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감독으로 명성을 이어가는 허재의 현역시절 별명은 ‘농구천재(籠球天才)’다. 솔직히 농구기자를 하기전까지 허재에 대한 최상급의 찬사를 한국언론 특유의 허풍이라며 못마땅하게 생각했던게 사실이다.
그런데 농구기자 2년차였던 95년 허재의 진가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경기를 목격했다.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아시아클럽선수권이었다. 당시 한국은 프로출범전이었고 국내최강인 기아자동차가 아시아클럽 챔피언들이 참가한 그 대회에 출전했다.
기아는 허재와 강동희 김유택을 일컫는 ‘허동택 트리오’가 버티고 있었지만 아시아클럽선수권에 출전한 다른 팀들은 미국용병들이 두세명씩 뛰는 팀이었다. 탈아시아 전력이었던 것이다.
현지에서는 기아가 예선탈락할 것이라는 눈치였다. 그러나 기아도 한국챔피언의 자존심이 있는 팀이었다. 예선리그를 거치면서 서서히 기아를 주목하는 분위기였다. 준결승에서 만난 상대는 필리핀 클럽. 그런데 우습게도 필리핀은 3개 클럽 선수들이 연합한 팀이었다.
자신들을 후원한 스폰서를 위해 급조된 팀이었다. 어떻게 출전자격을 얻을 수 있었는지는 지금도 의문이지만(아마 대회 스폰서와 특별한 관계였던것 같다) 당연히 필리핀연합팀은 최강 전력이었다. 특히 필리핀의 '마이클 조던'이라 불리던 미국용병(필리핀 리그에서 수년간 MVP를 차지했다)은 조던과 유사한 체구에 발군의 플레이를 자랑했다.
솔직히 기아의 완패를 예감했다. 그러나 허재를 과소평가한게 잘못이었다. 그에겐 상대가 강할수록 타오르는 오기와 투혼이 있었다.
도저히 각도가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의 더블클러치, 유연한 물고기처럼 상대수비수들을 허수아비로 만드는 360도 회전드리블, 어안(魚眼)렌즈와도 같은 코트비전, 던지는대로 들어가는 3점포, 그야말로 눈부셨다.
필리핀 선수들이 허재를 막는 방법은 오직 파울밖에 없었다. 허재를 전담수비하던 선수들이 무려 3명이 5반칙으로 나가고 또한명의 선수가 파울트러블(4파울)에 몰렸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필리핀의 마이클 조던도 역시나 대단했다. 두 선수의 플레이는 명불허전(名不虛傳) 용호상박(龍虎相搏), 가히 환상의 대결이었다. 그러나 동가홍상(同價紅裳)이라고 조던닮은 용병보다는 한국인 허재가 돋보인게 사실이다.
허재의 신들린 활약에도 불구하고 기아는 어쩔수 없는 전력차이로 분패했다. 관중들은 자신을 향해 기립박수(起立拍手)를 보냈지만 허재는 경기에서 진 것이 못내 분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종료직후 깜짝 해프닝이 벌어졌다. 필리핀 선수들이 허재에게 달려가는게 아닌가. 기자석에서 벌떡 일어났다. 경기에서 농락(?)당한게 화가 나서 집단몰매라도 가하는걸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웬걸, 필리핀 선수들은 허재에게 사인을 요청하고 기념사진을 찍고 마치 연예스타를 둘러싼 팬들처럼 호들갑을 떠는게 아닌가. 지금까지 필자는 경기장에서 선수들이 상대 선수에게 사인을 요청하고 시진을 찍는 소동을 벌였다는 소리를 듣도보도 못했다. 허재도 어리둥절한듯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코트를 빠져나오는데 박인규코치가 말을 건넸다. “허재가 1년에 한번 미친 농구를 하는데요. 오늘이 바로 그날이에요.” 진짜 강한 상대를 만나야 진면목(眞面目)을 발휘한다는 허재. 농구기자 2년차만에 허재의 미친(?) 경기를 본건 행운이었다. 그날이후 필자는 ‘농구천재’ 허재라는 표현에 전혀 이의를 달지 않았다.
당시 허재의 나이 서른한살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전성기를 지난 나이다. 그럼 한창때 최고의 무대에 갈 수 있었다면 어떤 플레이를 했을까. 용산고 졸업반때 이미 현역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은 허재는 한국에서 태어났기에 ‘불행한 농구천재’였다.
필자는 허재가 전성기에 NBA에 갔다면 충분히 통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최고의 테크니션인 동시에 흑인못지않은 체력을 타고났고 강한 승부사의 기질까지 갖췄다. 허재만이 아니라 강동희 이상민 등 당대 최고의 포인트가드들도 NBA 진출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축구와 야구에선 많은 선수들이 세계 최고의 무대에 진출했고 기대에 걸맞는 활약을 펼쳤거나 펼치고 있다. 그러나 유독 농구는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믿기때문이다.
