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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환의 한국현대사비화
반공포로 석방은 이승만의 영웅적 쾌거가 아니라 최악의 수였다. 우리 장병 3만명이 희생된 금성천 전투의 비밀. 인천상륙작전은 알아도 평안도 참패는 모른다. 이승만 자진하야의 꼼수. 하와이 망명을 움직인 보이지 않는 손. 우리가 알아야 할 한국전쟁과 이승만의 현대사 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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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거티 다이어리’ 이승만 무력통일 꿈 못버려

글쓴이 : 김태환 날짜 : 2016-01-18 (월) 02: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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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7일은 우리 나라 현대사에 매우 중요한 2가지 일이 일어났다. 모두가 다 잘아는 일은 1953727일에는 휴전이 조인되어 오늘까지 휴전선으로 남북이 분단상태를 76 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지해 오고 있다. 그리고, 그 이후 꼭 일년이 지나서 1954년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초청으로 백악관에 가서 한미 정상회담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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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정부의 홍보 담당 주무부서인 당시 공보처나 신문사 특파원들은 이 박사가 방미 외교로 큰 성과를 얻었다고 엄청난 업적을 소개하고 있으나, 아이젠하워의 대변인인 해거티 씨가 직접 기록한 대담록을 보면, 이승만 대통령은 조그만 전쟁을 일으켜 북한을 무력 통일 시켜달라고 애걸(哀乞)했다. 이에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과 덜레스 국무장관은 이 박사가 생각하는 조그만 전쟁조그만 전쟁으로 시작할지 모르지만, 쏘련이 개입하는 핵전쟁을 유발시켜 민주국가를 방어해주는 것은 고사하고 인류의 문명을 파멸시키는 가공스러운 결과를 낳게 된다고 교장 선생이 철부지 소학교 생도를 타이르듯이 알아들을 수 있게 설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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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박사가 미국에까지 가서 휴전 상태인 한반도에 새로 조그만 전쟁을 치루자고 하는 배경을 우선 살펴보자.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 전쟁이 시작되자, 서울 시민들 몰래 일찌감치 대전으로 도피하고는 마치 자신이 서울에 있는 것처럼 가장해서 서울 시민들에게 위문 방송을 하였고,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려가 있다가, 겨우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과 뒤이은 서울 탈환으로 겨우 고개를 펼치고서는 그의 결정적 배후자인 맥아더가 38 선을 넘자 그는 이제는 통일 대통령이 되는구나 하고 철썩같이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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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장군이 그러한 언질을 준 시기는 서울 수복 기념식 참석차 한국에 왔을 때 한것으로 추측하기가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그 이후 맥아더 장군이 보여준 행동이 웅변으로 증명해주고 있으며, 또한 중공군 개입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웨이크 섬으로 오는 트루만 미국 대통령에게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을 낮게 평가하자고 이 박사와 맥아더 장군이 사전 조율(調律)했다는 정일권 장군 (후에 총리 재임)의 회고록을 봐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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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측의 경고 (한국군 이외의 유엔군이 38 선을 월경할 경우에 좌시하지 않겠다)도 무시하고, 빨리 전쟁의 끝장을 내려고 평안 북도 산골로 깊숙히 밀고 올라가다가, 한국군 6사단과 미 제8기갑 연대가 10 19 일 압록강을 넘어 이미 포위망을 구축하고 대기 중이든 중국 인민 지원군에 참패를 당했으나, 서부 전선에서는 청천강 이남으로 재집결하였다. 