 얘길 한다. 또 한번 나는 젊은애들의 무분별한 무지가 주는 과단성에 놀란다. 그는 겨우 중학 2년에 여학생과 집을 뛰쳐 나와 서울로 제주도로 전전했단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고 어떻게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친구다. 그의 형은 이혼을 세 번이나 했단다. 놀랄 일이기 보단 어처구니가 없다.

어쩌면 우린 너무나 화초처럼 자라온 건지 모른다. 이 세계의 밑바닥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변호하며 그들에게 힘이 되리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나였지만 정말 그들의 생활이 어떤 지에 대해선 백지나 다름없다. 차라리 그렇기 때문에 순수하고 용감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으나 아직도 나에게 미지의 세계는 너무도 광활하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 꼼꼼하고 마음이 너그럽지 못하고 너무나 자식을 애지중지하고 자신의 손아귀에서 전혀 놓지 않으려는 집착과 고집이 센 우리 아버지, 당신께선 수많은 고생 인생의 추악한 면을 보고 오신 나의 아버지, 자신이 직접 하시지 않으면 전혀 마음을 놓지 못하시는 아버지 남에겐 한없이 자상하시고 어떨 땐 비굴하시기조차 하신 아버지. 감정의 기복이 너무도 심하신 아버지 그러나 자신의 문제엔 너무도 참을성이 많으신 속으로 속으로만 앓으시는 아버지, 결백하시고 배짱이 없으신 가엾은 아버지.

재주가 비상하시고 한번 시작하시면 끝이 날 때까지 멈출 줄 모르는 장하신 아버지, 아버지는 우리 아들들을 너무 온실 속에서만 키우셨다. 그래서 일도 돈도 모른다. 그저 아름다운 일에만 참여하는 것만 가르치셨다. 기름 속에서 반생을 넘게 살아오신 장하신 아버지, 나는 아버지를 사랑한다. 그리고 아버지보다 몇 배나 장하신 어머님을 사랑한다.

나는 지금 불침번을 서고 있다. 오늘 박동식이란 수용연대에서 만난 사람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이 시간을 이용해서 2통의 편질 쓰다. 이제 내일만 지나면 노야가 온다. 기다리리라. 가슴이 떨린다. 달이 너무나 밝다. 이 달을 같이 볼 날이 온다.

 

10월 22일 수,1975년

이제 이 밤만 지나면 나는 만날 수 있다. 노야의 여행이 편안하고 즐거운 것이 되길 빈다. 오후엔 그저께 인식이가 와서 몰래 나간 일 때문에 위병소에 있는 못땐 놈과 트러불이 있어서 오랫동안 기분이 나쁘다. 그 때문에 혹 내일 노야가 오는데 이 새끼가 연락을 늦게 하든지 불친절하게 할까봐 걱정이다. 만일 그런 일이 있다면 죽일 놈이다. 아주 좋지못한 놈이라는 평이 있다.

물론 그런 부류의 사람을 보면 우습고 불쌍하고 상대할 가치조차 느끼지 않고 그런 사람의 약점도 너무 잘 알고 있지만 혹 먼길을 달려온 노야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을까 그것이 종일 나를 뒤숭숭하게 한다. 인식이도 그놈의 불쾌한 태도에 때려줄려고 했다하지 않나

오늘도 짬을 내어 역사철학 2권을 돌파해 버렸다. 이제 3권을 볼 차례다. 눈치코치를 살피며 보는 책이라 머리에 하나 들어오지 않는다. 이제 노야가 오면 대대로 가리라. 가서 시간을 가지리라. 낮은 어영부영 하며 보내고 나니 저녁에는 환자가 밀어 닥친다. 환자 하나는 M1총 사격을 하다 고막 2개가 날아가 버렸다. 참 안된 일이다. 이제까지 고생 밖에 모르고 살아온 놈같은 얼굴을 하고있다. 몹씨 측은한 마음이 든다. 무언가 가련하고 불쌍해 보이고 겸손한 사람에겐 애끓는 연민의 情을 느낀다.건방진 놈도 게 중에는 많다. 저녁엔 응금환자가 생겨 밤 12까지 잠을 못 잤다. 라면을 하나 끓여먹고 자다

내일은 노야가 온다. 이 기다리는 즐거움. 그러나 한가지 걱정이 계속 나를 괴롭힌다.위병소 악질이 노야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을까 하는 거다. 군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개새끼 죽여버리겠다. 밤새도록 노야를 생각하며 깨다 자다 했다. 달은 정말 밝다. 은빛같은 달, 정말 아름다움의 극치다. 노야와 저 달을 같이 볼 수 있다. 제발 노야의 여행이 편안하고 즐거운 것이 되기를...

