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는 여고 시절 친구를 따라 처음 방문했던 기억 속의 도시와는 전혀 달랐다. 이제는 서울의 일부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화려하고 현대적으로 변모한 광주광역시의 모습이었다. 그런 광주에서 지난 10월 17-18일 이틀 동안 <일제 전쟁유적 네트워크> 2회 전국대회가 전일빌딩에서 열렸다.
오랜만에 서울에 갈 일이 생겨 올라갔다가 그동안 제주에서 '송악산알뜨르 사람들'과 함께 활동하며 알게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일제 전쟁유적에 대해 더 많이 알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 대회장을 찾았다.

# 전국대회에 참여한 발제와 토론자들 사진 문영임
이번 대회에 관계한 단체들의 이름만으로도 이 대회의 진정성이 실감났다. 일제전쟁유적네트워크,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한일민족문제학회, 군산대학교 인문도시센터... 대회는 시작하자마자 각 단체장들의 간단한 개회사를 시작으로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국언 이사장의 일제 '잔재'에서 '전쟁유적'으로 바뀐 사진을 보여줬다.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에서 찾아나선 광주 도심 주변의 전쟁 유적 발굴 작업과 이 유적들이 세워진 역사적인 사실과 이 유적들을 어떻게 보존, 존치할 것인지? 어떻게 후세에게 우리의 어두운 역사이지만 반복하지 않도록 가르치고 남길 것인지 자세하게 설명해 줬다.

#대회장에 전시된 2025년 8월 18일 광주일보 사진 문영임
2013년 광주·전남 지역 일제 강제동원 현장 답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일제 전쟁유적'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광주·전남 지역 내 답사지를 발굴하고 답사를 거듭하면서 정치와 역사의 '현장'이 갖는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중 아무도 인식하지 못하고 다니던 동네와 초등학교의 이름이 김백일,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이름에서 온 것을 알고 백일로-->학생독립로, 백일어린이공원-->학생독립어린이공원으로, 백일초등학교를 4.19학생운동을 이끌었던 학생회의 이름인 성진회에서 따온 성진초등학교로 변경한 것이 첫 사례가 되었다고한다. 특히 일제 전범기업 미쓰이 계열 가네보방적(주)을 회원들과 답사(踏査)할 때만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오래된 공장의 건물을 2025년 광복 80주년을 맞아 광주시가 <일제강제동원 시민역사관> 건립 계획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광주 도심 내 일본군 시설 뿐만 아니라 남북한을 합쳐 진지동굴과 지하벙커, 비행장, 격납고,활주로, 포대, 토치카, 참호, 군수공장과 탄약고와 군사기지를 포함해서 강제동원 현장과 노동장 숙소, 철도와 항만까지 합치면 2016년 정부 위원회의 활동결과 보고서에서느 7,467개로 집계되었다. 국가유산청 위원회가 일본 내 공식 발간물과 자료집, 신문기사 등을 토대로 조사한 통계 결과다.

# 답사 시에 나눠준 안내장 사진 문영임
KBS목포방송국 지종익 기자는 2025년 일본이 패전으로 우리나라를 떠난지 80주년 특별방송 (서남해안 미인 日 군사시설 발굴) 기획보도를 다시 한번 사진과 함께 자세히 설명해줬다. 처음 그가 취재를 기획할 때만 해도 지도에는 있었지만 실제로 남아 있을까? 배치도만으로 특정할 수 있을지? 찾아간 지역이 일본군 시설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지 등 많은 회의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에서 찾아낸 150사단 진지 배치도와 광주비행장 견취평면도 등을 따라 간 첫 취재지인 용출도, 가사도에서 배치도의 정확성을 확인하고 안내가 가능한 주민을 만나는 등 일본군 시설 전문가의 견해와 옛 문헌을 교차 검증하면서 취재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고 했다. 