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캐나다에서는 2월을, 영국에서는 10월을 Black History Month로 지정해서 아프리카에서 온 이민들의 고통과 애환, 그리고 그들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현재 학교나 주요 언론에서는 Black이라는 용어보다는 African American 이라는 단어를 선호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1926년 저명한 역사학자이며 그 자신 흑인이었던 Carter G. Woodson(사진) 이 2월 둘째 주를 ‘Negro History Week’으로 지정하자고 제창하면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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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gro라는 단어는 보통의 대화에서도 절대 사용을 하지 말아야 될 용어라는 것을 잘 아실 것이다.
물론 Negro는 미국 법 상 아프리칸 어메리칸을 지칭하는 용어이고 흑인들 사이에서는 흔히 서로를 지칭하지만 흑인이 아닌 다른 인종이 이 단어를 사용하면 인종차별주의자로 낙인(烙印)을 찍히게 되니 주의하기 바란다.
왜 웃슨 교수가 2월 둘째 주를 지목했는가에 대한 변을 들어보면 미국 역사상 노예 해방과 흑인 인권 신장에 가장 큰 공언을 한 두 사람의 생일이 바로 이 2월 둘째 주이기 때문이었다.
Lincoln 대통령의 생일이 2월 12일 그리고 흑인 노예제 철폐 운동의 기수 Frederick Douglass(사진)의 생일이 2월 15일이다. 참고로 링컨 대통령은 켄터키 주에서 1809년 2월 12일에 출생했고 프레드릭 더글러스는 1818년 2월 15일에 메릴랜드 주에서 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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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슨 교수가 1926년 이 기념의 주를 제창한 후 50년이 흘러 1976년에 이르렀을 때 마치 미국 독립 200 주년 행사를 준비하던 연방정부가 전 국가적 차원에서 2월 전체를 Black
History Month로 기리자는 제안이 나왔다. 의회를 통과했고 최근에 Black 이라는 용어 대신 African American History Month로 불리게 되었다.
여기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어떻게 Frederick Douglass나 Carter G. Woodson 같은 지식인들이 극단적인 인종 차별주의 시대에 존재할 수 있었는가이다. 프레드릭 더글러스의 경우 노예제도가 미국 사회를 짓누르고 있었고 카터 웃슨이 활동하던 20세기 초반에는 노예제도는 철폐되었으나 주별로 극악무도한 인종차별법인 짐 크로 법안들로 흑인들을 찍어 누르던 시대였다. 이런 사회 배경에서 저명한 사회 운동가나 학자가 존재했던 것은 거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이 악명 높은 짐 크로 (Jim Crow Laws) 법안이란 과연 무엇인가? 미국 노예제도가 철폐된 해가 1863년이다. 하지만 미국인 모두가 동조(同調)를 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노예제도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남부 사람들이 1870년대부터 연방제도인 미국의 법을 교묘히 이용해 해방된 흑인들을 핍박(逼迫)하기 위한 주법을 제정하기 시작을 했다.
