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3일 미주한인의 날을 맞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의 주요 정치인들이 앞다퉈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제111주년인 미주한인의 날은 미주한인의 날은 1903년 1월 13일 이민길에 오른 한인 102명이 하와이에 처음 도착한 날을 기념해 제정된 것으로 2004년 1월 12일 캘리포니아 주의회에서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통과 선포된 후 2005년 12월 연방 상하원에서 국가기념일로 법제화됐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미주한인재단(총회장 박상원)에게 보낸 미주한인의 날 축사에서 “미주한인들은 우리가 사랑하는 땅을 지키고 발전시켜 왔고 어려움과 차별에 직면했을 때마다 더 나은 삶을 이룩하기 위해 인내해 왔다”면서 “매년 우리는 미국에 처음 도착했던 한국인을 기억하며 미주한인사회가 이룩한 공헌을 기념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어 “미주한인들은 우리 두 위대한 나라에 꿈을 나누고 공동의 가치와 돈독한 동맹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고 말하고 “미주한인사회가 우리나라의 풍부한 문화를 간직한 특별한 지역으로 자부심을 갖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코리아코커스 명예의장인 찰스 랭글 연방하윈의원도 축하메시지에서 “한인들은 미국에서 강한 가족의 연대와 근면한 자세로 미국과 한인사회의 발전에 큰 역할을 맡아왔다”고 평가했다.
랭글 의원은 “한국전 참전용사 출신으로 나는 한국과 한국민에게 특별한 연대감을 갖고 있다. 잿더미로 변한 한국전쟁의 참화에서 오늘날 세계 13위의 경제대국으로 발전한 것은 한국인의 놀라운 저력에 기인한다”면서 “내 가슴에 한인들은 언제나 아주 특별한 존재로 남아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피터 쿠(민주 20선거구) 뉴욕시의원은 이날 회견을 통해 “시의회 첫 본회의가 열리는 2월에 미주한인의 날을 기념하는 결의안을 상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뉴욕=민지영특파원
newsroh@gmail.com<꼬리뉴스>
최초 한국인 미국이민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한국인 최초의 미국 이민은 1902년 하와이 설탕재배자협회의 비숍회장이 내한, 대한제국 정부와 이민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시작됐다.
19세기 중후반 미국의 남북전쟁 후 하와이의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들은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극동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각국에 하와이의 풍물, 작업내용, 미국달러로 임금을 지불한다는 내용의 포스터를 각 항구도시에 붙여 이민 노동자를 모집했다.
한국에도 한인노동자를 모집하는 포스터가 붙었는데, 이 포스터에는 "하와이는 기후가 온화해 극심한 더위와 추위가 없고 무료 교육을 받을 수 있으며 1년 내내 어떤 절기든지 직업을 얻기가 용이하다"고 적혀 있었다. 이 광고지는 "하와이는 나무에도 돈이 열린다."는 소문과 함께 퍼져 나갔고 지원자들이 대거 몰려 들었다.
그 결과 기독교인이 중심이 된 첫 이민단은 122명(통역 2명 포함)으로 1902년 12월 22일 인천항을 떠나 일본 고베항에 도착해서 신체검사를 실시했는데 그때 20명이 탈락하고, 나머지 102명의 사람들이 1903년 1월 13일 미국 상선 갤릭호를 타고 하와이 설탕재배협회의 노동자로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이후 1905년까지 약 7,200명의 한국인들이 하와이 사탕수수밭의 노동자로 일하기 위해 이민했으며, 1910년부터 1924년까지는 하와이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는 젊은 남자들과 결혼하기 위해 한국의 처녀들(사진신부)들이 하와이로 왔다. 1924년 '동양인 배척법'이 생길 때까지 14년 동안 1천여 명의 한국 처녀들이 이른바 ‘사진결혼’을 통해 미국으로 떠나왔다.
이후 사실상 끊어지다시피 했던 미국 이민은 1965년 린든 존슨 대통령이 ‘개정 이민법’에 서명하면서 재개됐다. 이후 매년 2만여 명의 한인들이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대량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0년대 후반부터 미국 이민이 본격적으로 증가, 경제적·사회적 이유로 이민을 떠난 한인 이민자 수는 연평균 2만4200 명에 달하였고 1960년대에 비해 7배나 뛰었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도 한인 이민자 수는 계속 증가하며 매년 3만여 명이 넘는 한인들이 이주해 왔다. 이처럼 폭발적인 증가를 보이던 한인 이민자 수는 1980년대 후반 한국의 경제, 사회가 안정되자 점차 감소추세를 보이기 시작해 1990년대부터는 연간 1만4천~1만5천 명 수준으로 고정됐다.
<자료 시사상식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