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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미곡상인들이 두려워한 전골패 노인’

백년전(百年前) 오늘 신문<40>
글쓴이 : 륜광 날짜 : 2024-05-17 (금) 00:04:40

백년전(百年前) 오늘 신문<40>

 

Newsroh=륜광輪光 newsroh@gmail.com

 

인천항은 19세기 말엽부터 경기도 일대에서 생산되는 쌀 등 미곡(米穀)의 주요 수출항이었다. 189641일 일본인 미곡상 14명은 인천일본인상업회의소의 지원 아래 소위 미두취인소(米豆取引所)’라는 기관을 설립했다.

 

일본식 한자어인 미두취인소는 이른바 기미(期米 장기거래를 목적으로 매매되는 양곡)를 통한 일종의 선물(先物) 거래소였다. 오사카(大阪) 기미시장(期米市場)에서 투기거래를 통해 파산한 일본상인들은 인천의 상권을 장악하고 투기거래에 익숙하지 못한 조선인들을 시장에 유인하고 한반도 내 미곡시장 장악을 위해 조선정부도 배제한 채 멋대로 수탈기관을 설립한 것이다. 조선은 이미 1910년 합일합병 이전부터 일제의 반식민지였다.

 

미두취인소의 등장으로 객주회, 신상협회, 근업회 등 조선상인들의 유통망은 빠르게 와해되었다. 미두취인소가 투기장으로 변질되면서 일확천금(一攫千金)을 꿈꾸는 조선인 투기꾼들이 땅문서와 현금을 들고 몰려들었다. 일본인은 조선총독부의 고급 정보를 활용했기 때문에 손해를 보는 일이 적었지만 ()’이나 점괘에 의존한 조선인들은 결국 망하고, 패가망신(敗家亡身) 하는 일이 허다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의 토지가 일본인에게 상당히 많이 넘어갔고 조선의 토착자본은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

 

1924년 매일신보엔 기미계(期米界) 기걸(奇傑)’로 불리는 전골패(全骨牌) ()을 소개하는 기사를 실었다. 전골패 노인은 인천미두취인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한 개혁운동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매일신보는 인천 미두취인소 기미시장(期米市場)에 전골패(全骨牌)라 하면 기미계에 한 번이라도 투족(投足)한 흔적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가 어떠한 인물이며 어떠한 기행자(奇行者)임을 알 것이다.. 인천의 생명은 정기시장(定期市場)에 달렸다. 인천 미두취인소 이외 취급점은 정관에 어그러질뿐 아니라, 인천 시민의 큰 타격이다. 인천 시민은 인천을 위하여 마땅히 방해자와 다툴 것이다. 시민대회를 열자.이 문제로 전골패(全骨牌) 노인이 4년동안 발분망식(發憤忘食) 여러 가지로 운동을 하며 인첩부윤과 경찰서장을 방문한 일이 한 두 차례가 아니었다고 전했다.

 

신문은 이어 미두취인소장은 이 사람을 호랑이라고 부르게 되기 까지 성가심을 받았다. 이것만 보아도 전골패(全骨牌) 노인의 운동이 얼마나 열성인 것이 증명된다.. 지난 4일 전골패(全骨牌) 노인은 선전지 3,000장을 인쇄해 가지고 대대적으로 여론을 일으키고자 하나, 인쇄물 취체법의 장해로 아직 교섭 중이라 한다. 그런데 이 전골패(全骨牌) 노인이 이와 같이 공익 사업에 발분망식(發憤忘食)함은 그 이면에 어떠한 사리(私利)가 붙은 것이 있음도 아니다. 다만 이 노인의 성격이 이러한 것이다라고 소개했다.

 

전골패라는 특이한 이름은 사실 그의 별명이었다.

 

하필 골패(全骨)라 함은 무슨 이유인지. 별명의 유래에 대하여 이 노인의 말을 듣건대, “나의 고향은 충청남도 담양군 북면 매포리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전골패(全骨牌)라 하나, 나의 본 이름은 전진일(全鎭一)이다. 골패(骨牌)라 부르는 이유는 내가 골패를 잘 한다 함인데, 그는 사실이다. 조선 13도 중에서 골패로는 내 돈을 먹을 사람이 몇 명이 못 된다고 장담한다. 그러나 9년 전부터 숲과 함께 끊어 버렸다. 그 전에는 나도 쓸쓸한 난봉꾼이었지만, 지금은 봉공(奉公)으로 전일(前日)의 죄를 속량(贖良)하고자 한다.”

