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앞에 나서 하나님의 징표(徵標)를 보이라며 핏대 올리는 바리새파 율법주의자들과 사두개파 제사장들에게 예수가 말합니다.
"너희는 저녁때에는 '하늘이 붉은 것을 보니 날씨가 맑겠구나.' 하고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 한다. 이렇게 하늘을 보고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왜 시대의 징조(徵兆)는 분별하지 못하느냐?“
이 자들은 징조를 보았습니다. 예수의 삶이 하나님 나라를 만든다는 징조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무시 했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을 빼앗기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난 4월 27일 통일의 징조를 보여주셨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이미 <6.15>와 <10.4>를 통해 통일의 징조를 보여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시 했습니다. 돈, 권력, 아파트 값, 쥐꼬리 만도 못한 기득권 때문에 통일의 징조를 못 본 척 했습니다.
하나님은 <판문점 선언>을 통해 통일의 징조를 ‘다시’ 보여주십니다. 이번에도 무시한다면, 못 본 척 해 버린다면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뒤에 두고 떠나가셨다.-마태 16:4b>라는 성서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통일의 징조를 보았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는 여러분들이 삶으로 응답 할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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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통일의 띠로 함께 묶인 우리들
요한 복음은 문맥상으로 20장에서 끝이 납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요한복음은 21장까지 있습니다. 이 21장은 언제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후대에 첨가된 부분입니다.
요한복음의 편집자들이 문맥도 통하지 않는 예수와 베드로의 대화를 굳이 첨가 한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그 대화가 왜 그리도 중요하다고 생각 했었는지 짚어 봅니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네가 젊었을 때에는 네 손으로 띠를 띠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이를 먹으면 그 때는 팔을 벌리고 남이 와서 허리를 묶어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
지금까지는 너 잘났다고 가고 싶은 곳으로 가고, 하고 싶은 대로 했었지 하지만 이제는 끝이다. 이제부터는 넌 내가 시키는 대로 네가 가고 싶든 가고 싶지 않든,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네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가 끌면 따라와야 하고 밀면 밀려 가야하는 거다.
“베드로, 이제 네 봄날은 갔다”
하지만 ‘이제 넌 끝났다’ ‘봄날은 갔다’처럼 들릴 수 있는 이 말의 행간을 찬찬히 들여다 보면 예수의 이 말은 “넌 지금까지 자유롭게 네가 하고 싶은 것 하며 살았지 하지만 이젠 끝났다. 이젠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제한 되고 통제 될 것이다”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제부터 넌 시작이다. 이제 본 게임 들어간다. 이제 네가 해야 하는 일의 한계는 무한히 넓어진다.”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지금까지는 네가 스스로 물고기를 잡는 어부로 띠를 띠고 그 한계 안에서 살았지만 이제는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의 띠를 묶어 너라는 그 한계를 뛰어 넘어 살게 할 것이다.”라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띠에 묶여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한계가 변화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내 입에만, 내 눈에만, 내 이익에만, 내 소유에만 묶여 있다면 결국 ‘나’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정, 직장, 학교, 살아온 연륜, 사회, 세상 그리고 역사에 묶이게 될 때 우리는 ‘나’라는 한계를 뛰어 넘어 역사의 한계까지 지경을 넓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하여 한민족이라면, 2018년 오늘 우리는 이 민족의 평화와 통일이라는 띠로 함께 묶여 있어야 합니다. 그리 할 때 우리의 한계가 남과 북을 넘어 한반도 한민족으로 지경을 넓혀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장호준의 Awesome Cl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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