광주해군항공기지 같은 경우는 히토요시 작전실과 비교했을 때 환풍기와 발전기 등을 고정시킨 흔적과 통신시설을 갖춘 구조 등이 동일하다는 점이 검증되었다. 또한 1945년 3월에 작성된 진해경관구에는 시설의 종류와 공사 기간, 수량 등이 자세히 작성되어 이런 공사가 당시에도 80% 이상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아태전쟁 말기 대전 지역 전황과 전쟁유적에 대해서 동국대 조건교수는 "아시아태평야전쟁 말기, 1945년 전반기 대전지역은 본토결전에 따른 한반도 전장화의 주요 지역이였다"고 발제를 시작했다. 당시 제17방면군 참모장 이하라 준지로는 '대전공원'에 대규모 방공호를 굴착(掘鑿)했다는 증언이 있다. 이는 대전이 단순한 병참 중계지가 아니라 한반도 본토결정을 지휘할 전투 사령부로서 지휘. 통신. 병참, 군수품 창고, 정비, 생산시설과 지하시설을 여러 지역에 분산하는 중심 방어공간으로 이해되었다고 했다. 대전과 영동, 대구를 축으로 서남 해안의 주역부대와 부산 경남 작전지역을 연결하는 보문산 일대의 지하시설과 대사동, 부사도 호동 일대, 신산동까지 대전 중심부에서 외곽을 확대되는 지하시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전 지역의 전쟁 유적이 갖는 특징은 당시 시설을 여러 산지에 분산화하고, 공습을 피할 수 있는 중요 군사시설의 지하화, 해안방어선 뒤 수십~수백 km에 걸친 방어. 병참 공간을 확보한 중심화, 지휘, 항공,통신, 병참, 방호를 기능별로 분리하고 철도. 도로, 항공기지, 통신망이 지하시설로 연결되는 각 시설의 답사 사진을 자세하게 보여주었다. 즉 대전에는 제17방면군사령부, 간선통신망, 육군비행자, 관련된 지하 군사시설까지 일제 전쟁유적이 종합적으로 존재하지만 현재까지도 정부의 무관심 속에서 아시아태평전쟁기 일제 전쟁유적의 주요 장소로 지목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김윤미 연구원은 일본제국의 대륙 침략,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쟁의 연속 속에서 부산은 반복적으로 병력과 군수물자, 정보와 자본이 집결하고 이동한 전략적 결절점으로 활용되었다며 '부산 전쟁유산의 공간적 연속성과 기억의 재구성'이라는 제목으로 발제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군 요새와 방공시설, 병참시설, 철도와 비행장 등이 상호 연계되는 방식으로 군사시설이 확충되었다. 방어공간으로는 가덕도, 외양포, 장자등,영도 , 기장포대와 부산요새사령부, 고사포진지, 대공감시소 등과 분산지 매축지, 우암동, 55보급창일대와 하야리아를 중심으로하는 군수물자의 저장과 관리.보급을 맡은 병참공간, 부산항, 경부선,우암선, 수영비행자, 해운대 육군비행장등의 병역과구수물자의 집결과 이동을 주도한 수송 공간으로 크게 나눠질 수 있다고 했다. 일본의 패망 후 한반도를 점령한 미군은 이런 시설을 그대로 미군 기지로 전환하면서 확대하였고, 한국전쟁기에는 유엔군과 국제기구의 활동을 지원하는 공간으로 기능하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일본군도 미군도 자신들의 군사시설을 자세히 기록한 문서를 찾을 수가 있는데, 한국군은 이런 시설들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나 조사문서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일본군의 군사 공간이자 미군 기지로 활용된 과거를 가진 공간이 시민공원으로 전환되면서 군사 시설의 상당 부분이 사라졌지만 일부 건축물은 역사적 기억을 전달하는 장치로 남았다고 했다. 미군기지의 반환이 제일 먼저 있었지만 공원화되어 전쟁 유적이 남아 있지 않다. 특히 부산항이 개발되면서는 모두 사라졌다는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일본의 침략과 미국의 점령지에서 내 땅이 해방된 지 반세기가 훌쩍 넘어 되찾았는데, 자기 땅을 외적이 어떻게 사용했는지? 무엇을 얼마나 이용했는지? 등을 전혀 조사. 연구하지 않은 나라가 세상에 또 있을까? 언젠가 본 드라마에서도 "남이 빼앗은 것은 찾을 수 있으나, 내가 내어준 것은 찾을 수 없다"는 대사가 한동안 유행했었다. 우리 땅에 남아 있던 외세의 군사시설이 제대로 조사. 연구되지 않은 채 사라져 간 현실은 우리나라 국방 행정의 민낯을 보여주는 듯했다.