 

아카이빙 전문매체 근대뉴스(http://www.19c.co.kr/) 가 제공하는 백년전 기사를 소개한다.

 

기미계(期米界) 기걸(奇傑) 전골패(全骨牌) (1924.05.07.) 매일신보

전죄(前罪)를 속량(贖良)키 위하여

사회 봉공(奉公)에 노력한다

이전에는 쏠쏠한 난봉꾼



 

좋은 의미로는 곡물 시가(市價)를 공정(公定)하는 업지 못할 기관, 나쁜 의미로는 일확천금(一攫千金)을 꿈꾸다가 패가망신(敗家亡身)하는 관허(官許) 도박장, 그리고 경제의 입장으로는 인천(仁川)의 생명이라 하는 조선에는 오직 하나인 인천 미두취인소 기미시장(期米市場)에 전골패(全骨牌)라 하면 기미계에 한 번이라도 투족(投足)한 흔적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가 어떠한 인물이며 어떠한 기행자(奇行者)임을 알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 늦은 봄 어떤 날 오후에 인천 미두시장 근처에 있는 상업전보통신사 문밖에는 수백 명의 미두꾼이 겹겹이 에워싸고 고함을 지르며 사무실 안에는 50여 세 되어 보이는 흰 수염 느린 갓() 쓴 노인 한 사람이 일본인 사무원의 멱살을 치켜 들고 이놈, 위전(僞電)으로 뭇사람을 속인 너같은 놈은 공적(公敵)이다. 마땅히 때려 죽일 놈이다.” 부르짖음이 끝나자 군중은 조수(潮水)같이 밀려들어 여기서 발길 저기서 주먹 한참 동안 수라장을 이루었다가, 사무원이 뒷문으로 도망하고 경관대가 출동하여 진정된 일이 있었다. 이것이 시모노세키(下關) 중계의 착오로 발생하였던 유명한 1920년 오전(誤電) 사건이며, 군중의 선봉이던 노인이 문제의 인물 전골패(全骨牌) 노인이며 이 사건이 전골패(全骨牌) 노인으로 하여금 인천 기미계에서 주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다음 해 오전(誤電) 사건에도 이 전골패(全骨牌) 노인이 선봉이 되었었으며 기미계에 문제이던 치합회령(値合橫領) 사건으로 인천 기미 시장을 뒤집어 놓던 장본인도 이 전골패(全骨牌) 노인이었었다. 그리고 이 노인이 4년 전부터 이날까지 그치지 아니하고 부르짖는 큰 문제가 있다. 인천의 생명은 정기시장(定期市場)에 달렸다. 인천 미두취인소 이외 취급점은 정관에 어그러질뿐 아니라, 인천 시민의 큰 타격이다. 인천 시민은 인천을 위하여 마땅히 방해자와 다툴 것이다. 시민대회를 열자.이 문제로 전골패(全骨牌) 노인이 4년동안 발분망식(發憤忘食) 여러 가지로 운동을 하며 인첩부윤과 경찰서장을 방문한 일이 한 두 차례가 아니었다. 취인소장은 이 사람을 호랑이라고 부르게 되기 까지 성가심을 받았다. 이것만 보아도 전골패(全骨牌) 노인의 운동이 얼마나 열성인 것이 증명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아직도 성공을 보지 못 하였으나 요즘은 이 문제에 대한 시민 대회를 열고자 하는 여론이 넓어간다. 지난 4일 전골패(全骨牌) 노인은 선전지 3,000장을 인쇄해 가지고 대대적으로 여론을 일으키고자 하나, 인쇄물 취체법의 장해로 아직 교섭 중이라 한다. 그런데 이 전골패(全骨牌) 노인이 이와 같이 공익 사업에 발분망식(發憤忘食)함은 그 이면에 어떠한 사리(私利)가 붙은 것이 있음도 아니다. 다만 이 노인의 성격이 이러한 것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짓는 이름이 여러 가지 괴상한 것이 많을 터이나 하필 골패(全骨)라 함은 무슨 이유인지. 별명의 유래에 대하여 이 노인의 말을 듣건대, “나의 고향은 충청남도 담양군 북면 매포리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전골패(全骨牌)라 하나, 나의 본 이름은 전진일(全鎭一)이다. 골패(骨牌)라 부르는 이유는 내가 골패를 잘 한다 함인데, 그는 사실이다. 조선 13도 중에서 골패로는 내 돈을 먹을 사람이 몇 명이 못 된다고 장담한다. 그러나 9년 전부터 숲과 함께 끊어 버렸다. 그 전에는 나도 쓸쓸한 난봉꾼이었지만, 지금은 봉공(奉公)으로 전일(前日)의 죄를 속량(贖良)하고자 한다.

