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신부’를 아시나요.
20세기초 하와이 이주한인여성들의 애달픈 삶을 그린 연극 ‘사진신부(The Picture Bride)’가 뉴욕 맨해튼에서 펼쳐졌다.
‘사진신부’는 1910년부터 1924년까지 하와이의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는 조선노동자들과의 혼인을 위해 달랑 사진 한장을 교환한 후 결혼하기 위해 온 951명의 여성들을 말한다.
나라 잃은 망국의 한속에 이역만리에서 기구한 결혼생활을 한 이들을 다룬 연극 ‘사진신부’는 지난달 28일 맨해튼 프로듀서스 클럽에서 첫 무대가 펼쳐졌다.
김현정과 박선혜, 이샘, 류한식, 한호웅, 이종범, 강하라, 마이크 타일러, 소피아 코코나스 등 뉴욕과 한국 무대에서 탄탄한 경력을 쌓아온 실력파 俳優(배우)들이 출연해 눈길을 끌었다.
출연진 중 한호웅씨는 KBS 성우 공채 22기 출신으로 한국에서 어린이 프로그램 ‘텔레토비’의 뚜비 역, 외화 ‘그레이 아나토미’의 꽃미남 의사 알렉스 역으로 인기를 모은 주인공이다.
연출가 정다은(28, NYU대학원 예술정치학)씨는 “우연한 기회에 하와이 정부가 ‘사진 결혼법’을 합법화 한 것을 계기로 한인 농장 노동자들에게 시집오기 위한 이민 초창기 한인 여성들의 '맞선용' 사진을 접하게 됐다”며 “많은 이들이 잘 알지 못하는 초창기 이민역사를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으로 극본을 쓰기 시작했다”고 털어놓았다.
이날 공연에 앞서 ‘사진신부’ 출연팀은 지난달 21일 뉴욕한인타운 중심인 플러싱 한복판에서 게릴라 리허설 공연을 펼쳐 화제를 모았다.
리프만플라자 앞 작은 공간에서 10여명의 젊은 한인 배우들은 구슬픈 가락에 맞춰 춤사위를 선보이자 한인 行人(행인)들은 물론, 외국인들도 한동안 지켜보는 등 호기심을 보였다.
뉴욕=임지환특파원 jhlimn@newsroh.com
<꼬리뉴스>
사진하나 들고 하와이땅에 시집온 950명의 신부들
하와이에 최초의 사진신부는 1910년 12월 2일 호놀룰루 항구에 도착한 신부는 23세의 최사라였다. 그녀는 도착하자마자 이민국에서 민찬호 목사의 주례로 38세의 이내수와 婚禮(혼례)를 올렸다.
최사라가 도착하고 22일 지나 6명의 사진신부들이 호놀룰루 부두에 내린다. 이후 1924년 5월 15일 ‘동양인 배척법안’이 통과될 때까지 사진신부 951명이 하와이 땅을 밟게 된다.
1903년 게일릭호 노동 이민자들을 출발점으로 시작된 초기 하와이 한인 이민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극심한 性比(성비)의 불균형이었다. 당시 7200명의 한인들 중 약 5300여 명의 남자들이 외톨이 신세였다.
한인 노동자들은 한국에서부터 가족을 데리고 온 가장들을 제외한 대부분이 혼기를 넘긴 총각들이었는데 이들의 상당수가 노동의 고단함과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술과 도박 등에 의존하다 보니 이는 당시 한인사회의 큰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이 때문에 농장주들이 나서 이들의 신부감을 모국에서 찾는 ‘사진결혼’이 추진됐다. 그러나 사진 결혼은 안타까운 사연이 많았다. 신랑들이 대부분 사진보다 늙었기때문이었다. 사진관에서 빌려주는 고급양복에 기름을 잔뜩 바르고 찍은 사진과 실제의 얼굴은 같지 않았다. 젊었을 때 찍어둔 사진을 중매쟁이한테 건넨 50대 남자도 있었다.
하와이는 길거리 나무에도 옷이 걸려 있는 풍요로운 땅이라고 막연한 환상속에 온 조선의 어린 처녀들은 평균 나이차가 15살이나 더 많은 남편들과 맺어져야 했고 힘겨운 사탕수수농장의 노동에 좌절하기도 헸다.
한국일보가 전한 한 사진신부 할머니의 경험담은 상당수의 사진신부들이 처했던 상황을 잘 말해준다.
“사진 하나만 달랑 들고 호놀룰루 항구에 내려 마중을 나왔을 남편을 찾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사진 속의 얼굴 같은 사람이 없는 거야. 그러다가 갑자기 어떤 사람이 손목을 덥석 잡으며 ‘여보’ 하는데 그 사람 얼굴을 쳐다보자마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어. 아버지 같은 사람이 내 남편이라니 기가 막혔지.”
이같은 상황때문에 사진신부들은 대부분 도망치려 하거나 몇 달씩 결혼생활을 거부하고 버틴 경우도 있었으나 결국에는 대부분 체념하고 결혼생활에 정착하게 됐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하와이 한인사회의 한 부분을 이루게 된 사진신부들은 당시 하와이 한인사회의 사회·경제적 발전의 토대로 작용해 한인 이민사의 발전에 중대한 역할을 담당했다. 실제로 이들이 하와이 이민사회에 끼친 영향은 대단한 것이었다. 사진신부들이 없었다면 하와이 한인사는 노동이민 1세대에서 끝나버렸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와이대 역사학과의 최영호 교수는 “사진신부들이 하와이 한인사회에 들어옴으로써 노동자들이 기댈 가정을 형성하게 돼 한인 이민사회에 안정을 가져왔고 한인 2세를 생산, 한인사회의 맥을 잇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사진신부 출신 한인 여성들은 진주만 공습에 이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군인들을 상대로 번창한 세탁업에 많이 뛰어들었고 이밖에 부동산과 숙박업 등으로 진출해 경제력을 축적, 한인사회의 경제적 지위가 높아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노동 이민선을 타고 건너온 초기 사탕수수 노동자들이 하와이 이민역사의 씨를 뿌린 始祖(시조)들이었다면 제2의 물결을 이룬 사진신부들은 하와이 한인사회를 성장·발전시킨 하와이 이민사의 母胎(모태)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