마침 중공측은 병참 지원이 취약해서 퇴패해서 후퇴하는 유엔군을 맹추격하지 않고 다시 숲속으로 숨어버리자, 맥아더 사령부는 소수의 중공군이 수풍 발전소 방위를 주목적으로 개입한 것으로 과소 평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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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필자는 맥아더 사령부가 각종 정보에 따르면, 30 만 명에 달하는 대군이 이미 한반도에 포진한 것을 모르고 정세 판단을 잘못한 것이 아니라 맥아더와 그의 직속 참모들이 의도적으로 적세를 과소 평가한 것으로 본다. 즉 맥아더는 전쟁을 한 반도에만 국한 하지 않고 중국 본토 수복도 염두에 둔 것을 판단할 수 밖에 없다. 이 것은 통일된 한국을 이 박사에게 약속한 것 처럼, 대만의 장개석에게도 본토 수복을 약속했다고 보는 것이 바른 판단이다. 맥아더 장군은 그의 작전 지역이 아닌 대만에 19507월 말에 장개석 총통을 만나고 왔는데, 이 때 그는 장 총통에게 모종의 약속을 한 것으로 추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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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또 한 가지 우스운 것은 백 장군이 참모 차장으로 영전한 유재흥 2 군단장 후임으로 발령받아 2 군단장에 취임하였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참모 차장으로 갔든 전임자가 다시 2 군단장 자리로 되돌아 와서 사흘만에 백장군은 도로 1 사단장으로 복귀했다고 한다. (백 선엽 장군 증언) 대결전을 앞두고 아주 코믹스런 해프닝이 일어났다. 휴전 직전의 7.13 공세가 시작되기 조금 전의 사단장 보직 이동이 있었는데 중공군의 7월 대 공세가 벌어지자 전임자를 불러와서 한 사단에 사단장 2 명이 있은 것과 같은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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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강 이남에 집결한 유엔군은 새로 보급을 받아, 추수감사절 특식을 즐긴 다음 날 크리스 마스엔 귀향이라는 맥아더 장군의 진군 구호에 발맞춰서 한만 국경으로 끝내기 작전에 들어갔다 (19501124). 첫날은 별탈 없었으나, 그 다음날부터 삐걱대기 시작해서 서부 전선의 맨 우측에서 신나게 달려가던 한국군 제 2 군단 7,8 사단이 중공군의 포위망에 걸려서 묘향산 인근에서 섬멸적 타격을 입었고, 수많은 전사상자와 포로 잡혔는데 (국군의 묘향산 전투 참패라 부르고싶다) 사단장들은 연대장에게 지휘권을 맡기고 후송병들과 먼저 후방(後方)으로 사실상 도주하고, 나중에 서울 지역에서 헌병에 체포되고 군재에 회부되어 중형을 받았으나 나중에 다 풀려나서 현역에 복귀했고 두명의 연대장들이 중공군 포로가 되었으며, 머리도 없는 2 군단은 해체 되었다. 한국군이 밀리자 바로 그 좌측으로 진격하던 미 제2 보병사단도 후퇴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미 후방의 퇴로를 중공군이 차단하여서 군우리에서 순천까지 약 10 Km산 협곡을 빠져나오는데 차량과 중장비가 파괴되어 도보로 도피하는 동안 양편 산기슭에 포진한 중공군의 집중 포화에 참혹한 피해를 입어서 전사 4 천명, 그리고 약 3 천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미 제2 보병사단장 카이저 소장은 지휘 책임을 물어 직위해제당했다. 