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의 역사에는 이상향을 건설하기 위한 시도가 두 차례 있었다. 9세기 초에서 15세기 중엽까지 약 600년에 걸친 앙코르 왕국의 시대에는 그 이상향이 종교적 상징으로 실현되었다. 앙코르와트를 비롯한 수많은 사원은 우주의 중심을 의미했으며, 우주의 법칙과 시간의 순환이 정교한 수치를 통해 힌두교 혹은 불교 사원이라는 공간에 실현되었다.....두 번째 시도는 1970년대 중반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 정권하에서 이루어졌다. 그들은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현실 속에서 실현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학살 현장인 킬링필드를 남기고 처참하게 몰락했다. (이지상 캄보디아 여행기 머릿말 중)
캄보디아 하면 떠오르는 두 단어는 ‘앙코르 와트’ 사원과 ‘킬링 필드’가 아닐까요.
찬란한 크메르 문명의 상징인 앙코르와트는 잘 알려진대로 12세기 중반 크메르 건축예술의 극치를 이루는 역사적인 예술품입니다. 그리고 킬링필드는 잔혹한 폴포트 정권이 4년의 통치기간중 무려 200만명을 학살한 비극의 단어와 함께 인류의 씻을 수 없는 수치로 남아 있습니다.
뚜얼슬렝(Tuolsleng) 박물관은 프놈펜 시내에 있습니다. 이곳의 입장료는 2달러에 불과하지만 뚜얼슬렝의 정문은 마치 지옥(地獄)과 연옥(煉獄)의 경계인 것 같습니다. 그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오래지않아 소름끼치는 공포와 한없는 슬픔에 잠기게 되니까요.
저 자신 뚜얼슬렝을 처음 방문했을 때 너무나 큰 쇼크를 받았기에 다시 발걸음을 하기가 겁이 났지만 프놈펜을 찾는 분들에게 역사의 현장을 보여줄 필요로 인해 가야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몇 달전 미국의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캄보디아를 방문했을 때에도 바로 뚜얼슬렝을 찾았습니다. 클린턴 장관도 큰 충격속에 눈시울을 붉혔다고 하지요. 뉴스로 독자분들을 위해 비극의 현장 뚜얼슬렝을 다녀 왔습니다.
폴 포트(Pol Pot)를 잘 아시겠지요. 요즘 젊은 세대는 휴대전화 판매원에서 세계적인 오페라가수가 된 영국의 폴 포츠를 떠올리기도 합니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폴 포트는 캄보디아의 히틀러로 비견되는 잔혹한 독재자요 살인마로 기억됩니다.
캄보디아의 극단적인 공산주의자 단체인 크메르루주 지도자 폴 포트(위 작은사진)는 본명이 살로사 사입니다. 완전한 캄보디아의 재창조를 목표로 1975년부터 전 정부와 관련된 인물, 교사, 승려(3만명이 학살당했음), 의사, 학자, 중학교 졸업자, 외국 유학자, 왕족, 무용가 등 캄보디아 최고 엘리트들을 처형하고 무고한 민간인들도 대거 학살했습니다. 이 대학살은 1979년 캄보디아의 옆 나라인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함으로서 끝납니다.
광기어린 학살의 산물이 바로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입니다. 700만 인구 중 200만 명이 학살당했다니 듣기만해도 전율(戰慄)이 흐릅니다. 캄보디아의 여러 수용소 중 가장 악명 높은 수용소 중 하나가 바로 뚜얼 슬렝 수용소인데, 이 곳에 갇힌 2만명의 수용자 중 단 6명만이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폴 포트는 모든 도시에 사는 국민들을 한꺼번에 시골로 분산시켰습니다. 그리고 지식인과 부자, 외국인과 교류가 있는 사람, 전문직, 기타 등등 자신들의 기준으로 문제가 있겠다 싶은 모든 사람들을 잡아 들였습니다. 여기에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나 안경을 낀 사람, 손이 고운 사람 등도 포함되었다고 합니다.
한때 고등학교였던 뚜엉 슬랭은 이들에 매일 갖은 고문을 가했고, 끌고 가서 죽였습니다. 감금해 고문한 곳이 뚜엉 슬랭이었고, 그들을 끌고 가서 죽인 곳이 킬링필드였습니다.
▲눕혀놓고 고문하던 곳. 침대 프레임만 남은 모양이 보기만 해도 살벌하다.
손이 곱다는 이유로 안경을 썼다는 이유로 외국어를 썼다는 이유로...수많은 사람들이 고문당하고 처참하게 학살된 것입니다..이런 것이 이유가 된다면 이것을 피해갈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가해자들 속에도 손이 고운 사람도, 안경을 쓴 사람도, 외국어를 구사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캄보디아에 태어났다는 죄아닌 죄 하나로, 그들 가해그룹에 속하지 않았다는 불운하나로 이토록 무자비한 비극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중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