# 발제에서 발표된 일제 당시의 부평공장 사진 문영임
마지막 발제를 맡은 일제전쟁유적네트위크 정혜경 대표의 '일제전쟁유적에서 찾은 독립운동사적'은 일제전쟁유적은 군부대와 각종 군사시설물을 포함한 군사유적, 공장, 탄광광산, 철도로, 일반 토건, 하역수송, 집단농장과 부국대등의 생산관계유적, 노무자 사택, 군사방위관련, 공동창고 등의 기타 유적과 조선총독부 관련 유적을 포함한 신사, 경찰서, 세무서, 동척등의 조선 통치와 관련되 식민통치 유적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독립운동사적은 일제 강점기 당시 한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전개한 항일 독립운동의 발자취와 역사적 사실이 깃들어 있는 장소나 건축물로서 3.1운동 등 대규모 만세 시위가 벌어졌던 장소, 의병과 독립군의 무장 투쟁지, 독립운동 단체의 본부, 비밀 결사 조직지 , 임시정부 청사등의 활동 거점, 독립운동가들의 가옥, 독립운동 인재를 양성하던 학교터등의 거주지, 독립운동가가 투옥되어 고문을 겪거나 순국한 감옥을 포함한 희생과 수난지 등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2015년 국가유산청 위원회가 조사한 일본이 강제동원한 조선인 현장 현황은 한반도, 일본, 사할린, 태평양, 동남아, 중국 만주를 합해 소계 12,095개소에 달한다. 이에 반해 일제전쟁유적에서 찾은 '독립운동사적'은 일본에 10개소, 한반도에 18개소, 동남아에 1개소뿐이다. 이 중 일본 히로시마현 구레 해군병학교 오하라 분교 비행장 건설 중 김선근등 해군징용공원 700명을 이끌고 폭동을 일으킨 협으로 실형을 받은 사례등을 찾아 당시 시설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하며 설명을 이어갔다.
히로시마현 미쓰비시 중공업 히로시마 기계제작소에서는 박용진의 지도로 독립운동을 하던 중 이천홍과 함께 검거되어 이천홍은 혈서를 쓰고 자결하였다. 당시 히로시마 기계제작소에는 특수잠항정 건조와 항공기 관련 부품 생산을 위해 총 종업원 8,700명이 넘었다고 한다. 대판시 가쓰다 철공소에서는 김상래를 중심으로 민족주의 집단을 결성한 혐의로 검거된 사례와 야하타제철소 김청봉 등도 조선 독립을 희구(希求)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되었다. 이외에도 후루카와 광업 나가마쓰 광산, 니혼강관 가와사키 제강소, 아이치 항공기 에디도쿠 공장, 야마쿠치 광업 오기 탄광, 스모토광업 가라쓰 탄광, 가와사키 중공업 제판탄광 등에서 있었던 조선인들의 항쟁을 소개해줬다.
또한 한반도 사례에서는 니혼 제철 겸이포 제철소, 조선독립회복연구단이 시작된 동춘 육군비행장과 경북 달성군 육군비행학교, 남선 제 17방면군 보병 함남 함흥부에서 일어난 임영선, 이윤철, 태성옥등 학도병 30명과 함께 독립운동세력에 합류하기 위해 일으킨 탈출 사건인 함흥학병사건, 김완룡을 중심으로 조선군관구 평양사관공병 보충대에서 일어난 평양학병사건과 오노다 시멘트 평양공장에서 일어난 조선민족해방협동당 사건의 김종백의 비밀결사단은 일본군에 발각되지 않기 위하여 굴을 파고 군사훈련을 하였다.
나주항일학생운동의 유적지인 나주경찰서, 광주학생운동 발생지인 나주역, 식민통치유적인 서대문형무소, 대한독립당 사건 관련지인 히로나카 부평공장에서는 이연형, 정재철, 등이 독립운동자금 모금과 전달 활동을 하다가 체포된 유적지 소개가 있었다.
인천육군조병창에서는 동원된 조선인 군속을 포섭해 폭발물을 입수해 폭파실험을 하기도 했고, 황장연을 중심으로 무기 탈취 사건, 오순환을 중심으로 친목을 가장한 항일 비밀결사조직인 창천체육회와 조기회로 모여 조선총독과 일제 고관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경기도 포천군 사이토 임업, 산코제탄에서는 조선민족해방협동당 사건 관련 지역에서 12개소의 굴을 파고 군사훈련과 병술, 조선역사, 정신교육을 하며 봉기를 준비하였다.
인도네시아 자바 포로수용소에서는 고려독립청년당 사건으로, 동원된 조선인 포로감시원 1408명 중에서 이억관을 중심으로 창립한 비밀결사로 전투부대를 조직했다. 태국 포로수용소에서 근무 중이던 김주석은 비밀결사 조직에 합류하기가 어려워지자 탈출을 시도하다가 총살당했다.
이번 정혜경대표의 발제는 일반적으로 알고있던 독립운동이나 독립투사들 이외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이 비바람을 피하기도 힘든 시설과 많은 조선인들이 굶어죽었다고 할만큼 열악한 생활에서도 독립운동과 기금을 모으기 위하여 투옥되거나 사형당한 독립운동가들의 유적을 톺아보는 발제여서 더욱 귀중한 시간이었다.