일정 부분 동의한다. 미국의 대학농구팀은 무려 1300개에 달한다. 해마다 졸업선수들이 수천명씩 나오지만 NBA 신인드래프트에 지명되는 선수는 수십명에 불과하다. NBA 근처에도 못가본 미국용병(傭兵)들이 한국프로농구에서 날라다니는(?) 것은 미국의 우수선수자원이 얼마나 두터운지 잘 말해준다.
하물며 농구약소국인 한국의 선수가 NBA에 간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면박 줄만하다.
그러나 특정포지션의 소수의 재능있는 선수들에게 NBA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아니다. 그 가능성을 뉴욕 닉스의 중국계선수 제레미 린이 입증하고 있다.
닉스의 2군선수로 소위 ‘듣보잡’ 린이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 팀의 연승행진을 이끌고 급기야 수퍼스타 코비 브라이언트마저 빛을 잃게 하는 놀라운 활약으로 NBA의 신데렐라가 되었다. 그의 미친듯한 플레이는 ‘린새너티(Linsanity)’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졌을 정도다.
하버드 출신의 린은 명석한 두뇌와 송곳같은 패스웍, 픽앤롤 플레이, 스피드를 바탕으로한 스핀무브와 페니트레이션, 그리고 정확한 미들슛으로 포인트가드는 물론, 슈팅가드의 역할까지 하며 전력이 구멍난 닉스의 5연승을 견인(牽引)했다.
그러나 필자는 린이 포인트가드가 아니었다면, 또한 닉스라는 팀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과 같은 활약은 불가능했을 것으로 판단한다. 191cm의 그는 다른 포지션을 맡기엔 신장이 너무 작다. 탄력도 흑인선수들보다 떨어지고 슈팅의 정밀도도 상급이라 할 수 없다. 아시안 포인트가드에 대한 편견도 있었다. 2010년 드래프트에서 아무 팀도 그를 지명하지 않고 서머리그를 통해 어렵게 골든스테이트와 계약했지만 능력을 보이지 못하고 1년후 방출된 것도 그때문이다.
지금까지 NBA구단들은 아시안선수의 경우 키가 특별히 큰 장신에만 관심을 두었다. 어중간한 체구의 아시안은 스피드와 탄력, 슛을 갖췄다한들 경쟁력이 없다는 선입견(先入見)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도리어 장신의 벽이 더 두텁다고 생각한다. 수년전 하승진의 실패사례도 있지만 야오밍같은 특별한 재능의 선수가 아닌한 순발력과 스피드를 갖춘 엄청난 거한들이 거칠게 몸싸움을 벌이는 로 포스트에서 살아나기는 정말 힘들다.
200cm 전후의 선수들이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움직이는 포워드진영도 아시안에게는 벅찬 포지션이다. 아시안에게 가능성이 있는 것은 바로 가드진이다. 포인트가드가 가장 유리하지만 고감도 슈팅과 탁월한 스피드를 갖췄다면 슈팅가드도 도전해볼만하다.
포인트가드가 유리한 것은 경기를 조율하는 포지션의 특성상 자기 리듬에 맞춰 팀플레이를 끌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동료선수들과 약속된 움직임에 따라 패스를 공급하다가 여의치 않으면 기습적인 3점슛을 던질 수 있고 픽앤롤을 이용한 순간돌파 등 다양한 공격옵션을 택할 수 있는 것이 포인트가드이다.
제레미 린이 포인트가드가 아니었다면 장담컨대 전혀 눈에 띄지 않는 선수였을 것이다. 더구나 린은 카멜로 앤소니와 아마리 스타우더마이어와 같은 팀의 간판스타들이 부상 등으로 결장, 자신의 볼배급에 따를 수밖에 없는 충성도높은 동료들을 만난게 행운이었다. 경험없는 백업 포인트가드가 다소 실수를 해도 과감하게 밀어준 댄토니 감독의 인내심도 한 몫을 했다.
무엇보다 ‘키가 작은 아시안도 NBA에서 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 것은 큰 수확이다. 제레미 린의 존재로 아시안 관중들이 NBA 코트에 밀려들고 있다. NBA로선 또다른 마케팅의 시장이 열린 셈이다.
과거 농구기자시절 강동희와 이상민도 NBA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이같은 아시안 마케팅을 고려한 이유도 컸다. 즉 이들이 식스맨급의 플레이만 보여줘도 마케팅 감각을 갖춘 구단이라면 충분히 선수를 영입할 이유가 성립한다.
왜 제레미 린이 관중들을 열광시키는걸까. NBA에 그만한 선수가 없어서? 천만의 말씀이다. 키작은 아시안이 볼을 재간있게 다루며 경기를 조율하는 모습은 이전에 볼 수 없던 전혀 새로운 즐거움이다.
한국의 키작은 선수들이여. 희망을 가져라. NBA는 별세계가 아니다. 그들도 같은 인간이다. 이제 NBA는 그대들처럼 키작고 재능있는 아시안 선수들을 주목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