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연방 노동부에 한인 조사관이 둘이나 같은 곳에 근무해 눈길을 끌고 있다. 화제의 주인공들은 노동부 북부뉴저지 지국에 근무하는 황유경 조사관과 최 영 조사관.
이들은 지난해 8월부터 노동부 시급부서(Wage and Hour Div)에서 연방조사관(Federal Investigator)으로 근무하고 있다. 미국의 주류 정부기관에 근무하는 한인들이 최근들어 급격히 늘어나고 있지만 이처럼 한 부서에서 호흡(呼吸)을 이루는 것은 보기 드문 경우이다.
더구나 이곳에 다른 아시아계 근무자들이 거의 없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들의 존재는 더욱 두드러진다. 이렇게 한인 조사관이 파격적으로 복수 근무를 하게 된 것은 아시안아메리칸 US사법재단의 데이빗 정 명예회장의 역할이 컸다.
미주류 사법기관들과 한인사회의 가교역할을 맡아 온 정 명예회장은 평소 친분이 있는 이곳 책임자 조셉 페트레카 국장에게 오래전부터 노동부 내 한인 조사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포트리와 팰리세이즈팍 등 북부 뉴저지에서 큰 상권을 형성하고 있는 한인사회의 중요성을 고려할 때 한인조사관의 존재가 서로에게 득이 된다는 논리였다.
페트레카 국장 역시 이같은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조해 지난 2008년 처음 한인을 조사관으로 영입했다. 이 조사관이 지난해 개인적인 사정으로 떠나게 되면서 굳이 후임을 한인으로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인도와 중국 커뮤니티의 규모도 상당히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트레카 국장은 한인을, 그것도 두명을 한꺼번에 선발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곳의 유일한 아시안으로 손발을 맞추게 된 황유경 조사관과 최 영 조사관은 각기 풍부한 경험과 전문성을 갖추고 있는 엘리트 한인들이다. 특히 황유경 조사관은 한국의 정부기관에서 근무하고 유학을 온후 노동부에 선발돼 관심을 모은다.
황 조사관은 “한국의 정부기관의 재정파트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2001년 미국에 유학왔다. 올바니(Albany) 뉴욕주립대에서 행정학 석사학위를 받고 공인회계사 자격증도 땄다”고 소개했다.
한국에 잠시 들어간 그녀는 2005년 결혼과 함께 미국에 다시 오게 됐다. 회계사 사무실에서 근무하다 2009년 8월엔 블룸버그 통신에 입사해 연구원으로 재직했다.
하지만 자신의 전공과 적성에 공무원이 맞는다고 판단, 진로를 모색하다가 노동부 경력직 조사관이 되는 기회를 잡게 됐다. 황 조사관은 “한국 정부에서 일한 경력과 회계사 자격증 등이 모든 경험과 지식이 이곳에서 활용을 할 수 있어 정말 좋다”고 만족해 했다.
뉴저지 프린스턴에 살다가 노동부에 입사한 후 이 지역으로 이사를 왔다는 황 조사관의 남편 매튜 스톨로프 씨는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동료 최 영 조사관은 열한살 때 미국으로 이민온 1.5세다. 버지니아와 펜실배니아에서 성장한 그는 메릴랜드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뉴욕주 노동국에서 경력을 쌓았다. 실제 나이(34세)보다 훨씬 어려보이는 그는 “뉴욕주 노동국에서 경험한 게 있어서 일 자체는 어렵지 않다. 보람도 많다”고 전했다.
페트레카 국장은 “두 사람이 온 다음에 사무실이 정말 평화로워졌다”는 농담으로 운을 뗀 후 “이 지역에서 중요한 한인사회와 노동부의 거리가 가까워졌고 경험과 지식이 풍부한 두 사람덕분에 업무 효율성이 아주 높아졌다”고 칭찬했다.
뉴욕=노창현특파원 croh@newsoh.com
<꼬리뉴스>
올해 노동부 주유소 건설업종 실태 집중조사
현재 두 사람이 맡고 있는 것은 주유소에서 근무하는 임시직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지급 실태를 조사하는 것이다. 최 조사관은 “노동부에선 매년 특정한 분야의 타겟을 정해 집중적으로 실태를 파악하는데 올해는 주유소와 건설업종을 다루고 있다”고 귀띔했다.
황유경 조사관은 “특별히 저임금 산업체서 오버타임문제가 많이 발생하는만큼 조사분야를 압축 선정해 플랜을 짜고 있다. 고용주들이 보통 소홀(疏忽)한 것이 오버타임 수당 지급이라 이 부분에 대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식당과 델리가게 세탁소 등 한인 업주들이 많은 분야에서 히스패닉 등 타인종 종업원들을 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언어적 문화적 차이로 갈등(葛藤)을 빚거나 제대로 수당을 지급하고도 기록을 남기지 않아 훗날 억울한 피해를 당하는 일도 발생한다는 것이다.
두명의 한국인 조사관이 이곳에서 근무하면서 노동부에 대한 한인들의 거리감이 좁혀지고 문제 발생시 기본적인 통역은 물론, 합의점을 찾는 일도 한결 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