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푸른 가을하늘 아래 오전 내내 부산으로 달려가는 발걸음은 활기차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기도 하지만 사색(思索)의 계절이요 마라톤의 계절이다. 아직도 한낮의 햇볕은 따갑지만 달리기에 좋은 계절이다. 광화문에서 출발하여 3 주째, 온전한 나만의 시간을 가지며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사색의 시간을 충분히 가졌다. 어제 울산에서 길을 잘 못 들어 바닷가를 통해서 기장으로 부산에 들어가려했지만 이제는 7 번 국도를 타고 부산으로 들어갔다.
부산은 항구다. 항구에 정박해 있는 거대한 상선과 상자처럼 차곡차곡 쌓여있는 컨테이너와 해운대, 광안리, 송도해수욕장으로 피서철이면 몰려드는 피서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우리나라 제 2의 도시이다. 부산하면 영도다리가 떠오르고 자갈치시장과 국제시장이 떠오른다. 왜관이 떠오르고 경부선이 생각나고 관부연락선이 생각난다. 경부선은 문산에서 막혔지만 신의주를 통과해 대륙으로 연결되던 길이었다. 그 길은 중국으로 나아가던지 러시아로 가든지 유럽으로 뻗어나가야 할 미래의 길이다.
항구에 깃들어 있는 정신은 진취적이고 개방적이고 거칠다. 그래서 말이 거칠고 억양(抑揚)이 세서 타지의 사람이 부산사람들 대화하는 걸 들으면 싸우는지 안다. 부산항을 통해 사람과 물자만 오고가는 것이 아니라 문화도 유입되었다. 비행기 여행이 많지 않던 시절에 항구는 바다와 육지를 연결해주면서 순환과 소통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그래서 부산 사람들은 외래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익숙하고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재탄생시키는 능력도 탁월하다.
부산을 읽을 때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대중가요를 통해서이다. 그래서 부산에 들어가기 전 부산에 관련된 노래 몇 곡 흥얼거리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부산을 주제로 한 대중가요는 많다. 내가 아는 노래만도 꽤 여러 곡이 있다. 우선 롯데 야구팀의 응원가로 널리 불리는 ‘부산갈매기’가 있다. 조영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최고의 히트곡이었다. 그밖에도 ‘이별의 부산정거장’ ‘경상도 아가씨’ 등 수도 없이 많은 노래들이 있다. 부산은 사랑과 이별의 항구였다.
백반집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있는데 부산 런너스클럽 회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노포역에서 약속을 하고 기다렸는데 생각보다 빨리 왔다. 부산 갈매기들이 날아와 내 양손을 잡고 비상(飛上)하니 날 듯이 마음이 가볍고, 날 듯이 몸이 가벼웠다. 우리들은 함께 거리의 인파를 헤치며 달렸고 온천천의 자전거 길로 들어서서는 더 가볍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달렸다. 그들은 나의 미대륙횡단 이야기가 궁금했고 어떤 동기에서 그런 특별한 여행을 시작했는지 물었다. 무엇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긴 여행에 가족들의 반응이 어땠는지 제일 궁금해 한다. 특히 아내와의 관계를 제일 궁금해 한다. 그리고 그 부분을 제일 부러워하기도 한다.
하은숙씨는 부산영화제 참관차 서울에서 내려와서 나와 같이 달려주면서 해박한 영화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사실 할리우드 영화의 알맹이 없이 폭력적이고 선정성에 식상(食傷)해서 영화를 잘 보지 않는다. 흔하지 않은 좋은 영화를 찾아다니며 볼만큼 여유도 없었다. 부산이 영화의 도시인 이유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부산은 거대한 세트장이라고 한다. 부산에는 근대와 현대, 일본식 식민시대의 건축과 농어촌의 풍경, 그리고 신도시의 마천루와 산 위의 달동네가 함께 공존을 한다.
장호동씨는 서브 쓰리 주자인데 아직 결혼을 못했다고 해서 내 늦은 결혼이야기를 해주면서 끝까지 포기하지 말 것을 권했다. 김진웅 회장과 김명곤씨는 중간에 식사를 하고 다시 함께 뛰기 시작했고 우리나라 울트라 마라톤 최고 기록 보유자 박승렬씨는 나중에 만나서 함께 뛰었다. 주낙순씨는 차를 운전하며 사진을 찍기도 하며 도와주었다.
수영천으로 들어서면서 이제 해운대의 신시가지의 뉴욕의 맨하탄을 방불케 하는 마천루의 위용(威容)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부산은 나그네의 동공을 최대한 크게 열어젖히게 하는 마력을 충분히 갖춘 최고의 도시 중에 하나다. 지금은 달려서 획 지나고 말지만 훗날에 다시 와 부산이 제공하는 천혜의 절경과 부산국제영화제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 활동을 즐기고 명승사찰(名勝寺刹)과 역사적 유적과 삶의 생명력으로 꿈틀거리는 자갈치 시장의 분주함을 꼼꼼히 마음으로 담아오는 시간을 갖고 싶다.
회원들이 내 숙소를 알아보았지만 영화제 기간이라 방을 구할 수가 없다고 한다. 큰 문제는 아니다. 나는 언제라도 야영(野營)을 할 준비가 되어있다. 수영만 요트경기장에 자리를 잡고 하룻밤을 지내는 것이 오히려 좋았다. 광한대교를 바라보며 초고층 아파트에서 쏟아내는 화려한 불빛과 가을 하늘의 맑은 별빛이 엮어내는 빛의 향연을 바라보며 광안리 해변에서 지내는 부산에서의 밤이 멋지지 않은가.
우리들은 달리기를 마친 후 회원 중의 또 다른 서브 쓰리 주자 김정영씨가 운영하는 향천면옥으로 가서 뒤풀이를 하였다. 주인장의 푸짐한 인심으로 배를 채우고도 부산 갈매기들은 집으로 날아가지 않고 다시 요트경기장으로 와서 갯바위에 앉은 갈매기들처럼 돗자리를 펴고 맥주를 마시면서 다시 이야기꽃을 피웠다. 부산 갈매기와 함께하는 아름다운 밤이었다.
화장실에서 노트북 전기를 꽂고 여정을 정리하는데 부산 모기도 아주 정열적으로 내게 대시를 한다. 날씨가 춥지 않았지만 후드까지 덮어쓰고 모기를 잡아가며 화장실에서 글을 정리하는 것도 그리 고생스럽지가 않다. 하루 종일 거친 고갯길도, 바람불고 비가 오는 들판도 달리는 내게 고생이란 말은 없다. 아, 아직도 나는 마음고생을 하는 것은 자신이 없다. 아직도 더 수양을 해야겠지만 일단 육체적인 고생이란 단어는 내게서 사라졌다는 말이다. 웬만한 육체적인 고생은 고생도 아니다.
<下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