 

졸업생 환영 석상에서 사상 충돌 (1924.05.08.) 매일신보

유산계급만 장하게 알고

무산자를 멸시한다고



 

지난 3일 오후 7시부터 함흥 읍내 함흥관이라는 갑종 요리점에서 이번에 동경과 경성에 유학하다가 형설(螢雪)의 공()을 마치고 금의환향(錦衣還鄕)한 이봉근(李奉根), 권두경(權斗經), 김종화(金鍾和) 외 몇 명을 환영하는 의미로, 동경과 경성 유학생과 기타 유지 40여 명이 모여 졸업생 환영회를 열고 기생을 불러 술이다 소리다 하고 한바탕 흥취있게 즛부시는 판에, 10시경 쯤 되어 의외에 건강한 청년 몇 명이 돌입하여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함부로 술상을 걷어차며 닥치는 대로 집어 치고 야단을 치므로, 이 편에서도 혈기왕성한 청년 몇 사람이 그에 대항하여 일대 격투가 일어났는데, 이 편의 형세가 점점 위급하므로 그 사품에서 빠져서 가만히 저의 집으로 도망한 자도 있었으며 혹은 부엌으로 혹은 변소로 뿔뿔이 몸을 피하여 근래에 드문 일대 활극을 연출한 사실이 있었는 바, 이제 그 사실의 내용을 대강 들어보면 위 졸업생 환영회로 말하면 성질상 일반에 공개를 하여야 할 것인바 시대일보 함흥지국장 이희복(李喜複), 동아일보 지국장 박용하(朴鎔夏) 두 명외 몇 명의 발기자들이 자기네와 친한 돈있는 사람만 청하고 무산계급에는 통지도 아니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차별이냐 하는 것이 그 주된 원인이요 둘째는 오늘날 어디를 물론하고 공창(公娼) 폐지의 소리가 높은 이때에 졸업생 연회에 기생을 불러 노는 것은 지식계급에 처한 사람으로는 가히 할 바가 아니라는 등의 조건으로 불평을 일으켜 가지고 그와 같이 수라장을 이루게 하였다는데, 그들의 조건 속에는 물론 이치에 당연치 못한 점도 있는 모양이다. 여하간 이번 사건은 무산계급 대 유산계급, 무식계급 대 유식계급의 도전(挑戰)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라 하여 일반은 그들의 금후 태도를 주목하는 중이라더라. (함흥)

 

임농탈경(臨農奪耕)하는 이민(移民) (1924.05.10.) 동아일보

도척(刀尺)회사 이민 4호가

400두락(斗落)을 빼서

안성에서 생긴 사건

 



