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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不惑)에 평생의 꿈인 조종사가 되어 경비행기로 미대륙 횡단종단을 4차례나 했다. 비행경력 28년에 비행시간만 5천시간이 넘는다. 쌍발기부터 보잉747 등 모든 종류의 비행면허를 갖고 있으며 ‘조종의 예술’로 꼽히는 매뉴얼 비행의 일인자로 꼽힌다. 오늘도 '애기(愛機)' 파이퍼 워리어를 몰고 하늘을 나는 ‘60대 청년’ 신상철 기장의 파란만장한 항공인생을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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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대륙에 뿌린 눈물

글쓴이 : 신상철 날짜 : 2012-03-17 (토) 02:03:54

새로운 땅! 알젠틴에 도착하여 희망에 부푼 생활을 시작한 기쁨을 써내려간 흥분된 마음이 가라앉기까지 어언 두세달이 지나갔다.

너무나 상반된 시작과 다음에 닥치는 상황들이 교차되는 현실.,

그 당시의 황당함이 지금까지도 내마음속에 불안감으로 작용하며 이토록 다음 글을 쓰기에 부담으로 다가 왔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며 새로운 환경에 접할 때마다 과거의 경험이 바탕이 되고 그것을 되새김하며 더 나은 결과를 만들려고 노력하는것이 인간만이 가진 智慧(지혜)인 것이다.
 

그렇지만 과거의 경험이 전무한 상황에서는 앞뒤를 분간 할수 없는 혼돈의 고통을 반드시 겪어야만 한다. 그 고통을 피할수 없다면 그것을 순순히 받아 드리기 까지 얼마나 힘든 시간이 흘러야 할까?

내 앞에 닥친 현실은 너무나 혹독했다.

그 나라 언어는 단 한시간도 정식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는 Spanish.

장소는 그나마라도 남미의 신사나라 라는 알젠틴, 부에노스 아이레스, 빈민가!. 

주민 대부분이 이웃나라에서 잘살아 보겠다고 넘어온 온갖 인종들, 파라과이, 우루과이, 칠레, 볼리비아 등등.(동양인은 한국인뿐)

당시 한국에선 박정희라는 걸출한 인물이 조국 근대화를 위해 말발굽을 울리고 있을때, 알젠틴 역시, 군사독재정권으로 자기세력에 반대되는 곳에는 무자비한 철퇴를 내려치는 암흑시대였다.

경제개발을 꾀한다는 취지아래 외국물품수입을 금지하여 한국의 6.25동란 후 정도의 경공업 수준으로 온 국민이 만족해야하는 시대였다.

그러나 수요가 있는곳에 공급이 있다는 경제원리에 따라 자연히 밀수도 성행 할수밖에 없는 실정.

엊그제까지 세계의 온갖 상품이 난무하는 시장에서 살다온 나로서는 갑자기 폐쇄된 공간에 떨어지는것 같은 급격한 상황변화.

시간이 지날수록 나에게는 견딜수 없는 요인들로만 나타난다. 날마다 고물같은 전기다리미, 조잡한 라디오, 다 깨진 흑백 TV 등을 수리할때 완전히 시간이 거꾸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엊그제까지는 세계최첨단 군사장비를 만지던 사람이었는데.......

어떡하랴, 이런 일이라도 해서 살아가야 하는데.....

 

처음에는 정신이 없었으나 차츰 생활이 익숙해갈 무렵부터 가게에 손님이 들어오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저 사람이 무슨 말을 하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하는 불안감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물건을 팔때는 손님에게 금액을 써서 보여주고 돈을 받는 일이 허다했으며 모르긴 몰라도 허구한날 손님과 동문서답, 그것도 말도 안되는 엉터리 스페니쉬로....

이런 언어 문제는 그런대로 인도네시아 8개월의 주재원 생활, 이란공군에서 2년의 경험 등으로 메꿔 나갈수 있었다.

하지만, 언어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들, 특히 동네 불량배들이 몰려와 물건을 훔친다든가에서 발생되는 법적인 상황으로 번질 때는 束手無策(속수무책)이었다.

어떤 때는 수리의 책임 문제로 시비가 일어날 때, 자기들 역시 남의 나라에 와서 사는 주제에 제3국인(주로 볼리비아, 파라과이이들)들이 "너의 나라로 돌아가라" 하는 욕설을 들을 땐, 정말이지 이성을 잃을 것 같은 분노를 느끼곤 하였다.

어느새, 정신없이 살아온 세월이 계절을 바꿔놓아 습기 많고 지루하기만 했던 겨울이 지나가고 9월에 접어들면서 봄기운이 싹트기 시작했다. (남반구는 계절이 정반대) 그동안 아이들은 3월에 학교에 들어가서 큰아이는 2학년에, 둘째는 1학년, 그런대로 잘 적응하고 다니는데 공부라 해봐야 오전 서너시간이 고작이라 학교가 끝나면 2백여미터 운동장 끝에서 우리 가게가 보이기 시작할 때부터 "아빠" 하고 동네가 떠나가게 소리를 치면서 나타난다.

그때마다 아! 저놈들때문에 산다 , 저놈들이 나의 희망이다, 하면서 용기를 더욱 북돋았다.

 

또한 이놈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훌륭한 가게 종업원으로 변신한다. Spanish가 부족한 아빠를 도와 통역도 하고 명절 때 같으면 북적거리는 손님 사이에서 둘째녀석이 도둑님 뒷주머니에 훔쳐넣은 물건을 뽑아내며 "아빠 도둑 잡았다" 소리치기도 해서 아빠, 엄마를 웃기기도 하였다.

