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한여름 밤의 열기가 식어가고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한 첫날 밤이 지난, 다음날 아침, 태양은 너무나 밝게 남대서양 바다에서 떠올라 우리가족이 묶고 있는 호텔 창문을 비추며 피곤한 나그네의 잠을 깨워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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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녕, 무엇이 나를 이토록 움추리게 옥죄이는지도 모르고 무의식 속에서 몽유병(夢遊病) 환자 마냥 내 의식과 상관없이 몸이 움직이는대로 따라가는 것같은 착각속에서 맞은 알젠틴의 두번째 날.
앞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어떤 환경이 우리 앞에 전개될지, 한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방랑객 일가족의 가장은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는 심정으로 어린아이들의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삶의 의미나, 인생의 설계같은 사치스런 생각보단 생존해야 한다는 일념 이외에는 아무것도 우선할게 없다는 결론에 이르자 오히려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을 느낀다.
될대로 되라! 어디 까지 가나 가보자!
일제 말기 40이 넘은 고령의 어머니에게 죽음의 산고(産苦)를 안겨 드리면서까지 나는 죽지않고 태어났다!
육이오도 죽지않고 견뎠다!
1-4 후퇴 때 한강 고무다리를 건널때도 얼음물에 빠져 죽지않고 살았다!
피난길 화물열차 지붕위에서도 떨어져 죽지않고 살았다!
피난시절 삼일을 굶고도 양조장 막걸리 찌꺼기 얻어다 먹고 살아 남았다!
콩쥐 팥쥐보다 더한 계모의 구박속에서도 10년을 버텼다!
17살의(정확히 15년 8개월, 부정이던 합법이던 아마도 대한민국 군역사상 최연소 현역 입대일것이다?) 어린 나이에 계모의 학대를 피해 군에 입대했더니 남들은 생어금니까지 빼가며 가지 않으려던 대한민국 공군이 나에게는 포근한 고향집 같았다. 배고픔만은 견디기 힘들었어도 12년, 내 인생 황금기(黃金期)를 그곳에서 보내고 지금까지 잘 살아 왔다!
군에서 전역한뒤 어느새 아이가 둘이나 되었고, 한겨울 경기도에서 서울 명동으로 출퇴근 할 때는 아이들 군것질 값으로 전용하고자 한구간 Bus비를 아끼려고 덧옷도 없이 벌판에서 3-40분씩 떨면서도 미래의 희망을 가지고 살았다.
그러다 대망의 Iran 공군에 취업이 되어 2년을 보낸후 회교혁명의 와중(渦中)에도 어떻게든 이곳을 탈출해서 잘살아 보자고 찾아온 알젠틴, 부에노스 아이레스........
지금 나의 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다섯식구가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이 미화 2천불도 채 되지 않는다!
어떻게 되가는지 무엇이 무엇인지, 도무지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는다!
이때! 나의 궁상(窮狀)을 질책하듯 큰아이가 눈을 뜨고 “아빠! 나 배고파” 하며 와서 안기는게 아닌가.
그때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래.. 너희들이 있구나..”
뜨거운 눈물이 솟구치길래 얼른 눈을 돌리면서 “알았어, 아빠가 빵 사다줄게” 하며 호텔 밖으로 나왔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한때는 세계 3대 미항(美港)의 하나였고 2차세계 대전 전에는 미국을 능가하는 경제력을 자랑했던 나라.
중학교 지리시간에 배웠던 남미 ABC 나라중 으뜸이었던 탱고의 나라, 알젠티나! 아직도 기네스 기록이 깨지지 않는다는 세계 단일 도로중 길의 폭이 제일 넓은(144m) Avenida Nueve de Julio(7월9일, 알젠틴 독립기념일) 거리. ‘7월9일 거리’에 내가 지금 거기에 서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미국 워싱톤 기념비를 Copy한 독립기념탑(오벨리스크)이 한눈에 들어온다.
저 쪽으로는 한국 최초의 세계여행가 김찬삼 교수가 정장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입장이 거절된 그 유명한 Teatro Colon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