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씩 월드컵 결승에 올라갔지만 번번히 준우승(準優勝)을 거둔 네덜란드 대표팀이 고국에 돌아가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네덜란드는 사실 뉴욕과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뉴욕의 첫 지배자가 바로 네덜란드였기 때문이다. 
네덜란드는 영토 크기가 대한민국(大韓民國)과 비슷한 작은 나라이나 인구수는 서울시 인구보다 조금 많은 1천6백만명으로 한국 인구의 3분의1 수준이다. 
화란(和蘭)이라는 이름에서 연상되듯 통상 ‘튤립의 나라’ ‘풍차의 나라’ 등으로 목가적(牧歌的)인 인상이 강하나 실은 이 나라의 강점은 보험 업계를 휘어 잡는 재정 산업의 첨병(尖兵)으로 국민당 소득이 한국의 2배 반이 넘는 연 4만 8천 달러의 세계 최고 부국 중 하나이다. 
 
 
▲ 아름다운 네덜란드의 튤립 www.wikipediam
 
네덜란드계 미국인은 미국의 역사를 통틀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특히 뉴욕은 네덜란드인들이 세운 도시답게 지금도 그들의 족적이 도시 곳곳에 어려있다. 
현재 5백만 명의 미국 인구가 자신들을 네덜란드 혈통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딱히 일정한 곳에 거주지를 정하고 살지는 않으나 뉴욕과 캘리포니아 그리고 미시간 등지에서 유서 깊은 마을을 형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허드슨 강의 이름으로 잘 알려진 헨리 허드슨은 영국인이었으나 네덜란드 국왕으로부터 1609년 탐험대와 선박을 외주받고 네덜란드를 위해 충성을 바친 사람이었다. 그는 이 장대한 강을 따라 올라가면 ‘약속의 땅’ 중국을 만날 것으로 확신했었다. 
정작 네덜란드인의 정착지가 생겨난 시기는 제독 피터 미뉴엣이 소위 맨하튼 섬을 24 달러에 산 1626년이다. 이는 영국을 탈출한 청교도들이 보스턴 남단 플리머스에 들어온 1620년 보다 6년이 뒤진다. 
현재나 당시나 인구가 그리 많지 않았던 네덜란드는 뉴 암스텔담으로 칭한 이 정착지에 자리 잡기위해 다른 유럽인들을 끌어들였다. 독일에 쫒겨난 쥬이시, 영국에서 핍박받던 퀘이커, 그리고 당시 카톨릭 교회에 반대하던 신교도 (프로테스탄트) 등 당시 유럽 사회의 천덕꾸러기들을 모두 받아들였고 놀랍게도 종교와 신변의 자유를 보장하는 식민지 헌법까지 채택을 하였던 것으로 기록 되어 있다. 
1626년부터 영국의 군함이 쳐들어와 당시 뉴 암스텔담 시민들을 몰살한 1664년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뉴욕은 실로 북미 대륙의 교역, 정치의 중심지였다. 개인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극도로 탄압했던 영국의 눈에 가시였던 것이다. 
특히 지금도 세계 3대 천연 요새(要塞) 항구라는 맨하튼 일대가 탐이 난 영국이 6개월 이상동안 항구를 원천봉쇄하고 원거리 폭격으로 사람들을 살상하자 당시 뉴 암스텔담의 총독 즉 시장이었던 피터 스타이브슨트는 주권을 영국에 넘길 수 밖에 없었다. 영국 식민 군대는 당시 영국왕 찰스 2세의 동생 제임스 경의 타이틀 Duke of York을 따서 뉴 욕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하지만 뉴욕시 남단 특수 공립고등학교 중 한인 동포 자녀들이 많이 재학 중인 스타이브슨트 고교 등 지금도 뉴욕 시에는 네덜란드식 이름이 즐비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월 스트리트는 실제로 네덜란드인들이 외부의, 영국군, 침략을 방지하고자 벽을 쌓은데서 이름이 유래한다. 또 맨하튼 남부 바워리(Bowery)라는 지명은 농토라는 의미의 화란어 boweries에서 유래했고 할렘도 당시 네덜란드 한 지방 명칭이었던 Haarlem을 본 뜬 것이었다. 그 외에 브루클린, 브로드웨이, 스테이튼 아일랜드, Artherkills 등 뉴욕시내 화란어 지명은 즐비하다. 
네덜란드의 영향력은 단순히 한 시대를 풍미하고 사라진 오래된 역사가 아니고 이들 후손들이 미국 사회에 끼친 영향력을 보면 알 수 있다. 유명한 네덜란드인의 후예들을 손 꼽아보면 우선 루스벨트 가문을 들 수 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을 배출했을 뿐 아니라 뉴욕 주지사, 상 하원의원 등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물론 이 정치력을 뒷 바침하는 것은 재력인데 제너럭 일렉트릭을 비롯한 국제 대기업 배후에 루즈벨트 집안이 깊이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미국 8대 대통령 마틴 반 버렌(Martin Van Buren)도 오래된 네덜란드 출신 가문이 배출한 인물이고 서자 출신어었던 알랙산더 해밀턴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아버지 보다는 네덜란드 혈통의 어머니의 영향력을 더 높이 평가했다. 비행기 시간표, 기차 시간표 등에 응용되는 여객 시간표를 만들어내 억만장자가 된 후 밴더빌트 대학, 박물관 등을 세운 코넬리우스 밴더빌트도 화란 출신이다. 
그러나 네덜란드인 후예 중 가장 친근한 인물은 토마스 에디슨일 것이다. 사상 최고의 발명가였던 에디슨이 사업에 실패하자 그의 전구 특허를 사들여 세계 최고 기업이 된 것이 또 다른 네덜란드계 집안 루즈벨트 소유의 제너럴 일렉트릭이었던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로 기억되는 일화이다. 
루즈벨트, 밴 브른, 밴더빌트, 에디슨 집안 모두 뉴욕 인근에서 일가를 이루고 지금도 미국의 재계,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지난번에 잠시 소개했듯 이들이 영국 출신의 청교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화란계 칼빈니스트들은 미국의 권력과 정신을 지탱하는 소위 WASP 집단의 구성원으로 꼽는다. 2년전 대선주자 토론을 벌여 주목을 받은 뉴욕의 홉스트라 대학도 네덜란드 풍의 학제를 자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