이것을 중국 인민지원군의 제2차 공세라 부르고, 워커 8군 사령관을 도쿄 지휘부로 불러들인 맥아더는 전선의 상황을 브리핑 받고 11 28일 총퇴각 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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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선에서 엄청난 인명 피해가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트루만 미국 대통령은 뒤숭숭한 민심을 진정시키기위해 1130일 기자 회견을 하는 동안 새로운 적(중공 인민 지원군)을 격퇴하기위해 미국이 가진 모든 전쟁 자원을 동원하겠다고 하여서 사실상 원자탄 사용을 시사하자 한국의 노 대통령 이 박사는 이를 환영하였지만 , 전세계는 감짝 놀랐고, NATO 가맹국들은 이는 핵전쟁으로 나아가 중국과 동맹을 맺은 쏘련이 참전하게 되면, 독일을 무찔러고 동독에 주둔중인 쏘련군이 T-34 전차를 앞세우고 서구로 쳐들어오면 평야 지대인 서구는 2 주안에끝장 나며, 영국도 쏘련의 중폭격기 편대의 공습에 잿더미가 될 판이라고 전전긍긍(戰戰兢兢)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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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영국에서는 여당 의원 100 명이 들고 일어나 핵 전쟁 방지에 영국 수상이 앞장서라고 촉구하자 애틀리 영국 수상이 즉시 도미하여 트루만 대통령과 상의해서 핵 사용 방지 약속을 얻어내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프랑스의 르네 플레빙 수상도 런던으로 날아가 핵 사용 금지에 동참한다는 뜻을 피력하였고 그 밖의 NATO국가들도 반핵 의사를 표시하여 애틀리 수상은 사실상 유럽측 NATO 국가들을 대표하여 워싱턴으로 날아가서 (1950124)당일부터 5 일간 여섯 차례나 회담한 끝에 트루만-애틀리 공동 선언을 발표하여, 핵 전쟁의 위기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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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도 트루먼-애틀리 공동선언을 소개했지만 아직까지 한국에서는 트루만-애틀리 공동 선언이 있었는지 조차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나라와 우리 겨레의 앞날을 결정하고 오늘까지 그 선언의 틀 속에서 살고 있는데, 그 선언에서 명문으로 남겼거나, 선언문 속에 포함되지 않았으나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는 합의 사항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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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전쟁은 국지화하고 중국으로 확대시키지 않는다.

2. 한반도 문제는 무력 사용이 아니라 협상을 통해서 해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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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유럽 우선 주의를 합의하고 NATO 사령관을 조속히 임명하여 NATO 동맹의 실질적 강화를 기한다. (노르만디 상륙 성공으로 유럽의 해방을 이룩한 Eisenhower 원수를 사령관에 임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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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원자탄은 원칙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나, 사용이 필요한 경우에는 영국과 먼저 협의한다. (쏘련에 원폭을 투하할 경우 핵 폭격기가 영국에 있는 미 공군 기지에서 발진하기 때문이다.)

5. 한국 전쟁을 유엔군의 힘의 강세에서 휴전 교섭을 시작한다.

이 양자 회담에서 결정된 우리에게 가장 직접적 영향을 미친 조항으로서, 그 당시 유엔 회원국들 간에 당장 휴전을 추진하자는 움직이 많았으나, 그 때 휴전 논의를 하게되면, 그 당시 유엔군 (미군) 이 군사적으로 퇴패해서 약체이므로 중공 측에 휴전을 요구하면 그 대응으로 중공측에서 믾은 것을 요구하게 되므로 후에 유엔군쪽의 전세가 유리할 때 휴전 교섭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미국 측에서 내다 보았다. 그 당시 주미 대사관에 근무했던 한표욱씨는 그해 1025일 중공군과 첫 전투를 치룬지 채 두 달도 되기 전에 미국 정부는 참전 우방의 압력과 확전 및 장기전에 대한 국내의 우려등으로 휴전을 논의하게 된 것이라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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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유엔군의 파병 목표는 침략자의 격퇴이지 한국의 통일이 아님을 확인함.

