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NT 이틀 째. 날이 밝아 일어나니 서쪽으로 눈덮힌 록키 산맥이 보였다. 밤에 도착해 어제는 못 봤던 것이다. 덴버에는 11년 만이다. 2007년 여름 일선님 다큐 촬영 차 콜로라도 주 러브랜드에 위치한 영성공동체 Sunrise Ranch를 방문하기 위해 덴버 공항에 내렸다. 당시 나를 안내해줬던 현지인이 록키마운틴 국립공원에 나를 데려가줬다. 해발 4천미터가 넘는 정상에는 만년설(萬年雪)이 쌓여 있었고, 별다른 준비 없이 여름 복장이었던 나는 추위에 떨었던 기억이 있다.
화물을 배달한 곳은 제약회사였다. 화물이 무척 가벼웠는데 약품 원료였던 모양이다. Dock은 좁은 마당에 있었다. 네이슨(Nathan, 정확한 발음 표기는 아니지만 매번 한영 변환이 번거로워 앞으로 이렇게 표기한다. 원 발음과 유사하면서도 한글로 표기했을 때의 모양세도 괜찮다.)이 차를 세팅해주고 내게 후진을 시켰다. 마침 우리 말고는 다른 차량이 없어 시간을 들여가며 방향을 맞춰 닥에 트레일러 후문을 댔다.
배달 후 트레일러 세척을 위해 가다가 갑자기 졸음이 몰려와 침대칸에서 잠을 잤다. 자다깨다 했는데 네이슨은 때로는 멈추고, 때로는 문 열고 내리고, 때로는 시동을 껐다가 다시 걸었다. 이곳저곳 다닌 것 같았다. 편히 자라고 침실칸에 커텐을 쳐줬다. 커텐을 치면 한밤중이다. 11시 반쯤 일어나니 주유소였다. 내일 인디애나폴리스로 가는 화물이 예약돼 있었다. 나를 뉴욕에 데려다주기 위해 디스패처가 일정을 그렇게 잡은 모양이었다. 페덱스 화물이었다. 페덱스는 미국에서 가장 큰 운송회사면서도 화물을 감당하지 못해 일종의 아웃소싱을 하는 것이다. 출발지에 가장 가까운 트럭스탑에 차를 세우고 밤을 새기로 했다.
샤워 후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예고한대로 내가 샀다. 그동안 돌봐준 네이슨의 수고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 보답도 아니다. 사실 네이슨은 북동부 지역 트립을 좋아하지 않는다. 여러 통행 제한이 많고 교통은 복잡하기 때문이다. 나는 홈타임을 연기할 수도 있다고 했더니 이미 셋업이 그렇게 됐다고 한다. 펜실베이니아 주 핏스톤(pittson)에 프라임 터미널이 있어 거기서 내리면 무난하지만 뉴욕까지 3시간 거리를 버스를 타고 가야한다. 버스 시간만 맞으면 나쁠 것도 없다. 뉴욕시에서 가장 가까운 트럭스탑은 뉴왁에 있는데 교통편이 문제다. 누가 라이드를 해준다면 가장 편리한 위치다. 뉴저지 쪽으로 운전 경험이 적은 아내가 여기까지 오기는 힘들 것이다. 버스를 타거나 택시로 가까운 기차역으로 가는 것도 고려해볼만 하다. 네이슨이 뉴왁 트럭스탑은 간격이 좁기로 유명하단다. 구글맵으로 위성 사진을 확인해보니 정말 그렇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트럭스탑도 많은 트럭 기사들이 주차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몇 번을 시도하다가 포기하고 가는 트럭도 많다. 뉴왁은 더 하다니 걱정스럽다. 트레일러 길이는 53피트, 트럭 길이와 합치면 70피트가 넘는다. 20미터가 넘는 차량을 좁은 공간에서 후진으로 넣으려면 상당한 공력(功力)이 있어야 한다.
