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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싯적 꿈은 축구선수였지만 정작 배구선수를 하고 만, 당근 기자노릇은 축구였으되 야구 육상 사격 역도 배드민턴 농구를 섭렵하다 방송영화계를 출입하며 연예와 씨름한 방랑의 취재인생. 전직 스포츠신문 기자가 전하는 스포츠와 연예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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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감독과 어느 소년의 26년 인연(下)

글쓴이 : 로빈 날짜 : 2011-08-22 (월) 13:44:53


언젠가 그이는 자신을 찻잔을 받치는 접시에 비유했습니다.

접시가 없다면 찻잔의 기품은 떨어질 테지요.양지바른 곳에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않았지만 자신으로 인해 주위를 더욱 빛나게 하는 존재, 바로 김성근감독입니다.

지난 11월 12일 LG 구리구장에서 10여년만에 재회한 김감독은 이번엔 '들국화론'을 펴더군요.자신이 거친 들국화라면 삼성의 김응룡감독은 화려한 장미라는 것입니다.닮지는 않았지만 서로가 없으면 허전한 장미와 들국화처럼 그렇게 세상은 조화(調和)를 이룬다는 말이었지요.

김감독의 절제된 자기평가는 희대의 명승부로 평가받는 이번 한국시리즈에서 또한번 입증됐습니다.도대체 김성근감독과 LG가 아니었다면 이런 명승부가 나올 수 있었을까요.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시리즈는 기실 김성근감독의 아름답고 처절한 패배로 완성됐습니다.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의 한을 푼 삼성의 환희(歡喜)는 카운터파트 LG의 멋진 열연으로 더욱 높아진 것입니다.

김성근감독,경기가 끝난후 그이에겐 진정한 승리자라는 헌사(獻辭)가 받쳐졌습니다.적장인 김응룡감독마저 "무슨 신(神)하고 싸우는것 같았다.투수교체나 대타기용이 기가 막혔다"며 아낌없는 상찬(賞讚)을 보냈습니다.

페넌트레이스 4위팀 LG가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에서 현대와 기아를 연파하며 한국시리즈에 오른 것부터 대이변이었습니다.객관적인 전력도 뒤지고 성한 선수가 거의 없는 부상병동.7게임이나 치러 체력도 바닥이었지요.

상대는 자타가 공인하는 최강 삼성.4연승으로 삼성이 끝낼 것이라고 점치는 이들도 많았습니다.그러나 LG는 놀랄만한 투혼과 집중력으로 달려들었고 운명의 6차전에서 길이 남을 명승부를 펼쳤습니다.

  

김성근감독에게 짐짓 장난스럽게 신(神)으로 승격한(?) 소감을 물어보았습니다.

“허허~무슨 그런 소릴.거꾸로 얘기하면 내가 김응룡이라는 산을 한번 넘고 싶었는데 못넘은게지.김응룡감독은 역시 대단한 승부사야.우승은 못했지만 후회는 없어요.결과보다 프로세스(과정)도 중요한거지.시즌전에 선수들에게 이런 말을 했어요.4강까지는 어떡하든 내가 하겠다.그이상은 너희들 힘으로 해야한다.그것을 해줬으니 대만족이야.”

이번 시즌 김성근감독은 기자들로부터 “달라졌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관리야구의 신봉자로 오직 이기는 경기에 집착한다는 평가가 있었습니다. 선수들을 혹사(酷使)시킨다는 비판도 있었지요.

하지만 그이의 관리야구는 분명한 철학이 있었습니다.선수혹사도 구태여 변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이에게 혹사(?)당한 많은 선수들이 김감독을 존경하고 있으니까요.

어쨌든 올해 김감독은 선수들에게 맡기는 선굵은 야구를 선보였습니다.하지만 관리야구를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그 주체가 코치와 선수들로 바뀌었을뿐이죠.지난해까지 그이는 모든 것을 자신의 판단으로 진행했지만 올해는 선수들이 데이타를 이해하고 직접 실행토록 했습니다.

“데이타의 깊이는 무궁무진한거요.abc라는 철자가 단어로 조립되는 것처럼 여러개의 데이타가 다양한 조립이 가능하거든.기아전도 그렇고 현대전도 그렇고 내가 이긴게 아니라 데이타가 이긴 거지.”

김감독의 데이타야구에 대한 깊이는 상상을 초월합니다.예를 들면 이번 삼성전에서 그이는 스틸을 정규시즌의 데이타로 철저히 활용했습니다.정규리그 삼성전에서 성공한 16개의 스틸은 노아웃에서 2개, 1사에서 4개, 2사에서 10개가 성공됐습니다.여기에 당시 볼카운트까지 적용하면 100% 성공하는 타이밍이 나오는 것이죠.