경기도 안성군 보개면에는 이번에 동척 이민 4호가 이주하였는데, 이민 1호에 대하여 동척 소유 토지 100두락씩 도합 400두락을 맡아 가지고 와서 그 가운데서 이민이 자작(自作)하는 토지는 1호에 대략 40두락 4호 대략 200두락쯤 되는데, 이민이 자작하는 토지는 지금 농사 시기가 된 이때에 이르러 그 지방에 있는 조선 사람이 소작하는 토지를 뺏아 가지고 이민이 짓게 되므로, 이미 비료도 내고 못자리도 하게 된 이때에 소작권을 빼앗긴 그곳 주민들은 자기의 생명을 잃어버림과 같이 중대한 일이므로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남에게 적악(積惡)을 하고 저만 잘 살겠다고 이주한 동척 이민을 찾아보고 토지 소작권을 빼앗김은 우리의 목을 베는 것과 다름이 없다하며 손을 자기의 목에 대고 베는 형용을 내며 무수히 애걸한 바, 서로 말이 잘 통하지 못하는 일본 이민은 저희의 목을 벤다는 말인 줄 알고 매우 무서워 하여 어찌 할 줄을 모르다가, 이민들이 의논한 결과 자기들이 사는 가사리 주민이 소작하는 것은 그 가운데서 좋은 토지만 자기들이 짓기로 하고 다른 마을(사토리, 이외리) 사람들이 소작하는 토지는 그 소작권을 빼앗아 가지고 가사리 주민 중에 소작권을 빼앗긴 사람에게 대신으로 주었다는데, 이에 대하여 부근 일반은 동척 이민에게 쫓겨서 정든 고향을 뒤로 두고 남북 만주 쓸쓸한 벌판으로 가게 된 우리의 운명이라도 농사 때가 되어서 소작권을 빼앗기는 일은 너무나 분하다고 일반이 분개한다 하며, 동척 농감 민영선(閔泳善)씨는 이 일을 동척 경성지점에 통지하고, “소작을 이동하지 말도록 하라고 교섭하였으나 결국은 이민들의 고집대로 소작을 이동하고 말았다고. (안성)

 

 

선척(船隻)과 노동자의 지난 달 거래 (1924.05.10.) 동아일보

인천항을 중심으로



 

지난 한 달 동안 무역액이 10,700,000여 원에 이른다는 인천항의 그 짐을 싣고 들고난 기선이 모두 몇 척이나 되며 그 배는 어느 나라 사람의 배인가. 또한 인천을 거쳐 조선에 퍼지는 중국인 노동자는 지난 한 달 동안에 얼마나 왔으며 이 까닭에 쫓겨 간다고 할는지는 모르나, 어쨌튼 정든 고국을 등 뒤에 두고 일본 혹은 중국으로 팔려가는 노동자는 얼마나 되는가. 이제 넓혀 보건대 선적(船籍)을 일본에 둔 상선이 59척이 들어왔고 47척이나 갔으며, 미국 또는 독일 기타 외국에 둔 상선이 7척이 다녀 갔으며, 중국에서 소금을 싣고 온 짱크(戎克; 정크선)선이 18척 입항에 27척이 나갔다 한다. 그리고 중국에서 건너 온 중국인 수효가 4,920명이라 하며 그들의 대개는 노동자라 하니 중국으로 돌아간 중국인 869명을 비겨 보면 4,000여 명이 조선에 처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며, 조선 사람으로 조선에서 살 수 없어 혹은 일본인 손에 팔려 조선을 떠난 자가 일본에 814명 중국에 138명이라는데, 그중에는 별다른 장사나 자기 자유로 가는 자도 있지만 대개는 노동자로 팔려 가는 사람이 많다 한다. 이제 출입한 배를 선적(船籍)을 둔 나라 별로 보면

 

선적(船籍) 입항 출항

일본 기선(汽船) 5947

중극 짱크(戎克) 18 28

기타 외국 7 7

연안 통행선 121 108

(연안 통행서도 조선 사람 소유는 몇 척에 지나지 못한다 한다)

 

조선에 건너 온 사람

국적 일본에서 중국에서

조선인 2 15

일본인 4 99

중국인 - 4,920

기타 외국인 - 2

 

조선을 떠난 사람

국적 일본으로 중국으로

조선인 814 138

일본인 14 86

중국인 - 869

기타 외국인 - 2

 

28년 동안 악부(惡婦) 간승(奸僧)의 추행(醜行) (1924.05.10.) 매일신보

계집은 자백하고도 다시 부인

아들은 아비를 구타 모욕한다



 