이점은 당시 회담에 참석한 맥그래스(McGrath) 미국 법무 장관이 성명 초안을 다루면서 제기한 것을 트루만 대통령과 애틀리 수상이 이에 동의하고, 또한 다른 문건에서 미국의 유엔 대사인 오스틴(Austin 도 이와 똑같은 문안을 사용하여 앞서 잠간 언급한 것처럼 무력 통일 소리가 그 때부터 싹 들어 갔다. 이렇게 선언함으로써 그들의 무력 통일이라는 부담으로부터 무거운 짐을 놓게되어 그 부분에 대한 의무감에서 해방되고 싶은 감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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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승만 대통령은 미영 정상 회담에 촉각을 곤두세워서 진전 사황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당시 주미 대사 장면 박사가 국무부로 찾아가서 38 선으로 휴전을 할까봐 염려하는 이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38 선을 휴전 경계선으로 하는데 반대 입장을 표했는데 그를 맞은 극동 담당 차관보 딘 러스크씨는 38선으로 휴전하는 것이 싫다면 UN군이 한반도에서 전원 철수 하는 것이 좋겠느냐고 묻자 그 점에 대해서는 훈령이 없어서 대답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만 보아도 약소국의 입장은 비참하다는 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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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을 국지전화하기로 애틀리 영국 수상과 (따라서 유럽의 NATO 동맹국들과) 약속한이상 핵공갈로 세계를 놀라게했던 트루만 미국 대통령은 미국 의회의 동의 없이 국제 경찰 행동으로 포장해서 한국전에 개입했다가, 맥아더의 기만 정책에 홀려서 북진을 허용했으나, 미군이 북진을 시작한지 약 2주 후에 드디어 긴가민가 우려했든 중공군이 지원군명목으로 참전해서 두차례에 걸친 공세에 경무장 밖에 없는 중공군에 미군등 유엔군이 혹독한 참패를 당해 미국의 자제들이 죽어가는 사태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휴전 (Cease-Fire)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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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은 NSC 회의에서 그는 휴전 방안을 논의하게 하였다. 애초부터 중국으로의 확전을 획책한 맥아더 장군은 자신의 졸책으로 무수한 미군 장병들이 죽어나가고 포로로 붙잡혔지만 자신의 무능과 연이은 실책에 대해서 조금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원자탄 사용과 중국 본토로의 확전(擴戰)을 거듭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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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도 놀란다고, 중공군의 피리 불고 꽹과리 두들기는 소리에 놀란 유엔군은 애초에 평양원산 선으로 방어선을 설치하려했으나 후퇴에도 속도가 붙어서 금새 38선까지 내려오고 적과 대치하지도 않고 서울을 내주고 37도 선까지 후퇴하였다. 그런데 소위 불행중 다행인 것은 8 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 교통 사고로 크리스마스 이틀 전에 죽었으나 그의 후임으로 온 리지웨이 장군이 미군 지휘관들의 패배의식을 불식시키고 차근차근 적을 밀어붙여서 거의 38선 경계까지 이르자, 드디어 미국이 힘을 바탕으로 휴전을 제의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얻은 트루만 대통령이 휴전 안을 국무부와 국방부에 협의토록 했는데, 그 안이 맥아더에게까지 알려지자, 그는 자신이 바라던 중국 본토로의 확전이 물건너 갔을뿐더러, 한국 전쟁이 휴전으로 끝나게 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서 자기 나름의 휴전안을 제안하는데 사실상 공산군 사령관들이 무릎 꿇고 항복하지 않으면 중국 본토로 전쟁을 확대하겠다는 사실상의 최후통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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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는 파면 직전에 7 함대의 일부를 대만해협으로 보내 함재기들이 중국 본토에 가까운 상공에서 공중 무력시위를 했을 뿐만아니라, 구축함 보일 호를 중국 본토 3 마일 인접 해역 (광동성 동부 샨토우 항구)에 까지 내보내서 중국측의 도발을 유도하려했으나 무장 대결만하다가 물러가서 위기를 모면했다. 이로써 맥아더는 보일 호와 승무원 250 여명을 죽거나 생포되는 위험 속으로 내몰고 중공의 무력 도발을 유도하려고 시도한 증거를 남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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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장군이 전쟁 수행 방향에 대해 본국과 사전 협의 없이 독자적으로 언론에 발표하는것에 염증이 난 트루만 대통령은 모든 미국 지휘관 (특히 맥아더를 겨냥해서)들이 대외적으로 발표 사항이 있으면 반드시 국무 장관이나 국방 장관의 사전 허가를 받고, 발표 원안의 사본을 백악관에 제출하게 했는데, 맥아더의 최후통첩(最後通牒)이 트루만의 함구령을 어겼기 때문에 그의 모든 직위에서 해제시키는 파면결정을 1951411일 새벽 1시에 기자 회견상에서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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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휴전 협상 논의가 대외적으로 발표되지 않았으므로 공화당의 마틴 하원의원이 맥아더 장군이 보낸 편지를 의회에서 읽은 것이(195145) 문제가 된 것으로 대외적으로 알려 졌다. 