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일, 1975
6월이 시작되는 날이다. 주말은 고참들의 비위를 맞춰야 하기 때문에 좆 같다. 일기를 쓰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다. 최소한 내가 군에 입대하여 발견한 유일한 낙이다. 일기를 쓸 때엔 꼭 노야의 얼굴을 대하는 느낌이다. 나는 노야와 대화를 하며 이 일기를 오늘까지 써오고 있다. 버리고만 일기도 노야와의 이야기라서 더욱 아깝고 애닯다.
나의 경우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자위해야 살아갈 것 같다. 서른이 다 된 서울대 출신의 임일병은 나에겐 무척 위로가 된다. 오늘은 빨래를 하러 도랑에 갔다. 똥물에 빨래를 한다. 나의 동료들 스승들은 이 시대에 인간이 이렇게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마도 짐작도 못 할거다, 주일인데도 교회에도 못 간다. 군에서 발견한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는데.
사유와 사고를 포기하라고 주위에서 권고한다. 허나 나의 머리는 끊임없이 사색하고 노야를 그리워한다. 지옥에 가더라도, 죽음 직전까지 가더라도 나의 뇌리에서 그것은 그 누구도 지우지 못한다. 인간의 헤아림은 그 헤아림에 의해서 헤아림을 받는다. 인간의 논리와 사색을 초월하고 무형의 힘과 성령과 영적인 힘의 존재를 조금씩 인식할 수 있다. 사람의 논리, 지식의 체계란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한계란 것이 있다. 노야 사랑한다. 나의 천사.
6월 2일, 월, 1975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구보로 시작되는 하루였다. 노야에게 식전에 편질 띄웠다. 잠이 깰 무렵에 노얄 껴안는 꿈을 꾸다 약간의 몽정을 하다. 꿈에서도 노얄 몹시 찾아 헤매다. 노야와 누구인지는 몰라도 여동생이라고 2명의 여자가 나타나다. 그러나 둘 다 노야였다. 얼마나 허우적거리며 꿈속에서 노얄 찾아 헤맸던가. 노야와의 결혼문제, 날 생각할 노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차라리 날 떠나게 훌훌 놓아주는 것이 노얄 행복하게 한다면 나는 피를 토하는 고통을 받아도 차라리 나을 것 같다.
네가 보고싶다. 그립다. 언제 널 만나보나. 요즈음은 매일 꿈에서 너를 본다. 너의 건강이 걱정된다. 건강해다오 나의 작은 나비야. 내 널 위해 매일 노래하며 기도한다. 군에 입대하고 모든 것이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오직 노야와 나와 피를 나눈 부모 형제만이 나의 전부가 되었다.
나의 지성 명예 영광도 이제는 내 사유 밖 저 멀리 아스라한 여운이 되어버렸다. 오직 노야와 형님의 고통만이 나를 지켜주는 마지막 보루인 양하다. 역시 나의 외피를 벗기운 내가 돌아갈 곳은 노야 뿐인 것 같다.
6월 3일, 화, 1975
종일 하는 일 없이 바빠서 4일날 이 일기를 쓴다. 몇 달만에 처음으로 영어책을 보다. 내무반에 굴러다니는 잡지를 몇장 뒤적이다. 그렇게 기쁠 수가 없고 마음이 뿌듯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배운 자혜는 내일을 생각하지 말라는거다. 노야, 장래, 어머님을 생각하면 미칠 것 같아 망각과 회피 속에서 그냥 시간만 보낸다.
밤 늦게 중대장 김정호님과 3시간여의 면담을 하다. 세상엔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더욱 많은 듯 하다. 여러모로 나를 도우려고 하신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눈을 감으면 교정에서 거닐던 나의 모습, 노야와의 행복했던 순간들 , 우리 집 마당이 내가 아직 그곳에 있는 양 눈에 선하다. 그리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인생을 누군가 형극의 길이라 했던가. 정말 한국의 장병들은 고생이 많다. 10km를 30kg 군장을 짊어지고 쉬지 않고 달려야 한다. 죽는 사람도 있다. 아까운 청춘들. 군대는 끊임없는 전쟁 異狀심리상태의 연속으로 긴장 속에서 시간을 보낸다. 비상과 비상으로 이어지는 하루하루. 나는 강해져야 한다. 주님이 나를 지켜주실 거다.