그래서 김감독은 평소 “야구는 기억력(데이타)이다.겨울(동계훈련)엔 몸이고 봄부터 가을(정규시즌)까지는 머리가 책임진다”고 말하곤 합니다.

전력상 포스트시즌을 장담할 수 없었던만큼 심적 부담은 대단히 컸다고 털어놓았습니다.5월말부터 매스컴과의 접촉을 피하고 매일 밤 자료를 분석했습니다.자료를 분석하다보면 하얗게 밤을 지새우기가 일쑤였지요.술도 끊다시피했답니다.

“맥주 한잔이라도 먹으면 다음날 경기에서 순간포착이 느려요.우리 코치들도 적극 호응했지.시즌내내 두번이나 같이 술을 먹었을까.그것도 맥주 한두잔으로 끝냈지.”

이번 한국시리즈에서 김감독이 두고두고 후회되는 장면은 언제였을까요.“6차전 9회말 수비때 조인성에게 선두타자 김재걸을 조심해라 하면서 구체적인 주의를 빠뜨렸어요.2루타맞은게 너무 뼈아픈거야.”

마해영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았을 때는 어땠을까요.“사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어.기자들과 카메라에 안잡히려고 고개를 돌려서 몰랐을거요.”

김성근감독이 눈물을 흘렸다구요? 믿기지 않았지만 사실이었습니다.

김성근감독이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눈물을 흘린 것은 이번이 두 번째라고 합니다.첫번째는 충암고 지휘봉을 잡았던 25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날을 기억하는 소년의 가슴이 두근대기 시작했지요. 짜릿한 감동의 드라마를 어떻게 잊겠습니까.

고교야구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당시 황금사자기대회 8강전에서 충암은 한동화감독이 지휘하는 라이벌 신일과 맞붙었습니다.9회 1사까지 2-0으로 리드하면서 상대를 노히트노런으로 잡고 있었지요.그런데 박종훈과 양승호에게 연속 안타를 맞고 김남수에게 3점홈런을 맞고 말았습니다.허무한 역전패였습니다.

그날 경기는 선수들에게 인생이 달린 한판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대입특기자 혜택이 주어지는 4강을 눈앞에 두고 패한 선수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대성통곡(大聲痛哭)했습니다.

“이번 6차전 끝나고 똑같은 상황이었지.그때 주전포수였던 조범현(현 SK감독)이 어떡했는지 아시요? ‘난 이제 어떡하노.대학 어떻게 가노’하고 울부짖는거야.내 자신이 미웠어. 선수들이 그렇게 열심히 해줬는데 내가 마무리를 못해서 졌구나하는 생각에. 나도 울고 말았지...”(충암은 그해 마지막으로 출전한 봉황기대회에서 감격의 창단 첫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번 포스트시즌에서 김감독은 한가지 중요한 걸 깨달았다고 합니다.절대 서두르면 안된다는 것이죠.

“참 희한하더구만. 마음을 느긋하게 가라앉히니까 상대 움직임이 읽혀지는거야.경기를 쉽게 할수밖에.예전엔 남보고 왜 저렇게하나 안달복달했는데 내가 변하니까 다 바뀐다는걸 깨달은거야.”

야구인생 45년에도 여전히 배우고 있다는 김성근 감독.그의 불같은 끈기의 야구인생은 어디서 배태(胚胎)된 것일까요.

알려진대로 그이는 재일동포 2세입니다.부모님 고향은 경남 진양.1942년 교토에서 출생한 그이가 야구를 시작한 것은 교토의 시조중학교 2학년때.무작정 야구를 하고싶다고 찾아갔지만 문전박대만 당합니다.사정사정해서 유니폼은 입었지만 소질도 장래성도 없는 선수였습니다.

시험보고 들어간 가쯔라 고교에서도 야구는 계속했지만 여전히 별볼일 없는 선수였습니다.

“발이 어찌나 느렸던지 라이트앞에 안타를 치고도 1루에서 아웃되는거야.체육선생님을 찾아가 하소연했지.어떡하면 발이 빨라지겠느냐고.내리막길을 달리라고 하더군.그날밤부터 매일 집앞 언덕길을 하루도 안빠지고 50번씩 달렸지.버스를 타도 절대 앉지 않고 균형잡는 훈련을 한거야.”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김감독 등 6남매는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어른이 될때까지 쇠고기를 먹어본 기억이 없어요.” 새벽마다 우유배달로 아르바이트하면서 학업과 야구를 계속했습니다.배팅볼투수에 불과했던 그이가 가능성을 보인 것은 고3때 난카이(현 다이에)팀에서 동계훈련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프로선수들의 과학적인 훈련을 흉내내며 착실히 훈련한 덕에 기량이 일취월장(日就月將)했습니다.