파면당해 십 여년만에 처음으로 본국 땅을 밟은 맥아더는 미 의회에서 전쟁에서 승리이외엔 대안이 없다고 외쳤으나, 한국전은 승리이외에도 휴전이라는 대안이라는 있다는 점을 만 천하에 알렸고, 맥아더 장군의 사고 방식이 경직됐다는 점을 잘 보여 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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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만 대통령은 휴전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그대로 추진하여 애치슨 국무 장관을 통해 공산측과의 교섭을 명하는데, 애치슨 장관은 전에 주쏘 대사관에 근무한 경험이 이는 케넌에게 그 임무를 맡겨서 당시 UN 주재 쏘련 대사 말리크와 그의 롱 아일랜드 별장에서 두번 비밀리에 접촉하여 중국과 관계되는 정치 문제 (UN 대표권 문제와 대만 문제등) 은 제외하고, 현 전선에서 전투 행위 중단 즉 문자 그대로 휴전 (Cease-Fire) 협상을 개시하자는 미국 정부측 입장을 전했고 625일 마리크 대표가 유엔 방송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연설하는 도중에 교전 당사자간에 휴전 교섭을 시작하는것이 좋겠다고 제의하였다. 이에 양측이 응하여 개성에서 휴전 회담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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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역시 당시에 비밀 교섭이 발표되지 않았으므로 쏘련에서 먼저 휴전 회담을 제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휴전 교섭을 하면서도 전투는 그대로 계속되어서 사상자가 계속 발생하여, “무승부를 위해서 사람들이 죽어 간다/ Die for Tie)” 라는 빈정대는 말이 생겨났다. 195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아이젠하워 장군은 디트로이트 시에서 행한 연설에서 자신이 대통령에 선출되면 조속한 휴전을 달성하기위해서 한국에 가겠다고 공언하여 아들과 남편을 한국전에 보낸 부모와 가족들의 절대적 지원에 힘입어 대통령에 당선된다음 그해 12 월초에 한국 전선을 방문하고 한국 전선이 산과 고지에 형성된 것을 파악하고, 아무 쓸모 없어 보이는 고지를 뺏기 위해 우리 (미국) 자제들이 피를 흘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휴전에 올인하기로 작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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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쏘련의 독재자 스탈린이 3월에 사망하여 쏘련의 신 지도부가 유연한 대외 정책을 펼쳐서 휴전에 대한 전망이 좋아졌으며, 드디어 68일 휴전 회담의 최대 쟁점이었던 포로 송환 문제가 타결을 보아서 휴전 조인이 오늘 내일로 손꼽는 시점에 느닷없이 이 박사가 약 27,000 명의 반공 포로를 석방해 버렸다. 이는 이박사의 최대 실책으로 꼽히지만, 이박사를 옹호하는 세력들은 영웅적 쾌거라 일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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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반공 포로 석방을 단행 한 것은 다 된 휴전 회담을 뒤엎어 버리려고 한 것이다. 대노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당장 그를 제거 시키려하였으나 주위의 만류로 그냥 넘어 갔지만, 훗날 이 박사는 아이크에 의해 권좌에서 밀려나고 하와이로 귀양살이를 가게 된다. 휴전회담 무산 가능성에 분개한 중공군은 중부 전선 금성천 돌출부에 한국전 참전이래 최대의 공격을 퍼부어 미 육군 전사에 따르면 국군 전사상자가가 3만 여명에 달하였다 (중공측 주장: 6 만여명) 이는 한국전 개시이래 한국군이 단일 전투에서 입은 가장 큰 손실이지만 이 박사가 직접 명령을 내린 반공 포로 석방의 결과로 생긴 일이기 때문에 아무도 입도 벙긋 못하고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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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이 공격만하면 도망가기 바쁜 국군을 데리고 단독 북진을 되뇌이던 이 박사는 엄청난 국군 피해를 보고서야 휴전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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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의견만이 아니라 객관성이있는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 일부를 그대로 전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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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은 못내 불만이었다. 