 

10월 23일 목, 1975년

드디어 해가 밝았다. 오늘이다. 오전을 종일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나는 지금 영문 밖 장병 대기소에서 기다리고 있다. 노야를 반가이 맞으려고 생각 끝에 내가 이렇게 기다리기로 한거다. 오늘은 이상하게 미군들이 차를 타고 이 앞을 많이 지나간다. 그리고 웬 기생 퇴물같은 40대의 여자가 코가 확 찌르는 사향냄새를 풍기며 나에게 길을 묻는다.

 

방금 위병소를 통과해 오며 걱정하던 홍역을 치루었다. 심이란 놈이 나를 불러서 때린다. 그러나 그 악랄한 놈도 나에게 마구 대하진 못한다. 벌써 두 번째이다. 가슴을 가볍게 몇 차례 쥐어 박혔다. 그놈의 심성에 그리고 그들의 임무로 딴 사람 같으면 상당히 홍역을 치루었을거다. 개운한 기분이다. 개새끼, 그러나 나에게 언젠가 당할 날이 올거다.

이젠 노야만 기다리면 된다. 책도 한 권 가지고 나왔다. 오늘은 공용증을 가지고 나왔다. 아마 3시 가까이가 되어야 도착되겠지. 이제 1시가 되었다.

지금 쯤 어딜 오고 있을까? 서울까지 왔을까? 아니면 대전 쯤?

 

온 얼굴에 먼지를 하얗게 뒤집어 쓴 양키들, 그들에게 한국의 시골소년이 손을 흔들고 있다. 그들은 무엇을 느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낯선 이국에서 크고 힘센 나라의 우월감을 가지고 이름없는 이 시골길을 달리면서 그들은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가난하고 그들이 생각하는 모든 고상함과 인간다움에서 거리가 먼 이곳 한국에서 그들은 인간의 실존을 생각하고 있을까 아니면 떠나온 고국을 생각하고 있으까. 그들이 스쳐 지나가는 이 길에서 한 까만 눈을 가진 병사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들의 나라에서 먼 이곳에서 그들이 인간 이하로 생각하고 있을 가난한 나라의 군인, 인간실존을 생각하고 하느님을 내면적 자유 속에서 인식하며 목숨보다도 사랑하는 연인을 기다리는 한국의 한 초라한 사병을 보며 그들은 의미없이 웃고 손을 흔든다.

오늘은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다. 추수가 거의 끝나버린 들판은 황량하게 탁 터져 있다. 나의 실존, 나의 자유, 자유란 나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것은 부여받은 것이다. 하느님의 인식과 자유의 개념은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확실성 속에 믿음으로써만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야스퍼스>를 읽으며 내가 여지껏 읽어 온 헤겔을 비교한다. 왜냐하면 헤겔 속에는 야스퍼스는 고투와 격돌의 흔적을 보이기 때문이다.

또 멀리서 버스가 달려 온다 내 눈과 귀는 그리로 향한다. 기다리는 사람, 나의 가장 귀중한 사람 그는 내리지 않는다. 먼지를 날리면서 차는 또 떠났다. 하늘엔 나즈막하게 헬리콥터가 떠 있다. 늘상 그러했지만 이 일기가 가득 채워지는 날 노얀 오곤 했다. 이제 이 수첩도 2장이 남았다. 노얄 만날 때까지 이것을 나는 애타는 심정으로 가득 채울 수 있으리라. 또 한 페이지가 넘어간다. 이 글을 읽으며 나를 보고 나를 느끼는 노얄 생각하면 나는 이 글을 멈출 수 없다.

버스가 정지한다. 많은 사람들이 내린다. 나의 호흡 나의 심장은 맥박을 정지한다. 긴장이 된다. 가만히 눈을 가늘게 뜨고 한 사람 한 사람 확인한다. 연두색을 입은 자기만큼이나 큰 트렁크를 양 손에 들고 있는 노야가 걸어가고 있다. 나는 가만히 부른다. 그녀의 얼굴은 까치같은 표정이 된다. 달려온다. 우린 이제 만나게 된거다. 우리의 몸을 숨길 작은 풀밭이면 된다. 우린 아기들같이 포옹한다. 그리고 두서없는 얘길 한다. 그리고 작은 들짐승처럼 우리가 쉴 곳을 찾아 마을로 스며든다. 아, 시간아 정지해 다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노천희,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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