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정말 저랬나요? 너무 끔찍합니다.”
9일 맨해튼의 MoMA(뉴욕현대미술관) 제2극장. 관객들은 고통스런 표정이었다. 도저히 볼 수 없다는 듯 시작된지 20여분만에 나가는 관객도 눈에 띄었다.
미국 관객들에게 정지영 감독의 ‘남영동1985’는 전율 그 자체였다. 고문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나기도 어렵거니와 이 영화가 불과 한 세대전 민주화를 갈망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남영동1985’는 코리아소사이어티와 MoMA가 공동주최하는 한국영화시리즈 ‘포커스 온 코리아(Focus on Korea)’를 통해 소개됐다. 5일부터 11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영화제는 아시아의 주목할 만한 최신작들을 소개하는 ‘컨템포아시안(ContemporAsian)’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남영동1985’와 ‘공정사회(이지승 감독)’ ‘콘돌은 날아간다(전수일 감독)’ ‘잠 못 드는 밤(장건재 감독)’ ‘백야(이송희일 감독)’ 등 5개 작품이 상영되고 있다.
잘 알려진대로 ‘남영동1985’는 고인이 된 김근태 의원이 198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22일간 겪은 참혹한 고문을 그린 영화다. 고문을 예술이라고 칭해 논란을 일으킨 ‘고문기술자’ 이근안 전 경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 상영에 앞서 연단에 선 정지영 감독은 객석이 다소 한산한 것을 빗대 “여러분은 자리여유가 많아 편하시겠지만 감독인 저는 마음이 좀 불편하다. 하지만 여러분은 금요일 오후 탁월한 선택을 하신거다”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정 감독은 “영화를 보는 내내 힘들고 아프겠지만 다 보고나면 아, 내가 영화를 참 잘 선택했구나, 감독은 왜 이렇게 힘든 영화를 만들려고 했을까..그런 생각도 해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정지영 감독은 뉴욕 일정을 마친 후 11일 캘리포니아 어바인으로 날아가 ‘남영동1985’ 특별상영회에 참석한다. 어바인 시청에서 열리는 상영회와 함께 주최측인 SRFLS로부터 ‘리버 스피릿 어워드’도 받을 예정이다.
연초부터 스위스와 중국, 베를린, 뉴욕에 이르기까지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정지영 감독을 영화제 현장에서 만났다.
- 뉴욕엔 얼마만인가
“20년만에 왔다. 94년에 ‘하얀 전쟁’이 LA에서 개봉됐을 때 초청받아 왔다가 뉴욕에 있는 동생을 만나기 위해 온게 처음이었다.”
- 뉴욕 상영은 어떤 의미가 있나.
“일반상영은 아니고 특별상영이긴 한데, 영화의 성격상 개봉관을 만나긴 어렵고 이렇게라도 뉴욕 한복판에서 소개하니까 괜찮은게 아니냐. 아무래도 영화가 무거우니까 관객들이 힘들어 한다, 그래서 질문은 늘 심각하다. 원래 영화란게 한번 뜨거운게 지나가면 사람들이 안쳐다본다 올해 말까지가 이 영화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 ‘남영동1985’를 연출하게 된 배경은
“고문에 관한 영화를 오래전부터 생각했다..이근안경감을 다룬 영화를 만들 생각이었다. ‘부러진 화살’ 개봉 직전에 김근태고문이 돌아가셨다. 촬영일정때문에 명동미사만 참석하고 장지에 못가 그게 마음에 걸렸는데..아 참 내가 옛날부터 고문에 관한 영화를 만들려고 했지 하는 생각이 퍼뜩 나더라. 그래서 그날 바로 김근태 고문 수기를 읽어 봤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함께 조명한 작품을 만들게 된 이유다.”
- 이근안 전 경감을 만나봤나?
“만나고 싶었다. 후배중에 연결시켜줄 사람이 있다고 해서 영화 개봉후라도 만나려고 했는데 안나타났다. 나중에 혼자 몰래 보고나서 사실과 다르다고 떠들지 않았나? (웃음)”
- 사회성 짙은 작품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사실 1987년 이전엔 검열시대였기 때문에 만들고 싶은 영화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못한게 아니니까 다양한 작품을 했다고 해야 할까. 액션스릴러 ‘블랙잭(1997년)’ 같은건 재밌게 만들었는데 잘 안되더라..(웃음)”
-차기 작품은 어떤 것을 준비하나
“해방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다. 1945년부터 50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시대배경은 그렇지만 지금까지의 작품과 달리 멜로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기대해도 좋다.”
뉴욕=노창현특파원 newsroh@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