휴전협정에 한국의 대표를 보내지도 않았다. 대통령은 휴전 직전에 반공포로를 대거 풀어버려 미국과 서방 진영으로부터 심한 공격도 받은 처지였다. 연로했지만 결코 기를 꺾지 않던 이승만 대통령은 그래도 늘 북진통일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사적인 견지에서 볼 때 대통령이 주장하는 북진은 어려웠다. 단독으로 휴전선을 넘어 전쟁에 다시 불을 붙인다는 일은 정치적 수사로 가능했지, 군사적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런 분위기였지만 휴전은 눈앞의 현실로 닥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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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이 박사에게 특히 달갑게 여기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반공 포로 석방으로 휴전이 5 주 정도 늦어지면서, 미군 피해 (Casualties) 가 주당 약 1,000 명에 달했다는 점이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휴전을 조속히 달성하는 것이 그의 급선무였는데, 노인장의 광기로 안죽고 안다쳐도 될 5 천명이 넘는 미군이 죽거나 다쳐서 아주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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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조약은 군사적 적대행위 중단에만 국한하고 기타문제는 정치 회담에서 다루기로하여서 이듬해 제네바에서 개최되었는데 미국은 휴전 달성으로 미군이 더 죽을 염려가 없는 상황에서 공산측과 한없는 입씨름에 진절머리가 나서 더이상의 진전은 없었지만 인도 차이나 문제는 종전 프랑스 식민지였든 월남이 독립은 하되 17도 선으로 남북 분단에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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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한미 정상회담이 있기전 까지의 배경 설명이었다. 그런데 이 대통령은 휴전후 미국에까지 와서 한반도 통일을 위한 조그만 전쟁을 새로 시작하자고 보채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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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정상 회담이 시작하는 1954 727일 새벽 715분에 아이크는 자신의 대변인인 헤거티를 자신의 침실로 불러서 730분에 당도하자 노인장 (이 박사) 을 다루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 분은 조국 통일을 열망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전쟁을 새로 시작하도록 허용할 수는 없어. 그 결과는 너무 끔찍할터이니까 말이지. 그러나 그는 아주 고집스런 영감일세. 우리가 그를 무한정 억제해 갈 수 있을지 잘 모르겠네라고 설명하면서 오늘 회의록을 작성해주도록 당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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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한미 정상회담은 백악관 국무회의실에서 1954727일 상오 10시에 시작했는데,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덜레스 국무 장관에게 양국 관계 현안을 설명하게 한다음 이 박사가 이어서 자신의 입장을 천명하면서 낮은 목소리로 발언을 하여서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였고, 좋은 영어를 구사했으나 액센트가 강했다고 기록자(헤거티 대변인)가 토를 달았다. 이 박사는 외교에는 자신만만한 듯 외무 장관도 대동하지 않고 정상회담에 임했는데 그의 발언 요지는 공산권의 종주국인 쏘련이 세계를 장악하려는데 그대로 두면 미국까지 포위하려드는데 도 그만 둘 수 있느냐고 따졌는데,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철의 장막 건너 편 (공산권) 국가와 의도적으로 싸우려는 어떠한 행위에도 미국이 가담할 수없다는 점을 명백히 하고, 또한 만일 전쟁이 일어난다면 끔직한 결과가 초래되며, 미쏘 대결의 핵전쟁은 문명을 파괴하고, 우리 (미국) 도시가 파괴되어서 수백만명의 인명이 살상하게된다고 핵전쟁의 가공함을 인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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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크는 현재 우리가 가진 무기 (핵무기)로 전쟁을 치룬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태이며, 만일 크레믈린과 워싱턴이 전쟁을 치룬다면 그 결과는 너무 끔직스러워 상상 조차하기 싫으며, 내가 지금 얘기하는 전쟁이 수행된다면 민주국가라도 살아남지 못한다고 경고하면서, 문명도 완전히 파멸되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에 