문득문득 논산에서 훈련받던 시절의 상념들이 떠오른다. 변소 옆에서 추위서 덜덜 떨며 다 헤어진 누더길 입고 산 너머 달리는 고속버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억. 후반기 교육기간에 박격포를 메고 복숭아 꽃이 꿈처럼 만발한 과수원 옆을 지날 때에 어린 계집애의 웃는 모습 속에서 승혜의 (조카) 눈을 발견하던 기억, 오각으로 질서정연히 늘어선 병영 사이를 녹색의 옷을 입고 걷는 장병들, 빨간 깡통의 재털이가 일열 종대로 늘어선 모습, 마치 그림책과 같은 원색으로 장식되고, 칼로 썰어 놓은 것 같은 병영막사를 내려다 보며 노야에게 편지 쓰던 기억.
야간훈련을 갔다가 밤 늦게 돌아오며 눈을 감고 걷던 길. 수통에 소주를 담아서 한 모금씩 몰래 마시고 취하던 추억. 사격훈련 때의 스릴과 긴장. 언젠가는 그것이 노야와의 빛나는 재회를 위한 보물로 간직하겠다고 생각하던 나날들. 나는 군에 와서 진정한 내 사랑의 실체를 재확인하고 있다. 노야, 여유를 가지며 우리 강해지자. 그리고 이겨야 한다. 나에겐 네가 있고 너에겐 내가 있으니까 우린 행복하다.
6월 4일, 수, 1975
지금 Ambulance 차 속에서 일기를 쓰고 있다. 내가 있는 곳에서 4km 떨어진 대대에서 오늘 구보가 있다고 한다. 완전군장에 10km 구보를 하는데 위생병으로 따라 왔다. 아마 어제 밤 면담 후 중대장이 보이는 호의의 표시인 듯하다.
Goal in 점에서 비틀거리며 쓰러질 듯 쓰러질 듯 허우적거리는 병사들 그들은 dehydration-탈수증에 걸려서 경련하고 고함을 지른다. 그리고 들것에 실려 5% Nacl 포도당을 맞는다. 비참한 모습들이다. 구역질, 구토, 어머닐 부르는 친구도 있다.
문득 Papillon을 생각한다. 나는 강하다, 나는 강하다 자신을 붙들으며 햇볕 한점 없는 감방 속에서 스스로를 질타하며 무서운 자신과의 투쟁을 쉬지않는 Papillon, 너의 신념과 용기를 배우고자 한다.
저 불쌍한 어린 병사들이 애처럽다. 거품을 흘리며 비틀대는 모습들. 장교들은 서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사명감, 인내, 투지는 그 속에서 배워진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저 고통은 하나의 빛나는 경험과 뼈를 깎는 체험이 될거다.
어제 밤 중대장 김정호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소리없는 아우성이 되지 않도록 하라는 말, 나는 기억한다. 그리고 이길 것이다. 결코 소리없는 아우성을 외치는 값싼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나의 굳은 언약을. 밤엔 수요일이라 교회에 갔다. 처음으로 진실한 기도를 올리게 되었다. 왠지 서러움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悲와 苦를 생각하다. 그리고 읽은 글 한 귀절을 생각하다. 자애의 감정을 기반으로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자만이 남을 사랑할 수 있고 자신의 悲와 苦를 통해서야만 타인과의 同悲同苦가 가능하다는 얘기. 노야와 부모님의 건강과 병든 자와 버림받은 자의 안식과 마음의 평화를 기도하다.
6월 5일, 목, 1975
지금 나는 웅변 대회장에 와 있다. 식당에서 사병들끼리 하는 웅변대회이다. 우거지상 인상을 쓰는 것이 웅변인 줄 아는 모양이다. 떨어진 신문지 한조각을 주워 내 갈증나는 정신적 양식을 채운다.