# 광주 화정동 유류동굴 답사 사진 문영임
18일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이 있는 '대일항쟁기 잔재물 화정동 동굴'을 답사했다. 화정동 동굴'(일본 군용비행기의 연료창고로 추정)을 답사하기 위해 가는 길에 백일로에서 이름이 변경된 학생독립로와 성진초등학교를 볼 수 있어서 전날 강의가 더욱 실감났다. 연료고(燃料庫)로 쓰였다는 이 동굴은 총 3개로, 각 동굴은 초등학생들을 동원해 광주천 효덕리 냇가에서 자갈을 모아와 나무판을 이어가며 콘크리트 벽으로 만든 아치형 인공동굴이다. 콘크리트의 두께만 약 60cm가 넘고, 약 80m 길이에 세 사람 정도가 나란히 걸을 수 있는 넓이에 바닥에는 양옆으로 물이 흐르는 구조인데 현재까지도 내부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이 유류고는 광주비행장과 2.5km 떨어진 곳으로 한 곳에 집중하지 않고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어서 제주 알뜨르 동굴진지와는 다르게 서로가 연결되어 있지 않았지만 전체 동굴이 인공산으로 덮여 있었다. 화정동 유류동굴과 함께 5.18 역사공원 내 구 505보안대의 지하 벙커와 주수조 물탱크가 있는 단성전까지가 답사 일정이었으나 난 화정동굴까지만 보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나머지 답사를 놓쳐서 아쉬워 다시 광주를 방문하게 된다면 꼭 답사할 계획이다.
이번 대회에서는 발제자도 토론자들도 답사를 하면서도 대목마다 가장 아쉬웠던 건 일제 전쟁 유적에 대한 행정부의 무관심과 일제 '잔재물'이라는 부정적인 대중의 인식이다. 특히 광주는 5.18 항쟁에 묻혀 다른 많은 사건이 과소평가되어 역사유적의 보존을 등한시하는 점이 안타깝다고 이국언 이사장은 한탄했다. 그는 "과거의 쓰레기가 미래를 위한 역사유적이 될 수 있다"며 정부와 각 지자체의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고 호소했다. 무엇보다 전쟁 유적 자료를 정리하면서 식민지의 민중들이 뼈아픈 고통 중에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독립유적 또한 더욱 조사되고 연구되어야 한다고 정혜경 대표는 주장했다. 현재까지도 내부가 견실한 콘크리트 동굴을 보면서 "만약 일본이 패망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만해도 끔찍하다"는 나의 말에 정혜경 대표는 "상상도 하기싫다"며 고개를 절래절레 흔들었다.

# 화정동굴 앞에서 사진 문영임
이번 전국대회는 단순히 일제의 군사시설을 살펴보는 자리가 아니었다. 식민지의 억압 속에서도 독립을 꿈꾸며 저항했던 사람들의 흔적을 다시 만나는 시간이었다. 또한 과거의 아픈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보존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를 미래 세대에게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지를 함께 고민하는 뜻깊은 자리이기도 했다. 과거를 제대로 기억하는 일이야말로 같은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한 이틀이었다.
운전을 하다 보면 길목마다 있는 CU 편의점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전국 CU 편의점 수가 약 1만 8700개라고 하는데, 전국에 산재해 있는 일제 전쟁 유적이 약 9,000여 개에 이른다. 단순히 비교하면 지금 눈에 보이는 CU 편의점 둘 중 하나는 일제의 전쟁 유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전국에 있는 모든 전쟁유적을 남겨놓을 필요는 없겠지만, 시민공원이나 호텔, 아파트 단지 등 다른 용도로 개발되었더라도 그곳이 한때 일제의 침략과 강제동원과 전쟁 수행 과정에서 수탈(收奪) 당했던 지역민이나 징용되어 온 사람들이 고통당했던 역사가 있었던 장소라는 안내판 정도는 남겨둘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사는 마을이나 내가 여행한 지역의 역사를 이정표나 안내판을 통해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역사교육이자 살아 있는 산교육이 될 것이다. 역사를 기억하는 일이 거창한 기념관이나 박물관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지나치는 공간에 과거의 흔적을 남겨 두는 것, 그것이 역사를 보존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글 문영임(린다 모) |
미국에서의 이민생활을 잠시 접고 고국에서 생활하면서 직접 느끼고 보는 일상을 기록합니다. 더 나은 세상, 더 좋은 이웃의 만남이 더 넓은 세상까지 이어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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