반대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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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크는 이 박사의 통일 염원에는 이해하지만 분단국가가 어디 한국뿐인가 라고 되물어면서 독일 오스트리아 등도 분단국가라는 점을 지적하고 그들의 통일을 위해 전쟁을 할 수는 없고 오직 대화와 협상을 계속할 수 밖에 없다고 무력 통일 요구를 일축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 설립 초기에 휴전을 반대했든 반공주의자 덜레스 국무 장관이 자신의 견해에 동정표라도 던질까 기대했을지 모르지만 그 역시 반공은 좋으나 새로운 전쟁은 찬성할 수 없다는 점을 기조 연설에서 확실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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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서, 경제 문제와 방위 문제는 양국의 전문가 사이에 논의하도록하고 일차회담을 마쳤다. 이 박사는 혹을 때려 갔다가 혹을 하나 더 덧븥인 꼴이 되었다. 어렵사리 휴전을 얻어내서 미국의 자제들이 더 이상 죽지 않게 했는데 또 새로 전쟁을 시작을 하자니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맥아더 장군이 휴전을 반대하고 확전을 획책하다가 파면당한 이후 아이젠하워 행정부내에 이박사에게 후원 또는 동조하는 인사가 한명도 없다는 것이 확연히 들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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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의 천재라는 분이 왜 이렇게 상대국의 입장도 못알아 차리지 못하고 억지를 부리는지 이해하기 곤란한데 문득 노태우 전 대통령의 회고록에 나오는 이 박사에 대한 몇 마디가 이를 잘 설명해주는 듯하다. 회고록에 따르면 이 박사가 정상 회담을 한지 채 두달도 안되는 그해 9 월달에 육사를 방문하고 사열을 하는데 자신이 어디에 온지도 몰라서 주위에 묻자 당시 배석한 국방 장관이 여기가 육사입니다라고 답하니까 그럼 육사가 뭐하는 곳이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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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분명히 국방 장관이 이 박사에게 육군 사관학교에 사열(査閱)하러 간다고 먼저 설명을 드리고 그곳까지 대동하고 갔으나, 자신이 어디에 와 있고 육사가 어떤 곳인지도 생각나지 안았다면 이는 분명 노망이든 것이 틀림 없다. 그당시 육사 생도 노태우한테 들킨 것은 천만 다행이라 하겠다. 그후 1959 년 이 박사의 건강상태를 CIA 가 보고하면서 그 해 5월 하순부터 이박사가 정무를 파악하는 능력이 현저히 저하됐다으며 7 13 일 이박사를 면담한 다우링 대사도 이 박사가 대화중인 문제점에 초점을 맞추는데 어려움을 내비쳤다고 말했다. 또한 다울링 대사는 본국 훈령에 답변하는 다른 별도 보고서에서 이 박사가 한 번 설명으로 바로 알아차리지 못해 서 여러번 거듭 설명해야 겨우 알아듣는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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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튿날 이 박사는 의회 연설에서 많은 박수를 받았으나 그는 제네바 회의가 실패했으므로 휴전을 종결하고, 한국군 대만의 국부군, 그리고 미해공군이 중공을 패배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고 이에따라 한국 통일도 가능하다는 충격적 연설은 오히려 미국의 여론을 악화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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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다음날 제 2차 정상회담은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다. 문제는 공동 성명 초안에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호적이고---“ 라는 표현이 있는 것을 발견한 이 박사가 양유찬 한표욱 등을 따로 부러 이 친구들 (미국측)이 나를 불러 놓고 올가미를 씌우려는 작전을 쓰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다시 아이크를 만날 필요조차 없다며 몹시 불쾌히 생각하고 회담을 보이콧하려 해서 회담 시작 시간인 10 시가 넘도록 미동도 하지 않았으며 주빈이 시간이 지나도록 참석하지 않자 백악관에서 무슨 사고라도 난 줄 알고 전화 문의까지 여러번 있었다. 그래서 손원일 백두진 두 수행원이 참석하셔야 된다고 강권하여 백악관 회의장에 갔으나 사과의 말도 없자 아이크는 그 나름으로 화가나 있었고 한일 국교 재개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다 이 박사가 자신이 권좌에 있는 동안 일본과 상종도 하지 않겠다고 단호한 입장을 표하자 아이크가 화가나 일어나서 옆방으로 갈 정도로 살벌한 회담장 분위기였고, 이박사는 방을 나서는 아이크 등뒤로 저런 고얀놈 있나, 저런하면서 분노를 노출했다. 아이크가 잠시후 분을 삭이고 돌아와서 의견 차이가 멀리 벌어진 한일 국교 정상화 문제는 토의를 알단 뒤로 미루고 다른 문제를 다루려 하자 이번엔 이 박사가 일어나 버렸다 한다.