그러던 중 59년 재일교포학생야구단으로 모국 방문을 하면서 새로운 기회를 맞게 됩니다.박영길 김응룡 유백만 백인천 등 기라성(綺羅星)같은 모국의 선수들과도 이때 조우(遭遇)했지요.한국은 62년 대만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 김성근 등 유망 동포선수의 대활약에 힘입어 최강 일본과 접전을 펼치는 등 선전을 펼칩니다.

 

▲ 62년 아시아선수권대회때 대만야구협회장의 환영을 받는 장면. 오른쪽부터 백인천 박현식 김성근 김응룡 김영조.

그이의 활약을 눈여겨본 야마모토 에이치로(현 일본야구협회장)가 이런 제의를 했답니다.“일본에 오는대로 사회인팀에 들어가면 1년안에 프로로 선발하겠다.” 그런데 한국에서 대표팀 환영식을 하니까 오라고한것이 운명의 갈림길이 됐습니다.

교통부(현 철도청)와 기업은행 등 신생팀이 “김성근이 없으면 창단안한다”고 조건을 단 것이죠.일본에서 갖은 차별로 불이익을 받았던 그이는 모국팀의 환대(歡待)에 한국으로 영구귀국을 결심합니다.

“가족과 헤어지면서 그제사 가족과 헤어진다는 것이 실감나는거야. 눈물로 트랩을 오르면서 결심했어.반드시 최고 투수가 되겠다고.”

62년부터 65년까지 왼손 투수 김성근의 활약은 대단했습니다.63년 11월 13일엔 대통령배실업야구대회에서 인천시청을 맞아 4구 1개만 허용하고 13탈삼진을 거두면서 노히트노런의 대기록도 세웠습니다. 64년의 경우 20승5패.그중 9연속 완투승이라는 초인적인 기록도 있습니다.

“비자관계로 10게임을 남겨두고 일본에 가야했지. 마저 뛰었으면 5승정도는 더 거뒀을텐데.좀 아쉽더군.”

 

▲ 쌍방울 감독시절 피칭시범을 보여주는 김감독의 폼이 예사롭지 않네요.^^

그이는 지금으로 말하면 선수겸 코치였습니다. 불과 28세의 나이에 1루코치를 겸하면서 상대 투수의 모션과 포수의 움직임, 손가락 동작 하나하나를 면밀히 연구하며 작전을 구사했지요.오늘날 데이터야구의 기본 소양을 일찌감치 닦은 셈입니다.

수많은 이들을 감동의 해일로 이끈 올해의 야구잔치도 이제 끝이 났습니다. 기나긴 시즌을 끝냈으니 휴식도 취할법 하건만 김감독은 이같은 예상을 깨끗이 저버리네요.

“2군 선수들 훈련계획을 체크하느라 정신이 없어요.그나마 11일 큰딸(미화)생일때 온 가족이 모여 식사라도 한게 다행이었지.”

올해 12월 13일이 환갑이지만 잔치는 애저녁에 글렀습니다.오키나와에서 전지훈련에 참여해야하니까요.

“생일? 프로야구하면서 제대로 치러본 기억이 없어요.야구장에 있으면 그게 생일잔치지 뭐.허허허…”

다이아몬드의 제갈량 김성근감독. 소년은 26년전 그이가 얼마나 한 소년의 가슴에 기쁨을 안겨주었는지 구태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말만은 하고 싶군요. 스포츠서울 닷컴 게시판에 오른 한 야구팬의 말처럼 2002시즌은 당신이 있어 정말 행복했다구요.

“골수 삼성팬으로서 당신은 적장이지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감동이었습니다.경기의 고비고비,게임의 갈피갈피마다 스며있는 당신의 마음과 선수들의 땀을 보았습니다.당신은 진정한 승자이십니다.칼끝에 앉은듯한 승부처에서도 담담한 모습으로 데이터를 뒤적이고 전략을 다하며 하늘의 결과를 기다리는 모습, 오래 기억할 것입니다.지금도 마해영의 끝내기가 터진후 망연히 응시하는 눈길이 아프게 다가옵니다.돌아보면 흘렀을 물같은 야구, 당신의 어깨너머로 흐르는 참으로 많은 세월이 떠올랐습니다.내년에도 멋진 승부의 세계를, 당신이 가진 멋진 승부사의 기질을 보여주십시오.”

 

<글 사진=스포츠서울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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