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릿지 마운틴 아래 아늑한 계곡 로아노크로 가는 길에 크리스찬버그라는 도시를 지날 때 앞에 갑자기 차가 한 대 서더니 한 학생이 물을 두 병 들고 내게로 다가온다. 버지니아 텍에 다니는 학생인데 피자헛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태극기를 단 손수레를 밀며 지나가는 나를 보고 허겁지겁 차를 몰고 달려온 것이다. 반환점을 돌을 때 뉴스에서 보았다는데 내 이름을 정확히 기억한다. 벌써 한 달 반이나 지난 일인데.
현대 서구문명은 속도와 효율성을 제일의 가치로 하여 발전하여왔다. 미대륙횡단 마라톤을 하는 동안 나는 일주일에도 두 번씩 대륙횡단을 한다는 트레일러 운전수도 만나보았고, 온 가족이 함께 대륙횡단 여행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전거로 대륙횡단을 하는 사람을 만나보았다. 말을 타고 대륙횡단을 했다는 사람도 나를 멈춰 세우고 명함을 건네주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현대식 교육을 받은 그들이 나를 만나서는 찬사의 언어를 꽃종이처럼 내게 날려주며 자리를 떴다는 것이다. 아무런 기계적인 장치도 이용하지 않고 짐수레를 밀며 거북이처럼 매일 조금씩 미련한 모습으로 달리는 나에게 말이다.
어쩌면 현대문명이 간과(看過)한 귀한 가치는 다른 데 있는 지도 모르겠다. 단순한 속도와 눈에 보이는 속도와 많은 생산품보다도 더 귀한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만나보고 생각하고 깨달았다면 그것보다도 더 효율적인 것이 없을 것이다. 아마도 불과 몇십 년 후에 지금의 시대는 몰상식한 암흑기(暗黑期)라고 치부될 지도 모르겠다.
길을 달리며 하루에도 수십 마리 이상의 야생동물들의 주검을 지나친다. 거북이처럼 느린 동물도 있지만 코요테나 토끼, 다람쥐처럼 빠르고 날쌘 동물들이 무수히 많다. 그 동물들의 야생의 속도로는 자동차의 엄청난 속도에 적응을 못하고 당하는 것이다.
나는 성격은 급한데 머리의 회전 속도가 느리고 동작이 꿈뜨다. 그래서 외부에서 서둘러대면 마음은 급한데 동작은 굼뜨고 머리는 느리게 움직이니 모든 게 꼬여버리고 만다. 군대생활을 하면서 선착순(先着順) 때문에 나는 문제사병이 되었다. 군대생활이 꼬여버리고 말았다. 내가 그래도 마라톤을 하면서는 평균 이상의 성적을 얻은 것은 천천히 뛰다보니까 점점 좋아지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것을 즐기면서 천천히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발전하게 되어있다.
천천히 달리니 10 년을 같은 집에 살아도 못 보던 이웃을 알게 되었고, 늘 지나다니던 그 이웃의 정원에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있는 것이 보였다. 공원에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세상은 변한 것이 없는데 천천히 달리기 시작하니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고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느리게 달리니 순간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느림은 구석구석 아련하게 느끼기 위해 속도를 늦추는 적극적인 선택이다. 이 느림의 시간을 갖기 위해 단호한 결심이 필요했다.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나 달리는 것은 단호한 결단이 필요하다. 그 작은 단호함이 큰 변화를 이끈다.
숲은 그 안에 있는 모든 생명들에게 생활의 터전을 제공해주고 안식처(安息處)가 되며 위로를 준다. 오 월의 숲을 달리며 아주 작은 미물의 소리와 움직임에 촉수(觸手)를 맞추니 마음은 더욱 풍요로워진다.

하루의 일과를 마칠 즈음에 로아노크에서 40 년을 사셨다는 오신무씨가 찾아오셔서 차로 나를 집에 데려가서 하룻밤 편안한 잠자리를 마련하여 주시고 다음 날 새벽에 다시 그 자리에 데려다 주는 수고를 해주셨다.
내가 달리는 이 숲도 나의 발걸음으로 더 활기차진 것 같다. 굽이굽이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