다시 말해서 정상회담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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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원인을 살펴보면, 이 박사는 외교 관행과 의전 규범을 전혀 모르는 것 같다. 우선 회담의 과제별로 양국간에 사전 조율을 하여 공공 성명도 거의 양국이 이미 합의해둔 사항을 열거해서 회담이 끝날 때 양측이 합의 사항을 확인하고 서명하여 발표할 수준에 이르러야 하는데, 전쟁중에 억지를 부려서 하는 식을 미국에 와서 되풀이 하려는 듯 했다. 아무튼 나라가 세워진지 일천하여 전문가가 전무하고 이 박사 앞에서는 모두 “Yes” 로만 일관한 머슴형 참모들이라 아무도 감히 이 박사의 어긋난 행동이나 언행에 제동을 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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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 포로 석방에 이은 정상 회담에서 보인 이 박사의 무례한 언행은 그의 귀향기로 가는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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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박사는 몇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고, 뉴욕에서 티커 퍼레이드 환대를 받았고, 월도프 아스토리아에 칩거중인 그의 최대의 후견인이었던 이빨 빠진 호랑이 맥아더 장군과 해후 (邂逅)하고 한 시간 가량 얘기를 나눴다는데 아마 맥아더의 전성시대를 화제로 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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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문제 (휴전을 종료하고 새로 전쟁을 시작하자는 문제) 토의에서는 그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으나 군사 원조등 국방 문제에는 큰 도움을 받았다 한다. 후대에 노무현 대통령에게 부시 대통령이 면전에서 이 사람 (This man)” 이라는 하대를 받은데 비하면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뒤에서는 옹고집 노인장 (Stubborn old fellow)” 이라고 불렀으나 면전에서 하대하는 법은 없어서 다행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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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 727일에 일어난 우리 민족의 중대한 두가지 사건이었다면 인접한 날짜인 729일은 100년 이상 계속되는 우리 민족의 시련을 가져온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1905 729일 소위 태프트 카츠라 밀약 (Taft-Katsura Agreement)”이다. 동경에서 미국 전쟁 장관 윌리암 태프트와 일본 총리 카츠라 타로 사이에 체결된 문서로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고, 또한 미국은 일본이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것이 동아시아의 안정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는 점을 동의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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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이것이 조약이 아니고 메모에 불과하다고 격하하지만, 1924년 역사학자 타일러 데넛이 발굴 공개하기까지 극비리에 감춰졌다. 문서에 따르면 태-카 밀약이 성사되고 바로 당시 대통령 테드 로즈벨트가 카츠라 총리에게 전보를 보내면서(1905731) 그 서명 내용을 대통령인 자신이 동의하다고 해서 법적 효과를 가지는 문서임이 판명 되었으며, 발굴될 때까지 비밀로 붙였다는 것 자체가 그 문서의 중요성을 입증한다고 보겠다. 또한 뒤이어 일어난 일들을 보면 미일 간의 흥정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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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일본이 조인 후에 그해 (1905) 1127일 을사 보호 조약을 체결하자 보란듯이 미국은 제일착으로 조선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주재하던 외교관을 철수시켰다. 일본은 우선 외교권을 탈취하여 조선이 다른 나라와 협약을 맺지 못하게한 다음에 1910년 조선을 완전히 병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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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가에서 통용되는 국제 관계에서 영원한 우방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으며 오직 국가 이익에 따라 움직인다는 말을 실감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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