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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여인’의 화가 임직순 30주기 특별전을 가다

글쓴이 : 민지영 날짜 : 2026-11-08 (일) 15:31:44

Newsroh=민지영기자 newsrohny@gmail.com


서울 종로구 부암동 서울미술관은 유독 깊고 짙은 가을빛이었다.

 



추상과 단색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도 묵묵히 구상회화의 길을 걸으며, 강렬하면서도 따뜻한 생명의 서사를 펼쳐 보인 ‘색채의 대가’ 운창(雲昌) 임직순(1921~1996) 화백.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30년, 석파정 서울미술관 3층에 역대 최대 규모의 특별 회고전 《내면의 세계를 그리고 싶다》가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평생을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캔버스 앞에 앉아 치열하게 자신을 연마했던 한 인간의 순정한 삶의 풍경을 고스란히 복원해 낸다. 전시장 초입에 들어서면 따스하면서도 강렬한 색감들이 발걸음을 붙잡았다.

 



연대기순으로 배열된 작품마다 스며든 작가의 예술적 궤적(軌跡)이 아련한 추억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임직순 화백은 눈에 보이는 풍경을 정직하게 재현하는 데서 출발해 그 대상의 내면과 본질을 관통하는 거대한 심상의 세계로 확장하는 작가이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임직순의 예술 세계를 대표하는 여인 좌상과 꽃과 화병을 중심으로 한 정물화를 대거 선보인다. 일생에 걸쳐 반복하며 다루어온 소재를 자신만의 색채와 붓질로 새롭게 변주하며, 인물과 꽃, 배경이 하나의 화면 안에서 조화를 이루는 그의 회화적 특징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정열과 고뇌, 사랑의 색채




 

충북 괴산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유화(油畫)를 공부한 임직순은 1957년 국전에서 ‘좌상’으로 대통령상을 받으며 화단의 중심에 섰고, 1961년부터는 조선대 교수로 부임해 호남 서양화단의 기틀을 다졌다. 그는 현실의 안주와 명예 유지에 머물지 않았다. 1970년대 파리 체류와 인상주의와의 조우(遭遇), 그리고 말년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사생과 탐구를 거듭했다.

 

1977년 인터뷰에서 "내면의 세계를 그리고 싶다"는 고백처럼, 색채는 더 이상 자연의 빛을 베끼는 도구가 아니었다. 대상을 마주하며 가슴속에서 우러나온 정열과 고뇌, 그리고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다.

 




전시장 구석구석에는 시공을 초월한 작가의 숨결이 담겨 있다. 오전에는 화실에 앉은 여성 모델을 향해 붓을 들고, 오후에는 아내가 정성껏 꽂아준 화병의 꽃을 바라보며 정물을 그리던 일상. 모델이 앉았던 라탄 안락의자와 닳고 닳은 팔레트, 물감이 굳어버린 붓과 이젤은 그가 누렸던 화려한 ‘대가’의 명성보다 매일 치열하게 일상을 쌓아 올린 한 예술가의 진면목이 느껴진다.

 

파리에서 인상주의(印象主義)를 접하면서 그는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한층 깊어졌다. 빛에 따라 달라지는 색을 탐구하던 그는 점차 눈에 보이는 모습을 그대로 옮기는 데서 벗어나 대상과 마주하며 느낀 감정과 그 안에 담긴 본질을 화면에 담고자 했다.

 

색채는 형태를 설명하는 수단을 넘어 화면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고, 단순화된 형상과 대담한 붓질을 통해 내면의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여인과 꽃을 바라보며 그 안에 깃든 생명의 힘을 발견하고자 했던 그의 관심은 점차 구체적인 대상 너머에 존재하는 본질을 향해 나아갔다.

 



“눈에 띄지 않지만 가을 햇살 속에 스며드는 빛의 부드러움과 신비스런 색채의 조화는 나로 하여금 무한한 기쁨을 맛보게 했으며, 나의 작품세계가 자연의 빛에 얼마나 깊이 의존하고 있는지를 다시 한번 느끼게 해주었다.”- 전시장 설명

 



1980년대는 가장 왕성한 작품 활동속에 오랜 시간 탐구해온 예술 세계가 절정(絶頂)에 이른 시기이기도 하다. 사생을 통해 산과 바다, 항구 등 자연으로 소재의 범위를 넓혀가는 한편 여인과 꽃을 비롯한 기존의 모티프에서도 대상을 재현하기보다 색과 선, 붓질이 만들어내는 조형적 조화를 더욱 깊이 있게 탐구했다. 대담한 선과 강렬한 색채가 어우러진 화면에는 자연과 대상을 마주하며 느낀 감흥(感興)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할아버지의 사랑, 미완의 유작

 

작품 못지않게 인상적인 전시물은 타계 1년 전인 1995년 11월, 이역만리 미국에 사는 어린 손녀들에게 보낸 그의 친필 편지다. 아이가 좋아할만한 소박한 그림이 그려진 편지는 "이역만리 미국땅에서 공부에 여념이 없는 사랑스런 손녀에게 이 글을 보낸다. 항상 꿈이 많은, 약동하는 꿈을 지닌 손녀들아..."로 시작한다.



 


세로쓰기로 정성스레 써 내려간 편지 속에서 화백은 한문 단어 뒤마다 세심하게 괄호를 열고 한글을 병기해 넣었다. 아직 한자가 익숙지 않은 어린 손녀들이 혹여 읽기 어려울까 배려한 할아버지의 깊은 사랑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할아버지는 요사이 한눈팔 사이 없이 작품 제작에 바쁘다. 그럴수록 여념이 없어지고 새로운 꿈이 생긴다"며 화실과 물감 도구들을 아기자기한 그림으로 그려 넣은 대목에서는 거장(巨匠)이라는 타이틀 뒤에 숨겨진 정 깊고 따스한 할아버지의 모습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1988년부터 이어진 가혹한 신장병 투병 속에서도 그는 붓을 놓지 않았다. 말년으로 갈수록 형태는 대담하게 생략되고, 화면은 두텁고 강렬한 마티에르와 힘찬 붓질 속에서 본질만을 남겼다.

 

이번 전시의 가장 가슴 먹먹한 하이라이트는 작고하던 해인 1996년, 미국 여행에서 마주한 이국적 풍경을 담아낸 미공개 유작 ‘팜트리’다.

 



생전 쓰던 이젤 곁에 묵묵히 놓인 이 미완의 캔버스 위에는, 20년 전 병실에서 그가 읊조렸던 ‘내면의 빛’이 여전히 뜨겁게 살아 숨 쉬고 있다. 끝내 서명조차 남기지 못한 채 붓을 내려놓아야 했던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의 영혼은 찬란한 태양과 자연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석파정의 깊어가는 가을빛과 어우러진 이번 임직순 30주기 특별전은, 현대 미술의 홍수 속에서 우리가 잠시 잊고 살았던 '그림을 향한 진심'과 '가족을 향한 따스한 온기'를 일깨워주고 있다.

 

눈에 보이는 형상을 넘어 존재의 깊은 내면과 사랑을 캔버스에 아로새겼던 임직순 화백. 그가 남긴 짙고 따뜻한 색채의 연주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에 깊은 평화와 울림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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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뉴스>

 

석파정 서울미술관 대형단체기획전 주목 (2026.11.7.)

28인 기획전 <대체로 그렇다, 그렇지 않다> 3인 조각전 개막

 

https://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m0604&wr_id=13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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