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가 스포츠 기사를 1면에 싣는것은 종종 있는 일이지만 톱기사로 대서특필(大書特筆)하는 것은 보기드문 일이다. 수퍼볼이나 월드시리즈 우승, 혹은 올림픽 등에서 미국팀이 커다란 개가를 올렸을 때 정도라면 모를까.
외국선수들이 큰 대회에서 우승한 경우는 어떨까. 지난 달 21세의 신성(新星) 로리 맥클로이가 US오픈에서 엄청난 기록을 세우며 우승했을 때 뉴욕타임스는 프런트면 중간 사이드에 사진을 뽑았다.
필자가 기억하기로 최근 수년래 외국 선수의 승리를 뉴욕타임스가 가장 크게 보도한 것은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김연아가 피겨스케이팅 우승을 차지했을 때였다. 1면 톱사진을 비롯, D섹션 10면과 13면을 할애하는 이례적인 스포트라이트였다.
그런데 이번에 뉴욕타임스가 김연아 이상가는 대서특필을 감행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17일 독일서 폐막된 여자월드컵에서 우승한 일본축구팀의 우승을 전한 것이었다.
18일 배달된 신문 1면에 얼싸안고 환호하는 선수들의 모습을 톱사진으로 실은데 이어 D섹션 1면과 6면 7면 등 3개면을 할애했다. 김연아 때보다 한 개면이 많을뿐 아니라 스포츠섹션도 별쇄로 발행해 훨씬 돋보이게 편집이 되었다.
사실 필자는 이번 대회 우승이 유력했던 미국이 어이없이 패했기 때문에 1면 톱으로 쓰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천하의 뉴욕타임스라 할지언정 어쨌든 미국 신문이요, 뉴욕 중심의 보도경향을 보이는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 예상을 보기좋게 깨고 뉴욕타임스는 마치 일본 신문을 방불케할만큼 일본의 승리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왜 그렇게 했을까.
우선 축구는 비록 풋볼과 야구 농구 아이스하키 등 4개 프로스포츠에 필적(匹敵)하지는 않지만 히스패닉들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이고 여성들에게는 어려서부터 친숙한 대중적인 스포츠이다.
보다 결정적인 한 가지는 드라마적인 측면이다. 넉달 전 대지진과 쓰나미로 1만5천명이 사망하고 피해지역이 쑥대밭이 되버린 일본 국민들이 실의를 딛고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는 상징적인 승리가 되었다.
더구나 일본은 여자월드컵에서 8강이 가장 좋은 성적이었고 최근 수년간 유럽팀에게 한번도 승리한적이 없어서 우승을 예상한 전문가들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8강전에서 주최국 독일을 연장 끝에 물리치고 준결승에선 전통의 강호 스웨덴에 선제골을 허용하고도 3-1로 승리를 거뒀다.
결승 상대인 미국과의 경기는 그야말로 짜릿한 드라마중의 드라마였다. 22회의 역대전적(3무19패)이 말해주듯 일본은 그동안 단 한번도 미국의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런 미국에 첫 승리를(비록 승부차기이지만), 그것도 월드컵 결승전에서 거둔 것이다.
경기내용은 어떠한가. 월등한 전력의 차이로 일방적인 수세에 몰리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강인한 투혼을 과시했다. 후반 24분 골을 허용하고도 12분후 만회골을 터뜨렸고 연장에서도 전반 14분 또다시 골을 먹었지만 종료 3분전 극적인 동점골을 터뜨렸다.
미국은 아무리 공격해도 무너지지 않는 일본에 질렸을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라 가령 권투에서 일방적으로 상대를 몰아붙여도 쓰러지지 않고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상대에 두려움을 갖지 않겠는가. 홍수환이 네 차례나 다운당하고도 바로 역전 케이오승을 거뒀듯이 말이다.
일본의 승리는 이미 승부차기에서 예고되었다. 사사키 노리오 감독과 선수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밝았다. 감독은 시종 웃음기를 머금으며 마치 우승을 예견한 사람 같았다. 그러나 미국 선수들은 잔뜩 긴장한 채였고 결국 첫 번째 키커와 두 번째 키커가 연달아 실축하는 최악의 상황에 봉착(逢着)한 것이다.
그 결과 일본은 아시아에서 남녀 성인팀 통틀어 처음 월드컵을 제패한 나라가 되었다. 그런 일본을 대서특필한 뉴욕타임스를 보면서 부러움 한편으로 우리나라 축구의 현실을 돌이켜보았다.
여자팀은 월드컵에 진출하지도 못했고 K리그는 말을 꺼내기도 부끄러운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승부조작 사건으로 국제적인 신뢰도가 추락해 버렸다. 비단 우리뿐 아니라 북한 여자축구도 집단으로 도핑 스캔들이 터져 남북한 공히 만신창이가 되는 느낌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남한이 돈을 위해 스포츠의 영혼을 팔아버렸다면 북한은 승리를 위해 스포츠의 양심을 내던져 버렸다. 참담(慘憺)한 남북한 축구의 현실과 너무도 대조적인 일본축구의 개가에 팬들의 입맛은 쓰기만 하다.
일부에선 "일본도 했는데 우리도 할 수 있다"며 4년후 우리도 월드컵 우승을 노리자는 말을 한다. 지난해 17세이하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이 깜짝우승을 차지했으니 이 선수들이 성장하는 4년후엔 못이룰 목표는 물론 아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우리 축구계의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는 개혁(改革)의 마인드가 필요하다. 어떤 과정을 통해 일본이 오늘의 위업을 이뤘는지 냉철하게 우리와 비교해야 한다. 일본이 했으니까 우리도 할 수 있다? 그런 자신감은 사기를 고양시킬지언정 우승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축구계의 뼈를 깎는 자성(自省)을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