에릭 호퍼의 이야기. 극도의 자연화도 기계화도 인간성을 말살한다는 이야기. 뒤집어 생각하면 자연처럼 기계적이며 질서정연한 하나의 질서도 없으니 양자는 같은 말이다. 그는 인간은 전심적 기능이 없기에 언어를 발명해 내었고 그 인체의 미완성 때문에 도구를 만들게 되었다 한다. 옳은 말이다. 그것이 바로 원죄설과 유사한 이야기로 절대적 신봉자와 절대적 파괴자는 동일류의 인간성을 말살하는 하나의 파괴자로 간주한다. 중간자로서의 인간을 그 나름으로 정확히 묘사한다.
결론적으로, 절대적이고 일방적인 사고행태와 행위는 인간성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신을 이야기한다. 신은 흙을 빚어 사람을 만들었지만 오늘날의 神人은 인간을 짓이겨 진흙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얘기, 군에서는 너무도 요원한 먼 달나라의 메아리처럼 들린다. 그리고 자살에 대해서 어느 스님이 쓴 글 한 귀절도 읽다. 생리적 갈등과 혐오를 물리적 힘으로 해결하려는 행위는 하등의 해결책이 못 된다는 얘기. 자신의 실체를 발현하며 그 가능성 속에서 자유가 현현된다는 이야길 읽다.
허나, 자살은 결코 해결하려는 몸부림과 노력조차의 포기상태다. 인간이란 목표와 목적이 설정되어 있을 동안에는 결코 자살하지 않는다. 자살은 하나의 포기이며 상실이며 무의식적 심리상태에서의 실행양태 라고 생각한다.
노야,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그리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나. 보고싶다. 아마 널 만나면 울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지금 한개피 화랑담배를 내뿜으면서 오늘 유난히도 산이 가깝게 보이는 언덕에 앉아 널 나즈막히 불러본다. 그리고 하늘에 두둥실 떠가는 구름을 보면서 여정남형의 최후를 생각해 본다. 그의 마지막 생각도 추적해본다.
어린 아해들의 모욕적인 언사와 행동에 분노와 굴욕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나 자신 쫄병이라는 실감도 군인이라는 것 조차 아직 실감치 못하고 있다.
나는 하늘 속에서 유유자적하며 노야 너와의 상념 속에서 배회하고 있다.
하는 일 없이 지나가는 하루하루. 어젠 주선생님과 아버님께 편질 썼다.
이젠 노야 널 위해 시를 쓰련다. 하나의 인자 속에서 즉자적으로 소생하는
反의 인자의 변증법적 발전양식을 나는 확신하고 있다. 패전의 장군인 나.
그러나 언젠가는 승리의 환희를 나와 너에게 안겨주리라는 확신 속에 나는
나의 유배생활을 자위한다.
6월 6일, 금, 1975
오늘은 현충일. 아침나절부터 한가하다. 어제 밤은 노야생각과 여러가지 물결치는 상념에 밤잠을 못 이루다. 아침에 휴가를 가는 사람이 있어 노야에게 편질 부탁하다. 봉투가 없어 고참에게 한장 얻으려다가 찜빠를 먹다. 군기가 빠졌다고 마구 욕설이다. 웃기고 재미있는 세상이다. 눈치껏 요령껏 책을 볼려고 몸부림친다. 오전에는 호국영령들에게 묵념을 올리다.
나의 기억에 국립묘지는 한 민족의 가장 성스런 cemetry라고 알고 있다. 애국심과 민족애는 교육과 국가적 sports 속에서 성숙된다고 배웠다. 그러나 오도되고 부조리한 한국의 국민교육이란 전 국가를 병영으로 감옥으로 만들 수 있는 요소도 그 속에 내재적으로 지닐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소름이 끼친다.