그러는 동안 점점 더 그곳 생활에 익숙해 갈 무렵, 반년쯤 지났을 때 후발 주자로 이란에서 이곳에 도착한 사람들로 부터 우리가 떠난후 "이란" 사정과 바깥세상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특히 미국으로 간 철웅형의 소식도 듣고 주소도 알게 되었다.

주저할 것 없이 철웅형께 편지를 했다, 이곳은 무언가 잘못되었다, 남미로 온 것은 전적으로 나의 잘못된 선택이었다,.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미국으로 가야겠다, 등의 내용으로.........

여기에서 언급된 "철웅" 형과의 인연을 이야기 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다.

시작은 1966-7년쯤 충남대전 공군기술교육단, 당시 나는 기술학교 기술교관(하사)으로 근무했다. 매년 연례행사처럼 치루는 사관학교 졸업후 비행정비교육을 받으러온 신임 소위들로부터의 시달림, 점심시간 식당으로 향하는 길목에 단체로 서서 복장 검사며 걸음걸이 두발상태 등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 기합을 주고 구타하는 공군의 엘리트들, 그 횡포가 싫어 부대식당을 가지 않고 없는 돈에 매점에서 점심을 해결하곤 했다.

하루는 그 길목에서 만난 소위 한분이 너무나도 인자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이었다. 다정한 인상에 용기를 내어 말씀 좀 하고 싶다하니 저쪽 풀밭에 앉자 한다. 바로 김철웅 소위였다.

 

나 또한 조종사가 내 일생의 꿈이다, 어떻게 하면 조종사가 되겠냐는 이야기 등을 하고 헤어졌고 그후로 십년이 지난후 명동에서 무역회사 직원으로 근무당시 대한무역진흥공사와 성균관대햑교 무역대학원이 운영하는 수출학교 51기에 수강하게 되었는데 수강첫날 그곳에서 철웅형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 운명의 만남이 자그만치 반세기, 50년을 이어오고 있다.

철웅형 또한 세속에 汚染(오염)되지 않은 사람으로 당시 대한민국 같은 나라에서 살기에 알맞지(?) 않은 사람이었다.

권모술수와 온갖 비리가 판치는 흙탕물속에 어차피 목욕할 성품이 아니여서 사관 출신에다 최정예 전투조종사의 영예를 소령 계급장과 함께 벗어 던지고 세상속으로 뛰쳐 나왔지만 대한민국 사회는 그런 사람을 받아주는 곳이 아니었다.

 
▲ 철웅형(오른쪽)과 함께

그 분은 내 인생의 Role Model이었으며 우리는 거의 날마다 만나 현실적인 문제나 장래문제 같은 것들을 끊임없이 이야기 하였다.

항상 결론은 이나라를 떠나자!

어떻게 떠날 것인가?

방법은 두가지, 이민 아니면 외국에 취업으로 나가는 길.

당장 먹고 살기도 빠듯한데 무슨 돈으로 이민을 간단 말인가?

당연히 추진할 길은 취업으로 결정되어 해외개발공사에 등록을 하고 또 한참을 잊고 살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드디어 철웅형에게 먼저 좋은 소식이 왔다. "이란" 국영 사탕수수 농장 외국근로자 매니저로 취업이 된 것이다.

그때의 부러움이란 말로 할수 없었고 어쨌튼 철웅형은 떠났다.

또 6개월이 지난후 철웅형 가족까지 모두 "이란"으로 떠났다.

그때의 허전함이란 서울 하늘아래 나홀로 같은 심정이였다.

한편, 매달 참여해야 하는 예비군 훈련에 나갔을 때 공군 전역자들로 부터 "이란" 공군에서 한국공군 기술진을 모집 한다는 소식과 항공기 정비분야라는 말을 듣고 섭섭했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또 약 한달 정도가 지난 다음, 어느날 해외개발공사로 부터 한통의 편지를 받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란 " 공군에 지원 됐으니 Interview를 하라는 통지서였다.

지정된 날짜에 "이란 공군" 시험관과 한시간이 넘는 구술시험끝에 합격함은 물론, 취업계약서에 Sign까지 하는 절차가 당일에 이뤄졌다. 이 세상을 다 얻은 것같은 마음으로 한걸음에 집으로 달려와 아내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그때가 한여름이었는데 더위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이 없지만 가을이 오고 가을이 가도 "이란"에서는 소식이 없었다.

이제는 직장까지 그만두고 날마다 신촌에 있는 해외개발공사로 출근하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겨울이 왔고 눈이 오고 얼음이 얼어도 소식은 오지 않았다. 막내까지 다섯 식구의 생활이,가장의 수입이 없으니 어떠했겠는가?

점점 마음속에 불안감이 엄습해오고 추위에 심신이 지쳐가고 성탄절 들뜬 세상은 아무도 나의 마음을 알아줄리 없는데,,,

그해도 다 저물어가는 섣달 스무 아흐렜날, 밤이 깊어가고 있을 무렵!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전보요!

놀란 가슴으로 전보를 뜯어보니 "명일 아침 해외개발공사 별첨 서류지참 출두, 31일 출국예정"

아아아아아아아..........

얼마나 기다렸던가?

1976년 12월 31일, 우리일행 20명은 김포공항을 출발해 "이란"으로 향했다.

이 모든 일이 철웅형을 만남으로 이뤄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할것 없이 "이란"에서도 철웅형을 만났으며 훗날 남미를 떠나 미국에 도착, 이곳에서의 삶 이야기편에 다음 이야기를 더 이어 나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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