▲ 급수대에 유색인종(Colored) 전용 표시가 있다. www.wikipedia.com
이 짐 크로라는 이름은 한물간 코메디언이었던 토마스 ‘Daddy’ 라이스라는 사람이 고안해낸 1828년 원맨 쑈 명칭에서 시작되었다. 메인 쇼에 곁들여진 간막극에 백인인 라이스가 얼굴에 숯 검댕이를 칠하고 흑인 사투리를 쓰며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며 온갖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것을 보고 백인 관객들은 열광을 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그가 부른 노래가 지금도 인종 차별의 대명사로 불리는 ”Jump Jim Crow”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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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Jim은 당시 백인들이 흑인을 부를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명칭이었다. 즉 실명에 상관없이 무조건 흑인이면 Jim 혹은 Sam이라고 불렀다. 일부는 이름조차 부르지 않고 한국말 ‘얘야’ 하는 의미의 ‘Son’을 사용해 모든 흑인들을 지칭하였다. 바로 토머스 라이스라는 인물도 이런 사람 중 하나로 그의 중간 이름 ‘Daddy’는 물론 실명 Darthmouth의 준말이기도 하지만 또 그가 모든 흑인을 ‘Son’으로 불렀다는 의미에서 아버지 ‘Daddy’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즉 나이가 60 먹은 흑인 할아버지에게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18세 백인이 ‘Son’이라고 부르는 시대였다고 보면 된다. 이 어처구니없는 코메디가 토머스 라이스도 이미 죽고 없었던 1870년대 40년 만에 다시 성행(盛行)을 하기 시작했다. 노예 해방에 대한 반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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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이 극중 인물의 행동을 근거로 흑인들은 덜 떨어진 자, 더 나아가 인간 이하(Sub-Human)라고 규정을 하고 백인과 격리(隔離)시키는 차별법안 즉 Segregation Laws를 입결하기 시작했는데 이 법안들의 근간은 흑백 간 결혼을 근본적으로 방지하여 혼혈을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 유색인종 전용 당구장 www.wikipedia.com
이 법안을 바탕으로 구조적 인종 차별 Segregation이 시작되는데 이를 사실상 노예제도 즉 De Facto Slavery라고 부르기도 한다. 미국 헌법으로 노예제도는 폐지되었으나 현실적으로는 노예제도를 유지하려는 못된 법이었다.
알라바마, 텍사스를 비롯한 남부 15개 주에서 19세기 말부터 1960년까지 시행된 주법들로 백인과 타 유색인종이 결혼할 경우 결혼 증명서를 발급할 수 없다는 법안을 시작으로 인종별 버스좌석제도, 흑 백 학교 따로 설립, 백인, 흑인, 칼라드 (백인과 흑인 혼혈) 차별화 법 등 흑인이 미국 주류사회로 진출해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을 원천적으로 방지하려는 법안들이었다.
▲ 백인과 흑인의 출입문이 따로 있다. www.wikipedia.com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이 소위 혼혈 자녀들(Colored People)이다. 백인 농장주들과 흑인 여자 노예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에 대한 명칭이었다. 자식이 딸이면 두말할 것 없이 노예가 되나 아들일 경우 일부 양심적인 농장 주 아버지들이 그래도 서자 취급을 해서 성(Family Name)도 따르게 해주고 교육도 시켰던 기록이 있다. 프레드릭 더글러스도 이 Colored Son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들이 자라서 결혼할 나이가 되면 인근 가난한 백인 가정의 딸과 결혼시킨 후 야간의 재산을 Ep어 준 후 먼 곳으로 이주에 살게 했었다.
▲ 백인 고객만 이용할 수 있다는 표시가 돼 있다. www.wikipedia.com
사실 이들 혼혈 아들들은(Colored Son) 아버지의 죄악(Sins of Father)으로 생겨난 생명이므로 노예 해방 이전에는 백인 사회에서도 어느 정도 관대히 받아들여 주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링컨 대통령의 노예 제도 철폐 후 짐 크로 법안이 속속 생기면서 이 혼혈 아들들이 질시의 대상이 되어 극단적 폭력에 시달리게 되었다.
▲ 백인과 흑인 고객 모두에게 서비스한다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www.wikipedia.com
얼마 되지는 않지만 재산이 있고 버젓이 백인 부인과 사는 것을 못 마땅히 여기는 못사는 백인 농부, 노동자, 카우보이들이 이들 가족들을 대상으로 린치와 테러를 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를 견디지 못한 혼혈 아들들의 가족들은 뉴욕을 비롯한 대 도시 혹은 학교 타운으로 이주를 했고 그들 중 소수이지만 유명한 학자나 목사가 나왔던 것이다.
올해 2011년 흑인 유산의 달의 주제는 African Americans and the Civil War이다. 뉴욕 시에서 볼 수 있는 기념행사로 42가 5번가에 위치한 뉴욕 시립 도서관 산하 숌버그 센터의 전시회를 권장하고 싶다. (Schomburg Center for Research in Black Cul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