노야와 형님, 어머님이 보고싶다. 모두들 정말 장하다. 그냥 하루하루를 아무 하는 일 없이 멍청히 시간을 보내는 모습들이 정말 지겨워 보인다. 나는 이런 것에 미칠 것 같은 심경이다. 내무반에 굴러다니는 영어 단어장 한 권을 다 외워 버렸다. Ambulance 주위에서 하품을 하며 목적없이 시간을 보내며 살 수는 없다.
노야, 정말 야릇하고 이상한 것은 내가 집에 있는지 군에 있는지 분별을 할 수 없는 심리의 계속이다. 이것은 마치 집에서 군생활을 생각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하루종일 빠져있다가 여기가 군대이고 집은 요원한 곳이란 것을 인식하면 갑자기 미치도록 외로워진다.
마치 몇 시간 후에 널 만나려고 약속시간을 기다리는 그런 상태의 계속이다. 후딱 옆을 돌아보면 울고 싶어진다. 특히 자고 일어날 때는 아린애처럼 칭얼거리고 싶어진다.
무엇이든 마음을 부치고 살 수 있는 일을 나 스스로 발견해야만 하겠지. 얼굴엔 무엇이 자꾸 나서 기분이 나쁘다. 노야, 우리 또 얘길 계속하자. 나는 이렇게 매일 이 종이에 너와의 대화를 계속 한다.
내가 사는 의무중대는 언덕 위에 있다. 물 사정이 극도로 나빠 물지게를 지고 산길을 오르락 내리락하여 드럼통에 물을 채워서 쓴다. 목욕도 세수도 거의 없고 한 사람에 하루 한 세면기의 물로 빨래와 세면을 하여야 하는 그런 곳이다.
여기서 바라보면 멀리 동쪽으로 남한강의 파란 물줄기가 환상처럼 흐르고, 서쪽으로는 가물거리는 용문산이 누워있다. 북쪽에서 한 길 외줄기 버스길을 여기서 내려다 보며 달려 올 널 노상 생각하다가 보면 구부러지는 길목을 들어오는 버스가 방긋방긋 웃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날도 하루 이틀이 아니다. 노야, 건강해다오. 문득 후반기 교육시절 식당에서 내무반까지 500m나 되는 거리를 기압으로 기어가던 내 모습이 언뜻 떠오른다.
6월7일, 토, 1975
어제 밤도 잠을 설치다. 의무중대로 와서 몸이 좀 편해지니 여러가지 잊어버렸던 생각이 하나 둘 고갤 들어 잠을 이룰 수 없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착취하기 시작한 것은 인간이 잉여노동에 대한 가치를 인식하고 부터이다. 태고에 인간이 한 부락을 정복했을 때 그들은 그 피정복자를 잡아먹거나 죽여버렸다. 그러다가 정복자가 그들의 노동력에 눈을 돌리고 나서부터는 즉 노동력 착취, 잉여노동에 대한 – 여기서 잉여노동이란 노예들 자신의 생계를 이루는데 필요한 아주 최소한의 노동력을 제한 나머지 노동 - 필요를 인식하고부터 전쟁, 사회, 문화, 전반적 인류역사에 새로운 장이 펼쳐진다.
무릇 지배와 피지배의 명령체계로 된 사회에서는 모든 것은 노동착취로 영위되고 유지된다. 군도 마찬가지다. 고참들의 뒷바라지에 정신이 없다. 노동이 상품으로 전락한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인민의 노동력이 예속된 상태에서 해방되어 스스로 노동력을 팔 수 있는 전제조건이 형성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은 봉건사회로 부터 해방되고, 즉 자유민으로서의 사회적 지위가 획득되어야 하고 동시에 농노상태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사실 농정 자본주의는 이 양자의 토대위에 구축되었다. 이것이 차아티스트 운동을 유발하고 자본주의는 성숙되었다. 농토에서 그들이 축출될 때 그들은 노동력을 팔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인과를 생각할 때 나는 신의 섭리를 감지한다. 하나의 조건과 전제는 필연적으로 가능성을 낳는다. 가능성이란 말 속엔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지와 개념적 파악이 포함되어 있다. 잉여노동에 대한 착취는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고 강화될거란 예감에 불가항력을 느낀다. 이것을 해방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얼마나 크나 큰 고통을 수반해야 하나. Eden 동산을 그려본다.