내일도 긴 하루가 될 것이다. 페덱스 측에서는 출발 후 23시간 내 도착을 요구하고 있다. 천 마일이 넘으니 20시간 이상은 달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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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철야 운행
덴버 공항 카고 구역에 위치한 페덱스 화물고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오래 기다려야 했다. 8시 30분 경에 출입이 허가됐다. 달고 있던 트레일러는 떼어놓고 닥에서 짐을 싣고 있는 트레일러를 연결했다. 트레일러 가득 물건이 실렸지만 일반 소비자용 택배화물이어서 그런지 총 중량은 가벼웠다. 출입문 앞 풀밭에는 토끼가 두 마리 있었다. 그 중 한 마리는 별로 사람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철조망 밑 틈으로 돌아다녔다.
낮 시간은 네이슨이 운전한다. 날씨는 흐린데다 기온은 영도에 가까웠고 바람이 세다. 흩어져 풀을 뜯던 검은 소들은 둥글게 한데 뭉쳐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나는 졸리지 않았지만 밤 운전을 위해 쉬라는 네이슨의 권유에 침대칸으로 들어가 누웠다. 콜로라도 어디 쯤 고속도로 쉼터에서 네이슨이 트럭을 멈췄다. 바람이 너무 강해 트레일러 타이어를 뒤로 물리기 위해서다. 풍속 25마일이었다. 트레일러 바퀴가 뒤로 갈수록 회전은 어렵지만 주행 시 차체 안정성은 높아진다.
오후 6시 경 캔자스 어느 트럭스탑에서 운전을 교대했다. 네이슨은 피곤하면 언제든 자기를 깨우라고 했다. 또 도착지점이 가까워져도 깨우라고 했다. 70번 도로를 따라 동쪽을 향해 달렸다. 얼마 후 날이 저물었다. 밤 운전이 어제에 비해 한결 편해졌다. 중간에 두 번 쉬고 인디애나폴리스에 약 50마일 남은 지점까지 밤새 운전했다. 교대할 무렵에는 이미 날이 밝았다. 내 운전 가능 시간은 거의 끝나 있었다.
나는 옛날 락음악을 들으며 달렸다. 트럭에는 SiriusXM이라고 위성 라디오가 달려있다. 수백 개의 채널이 장르별로 있는데 그 중 7080 클래식 락을 방송하는 채널을 찾은 후로는 고정이다. 고등학생 때 공부하며 라디오에서 듣던 음악들이다. 네이슨은 나보다 열 살 가까이 어린데도 이 채널을 좋아했다. 당시는 요즘과 달리 미국 대중문화가 한국에 들어오기 까지 몇 년이 걸렸기 때문인 것 같다.
밤새 운전하는 내 모습에 네이슨은 마음이 놓인 눈치였다. 장시간 운전은 수년 간의 택시 운전으로 단련됐다지만 익숙치 않은 대형 트럭의 장거리 운전은 역시 힘들었다.
쓰러지다시피 침대칸으로 가 잠을 청했다. 깨어보니 월마트였다. 네이슨은 이미 배달을 마치고 밥테일 상태로 월마트에서 필요한 부식(副食)을 샀다. 아직 다음 화물이 없다고 했다. 나는 월마트로 들어가 화장실을 이용한 후 스티로폼컵과 작은 공책을 샀다. 컵은 시리얼 먹을 때 쓸 것이고 공책은 나만의 트럭킹 핸드북을 만들기 위해서다. 네이슨에게서 화물에 대해 기록하는 법을 배웠다.
그 사이 일감이 들어왔다. 인디애나폴리스 공항 페덱스 화물 주차장에서 빈 트레일러를 연결해 나왔다. 내일 새벽 인디애나 주 그린필드에서 출발해 모레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에 도착하는 일정이다. 뉴욕에 한결 가까워졌다. 이동 거리는 383마일이니까 그리 많지는 않다.
트레일러 상태를 확인하니 바퀴에 문제가 있었다. 트럭스탑에 딸린 정비공장에서 타이어를 교체했다.
낮시간 동안 나는 계속 잤다. 깨어보니 출발지에서 가까운 트럭스탑이었다. 나를 위해 저녁 무렵까지 네이슨은 운전석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황길재의 길에서 본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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