함흥군 남주동면 사포리에 거주하는 한영하(韓泳夏·43)란 자는 변호사 홍성연(洪聖淵)씨를 소송 대리인으로 함흥군 천원면 중상리 이규주(李逵周)의 집에 있는 이헌순(李憲純·47)이란 여자를 걸어 함흥지방법원 민사부에 이혼 소송을 제기하였는데, 이제 그 내용을 대강 듣건대 한영하와 이헌순이가 서로 부부가 되기는 지금으로부터 32년 전인데, 이헌순이는 시집을 와서 몇 해 되지 아니해서부터 품행이 방정치 못하여 친가로 도망하거나 나가 자는 일이 있으므로, 한영하는 항상 그를 주목하였던 터인데, 작년 1월 이래로 그는 저의 아들(한영하와 이헌순 사이에서 생긴) 한두정(韓斗偵)이란 아이와 공모하고 누누이 가산을 분배해 달라고 조를 뿐 아니라 한두정이는 그 부친 한영하에게 대하여 말하기를, “나는 너의 아들이 아니라하며 구타 모욕을 하므로 한영하는 더욱 의심을 내어 마침내 작년 음력 7월 하순경에 이르러 이헌순에게 말하기를 네가 나에게 불응할 뿐 아니라 나의 아들이라고 믿던 아이까지 나를 배척하니, 아마 네가 간부(奸夫)를 두었나 보다하면서 책망하고 때리는 바람에, 매를 못 이겨 그리하였든지 지금으로부터 18년 점 봄에 자기 실가(實家)에 가 있다가 어떤 날 저의 오라비의 처 되는 현성녀(玄姓女)와 같이 함흥군 천서면 신흥리에 있는 광흥사(廣興寺)로 재() 구경을 갔다가 그 절의 이포운(李包雲)이란 중과 간통한 일이 있었는데, 그 후 지금껏 계속하여 왔노라고 자백하므로, 한영하는 기가 막혀 별 말할 것 없이 너하고 살 수가 없으니 이제는 서로 좋게 협의상 이혼을 하자한 즉, 여자는 좌칭우탁(左稱右託; 이리저리 핑계댐)하면서 그에 응하지 아니 하므로 부득이 본 소송을 제기한 것이라 하며, 원고 즉 한영하 편에서는 자기의 동서 한상위(韓相威)와 한영하의 제수(弟嫂) 김성녀(金姓女)와 또 임기원(林基元), 이기순(李基侚) 외 몇 명을 증인으로 입증케 하여 심문한 결과, 임기원, 이기순 2명은 이헌순의 자백과 같이 공술하고 한상위와 김성녀도 역시 작년 7월 하순 경에 한영하가 이헌순을 때리면서 물을 때에 이헌순의 말이 중놈하고 간통하였다고 자백하는 것을 확실히 들은 일이 있다고 하였으며, 피고되는 이헌순이는 제1회 사실 심문할 때에 자기 아들 한두정을 대리로 변론케 하였는데, 국지(菊地) 재판장으로부터 법률 상으로는 무관하나 도덕상으로 보면 부자 간에 소송을 한다는 것이 좀 좋지 못한 것인 즉 다른 친족을 대리로 세우라 권고한 결과. 피고 이헌숙 측에서는 변호사 채용묵(蔡容黙)씨를 소송 대리인으로 해 가지고 원고 한영하는 몇 해 전에 김경란(金瓊蘭)이란 여자와 살다가 작년부터는 계림여관의 주인 조병희(曹秉姬)란 여자와 내연(內緣)이 있어 가지고 살아오는 중인데, 그 여자하고 살려면 불가불 본처를 버려야 하겠다는 망상으로 위와 같은 소송을 제기한 것이라 하여, 원고 측의 말을 전부 부인하였는 즉, 과연 이 문제의 결말은 어떻게나 될른지 일반 사회에서는 크게 주목하는 바이며 또 다음 공판은 515일이라는제 이포운 이란 중은 2~3년 전에 꽃 같은 미인의 아내를 얻어 가지고 지금 함흥 대화정 2정목에서 가마() 장사를 하고 있는데, 한영하가 승소를 하면 아들 하나를 얻어 보고 만일 지며는 명예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한편에서 으르고 있다더라. (함흥)

 

광견(狂犬) 횡행(橫行) (1924.05.08.) 매일신보

 


 

누구를 위한 문화정치인가 (1924.05.08.) 조선일보

 


 

우마차(牛馬車) 제공 광고 (1924.05.09.) 조선일보

 


 

☯ 『그저먹고 그저노는 경관 (1924.05.09.) 조선일보

 


 

늑대에 물린 사람 (1924.05.09.) 조선일보

 



신출귀몰하는 의열단 (1924.5.9.)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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