오후엔 빨래를 하러 도랑에 나왔다. 목욕도 하고 개울을 따라 헤엄을 친다. 모처럼 느끼는 상쾌한 기분 가뿐한 느낌이다. 비록 물에선 소똥냄새가 나고 더러운 물이지만 목욕을 하고 나니 무척 즐겁다. 지금 목욕을 마치고 노래자랑을 하고 있다. 고향을 떠난 청년들은 이렇게 즐거움을 찾는 것 같다. 나는 이제 사랑이란 개념을 결론짓고 파악해야 할 것 같다. 사랑이 무엇인지, 전우애는 뭔지를 결론지어야 한다. 사고하자 그리고 사색하여야 한다. 노야와 떨어져 있는 시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내 힘 닿는 데까지 기억을 되살려 이 종이에 기록해야 한다.
논산 26연대에서 전반기 교육을 마치고 서울로 가리라는 희망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다시 논산 27연대로 후반기 교육으로 차출될 때, 나는 노야와 형님과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곳에서 박격포 훈련을 받았다. 허나 언젠가는 내가 박격포 요원이 아니라 딴 부서로 가리라는 막연한 기대와 희망 속에서 하루 해를 넘기곤 했다. 모두가 그런 생각으로 지냈다. 그러나 고졸이상의 70여명 동료 중에 나 혼자만이 그것을 달성했을 뿐이다.
군대란 이상한 곳이라 특기가 정말 우습게 정해지지만 한번 교육을 받으면 그것을 탈피하기란 정말 어렵다. 후반기 교육기간은 전반기보다 훨씬 인간적인 대우 속에서 4주를 마쳤다. 교육을 마치고 떠나올 때에 논산 역에서 울리던 군악대 소리, 우리는 누군지도 모르는 이들에게 손을 흔들며 고함을 쳤다. 기차에 타고 서울로 갈 때 차창에 다가왔다 스러져 가던 들 풍경들.
3개월이나 묶여있던 우리들. 나는 내 앞 자리에 앉은 어린 병사가 손을 흔드는 모습에서 학도병으로 혹은 의용군으로 끌려가던 우리 아버지들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어 콧마루가 찡 울렸다. 그것은 환희도 절망도 아닌 어떤 불가항력 속에 자신을 앗겨버리고 그냥 가야 한다는 아무 생각 없는 텅 빈 모습이기에 무척이나 애처러워 보여 한참이나 그의 얼굴을 응시하지 않았던가.
새벽 3시경 용산역에 내려서 용사의 집으로 걸어갈 때 캄캄한 정적 속에서 울리던 군화소리. 그 역에서는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어머님들도 있었다. 정말 용하게도 아들이 오는 시각을 알아낸 장한 어머니들이라기보다 그 애절한 모성애와 사랑이 나의 부모님을 생각케 했다. 용사의 집에서 건빵을 씹으며 세멘 바닥에서 일박, 다시 새벽에 의정부로 와서 우리는 각각 자기 소속으로 갈려 지게 될 시각을 흥분과 초조와 갖가지 rumor와 억측 속에서 3일을 보내게 되었다. 거기서 다시 5사단 배출중대에서 3일을 있다가 트럭을 타고 이곳으로 오게 된거다. 여지껏 즐거움이래야 한번씩 잠깐잠깐 같이 웃는 그런 즐거움이고 내내 막연한 불안을 느끼는 그런 생활이지만 나는 사색하는 기쁨과 노야와 동지와 스승과 나의 형님을 생각하는 식지않는 열기를 지니고 있으니 누구보다도 행복한 놈이다.
내 머리는 항상 불꽃을 튀기며 돌고 있다. 거기에 나의 경력에서 쌓인 성숙된 배짱과 지혜와 여유를 가미해야 한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노천희,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nbnh&wr_id=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