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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영토 연구- 제49~53부

글쓴이 : 김태형 날짜 : 2025-04-19 (토) 20:06:43

1. 백제의 8대 성씨의 분포

 

당나라 때 이연수(李延壽)가 지은 <북사>에 의하면, "백제 나라에는 많은 성씨로 8가지가 있는데 사씨, 연씨, 협씨, 해씨, 진씨, 국씨, 목씨, 묘씨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 성씨들의 분포 지역을 보면 사씨(沙氏)는 하남성과 안휘성에 많고, 연씨(燕氏)는 산서성 대동(大同)과 하북성 북경(北京)근처에 많고, 협씨(協氏)는 현재의 발해만 일대, 해씨(解氏)는 산서성 임분현에, 진씨(眞氏)는 하북성 서남부 그리고 회개현 동남부에, 국씨(國氏)는 강소성 서남부에, 목씨(木氏)는 절강성 임안과 강소성 의흥일대에, 묘씨(苗氏)는 강소성 금화를 비롯 산동성, 감숙성, 하남성 지역에 집중 분포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성씨는 부여씨라고만 되어있으나 부여씨는 절강성 호주(湖州) 일대에 모여 있다.

 

한국 역사학계의 주장에 따르면 충남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인 사비성이 있던 곳이다. 그리고 백제의 왕족은 부여씨라고 한다. 그런데 왜 절강성에 부여씨들이 살고 있을까 의문이 간다. 절강성은 한때 백제의 강역이다가 신라에게 빼앗긴 곳이다. 그런 이유에서 백제의 부여씨가 절강성 호주 일대에 살고있는 것으로 믿는다.

 

백제가 한반도에 있었다는 반도사학이나 식민사학의 주장대로라면 한반도의 충청도, 전라도 일대에 이들 8대 성씨가 많이 살고 있어야 한다. ‘1985년 대한민국 경제기획원의 인구조사 통계에 의하면, ()씨가 1,511, ()씨가 978, ()씨가 104명이라 한다.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자료는 진씨 45, 국씨 37, 연씨 20, 묘씨 21, 사씨 26, 그리고 해씨 146명을 기록하고 있다. 백제가 망한지 1,355년이 지난 지금 이렇게 적은 숫자의 성씨를 어떻게 백제의 대성(大姓)이라 할 수 있겠는가. 백제의 대성 8씨족의 분포로 보더라도 한반도에 백제가 위치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역사학계의 통설인 백제 한강 유역설이나 충남 부여 사비성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왜 한반도에는 이들 성씨가 많지 않은지? 앞에서 설명한 백제 8대 성씨의 분포 지역을 지도에 나타내면 다음 <그림 16>과 같다.

 



<그림 16>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백제의 대성씨로 알려진 사, , , , , , , 묘씨는 주로 산서성, 산동성(묘씨), 하북성, 하남성(부씨 일부), 안휘성, 강소성, 절강성 등에 분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에 백제가 있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에서


<백제의 영토 연구> - 50

2. 망국의 비운을 맞은 의자왕

 

31대 의자왕(義慈王)30대 무왕의 맏아들로 용맹하고 담력과 결단성이 있는 사람이였다. 의자왕 3(643) 겨울 11월에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의 당항성(黨項城)을 빼앗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충신 성충(成忠)의 간언을 듣지 않고 주위의 간사한 간신배들의 이간질과 자중지난(自中之亂)으로 백제는 망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BC213년에 시작하여 660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게 망할 때까지 873년간 지나 대륙을 주름잡던 자랑스러운 동이배달한민족 조상이 세운 한국과 배달국과 단군조선의 후예였다.

의자왕에 관한 기록이 <구당서>에 보인다. “의자[]은 어버이를 섬김에 효행으로서 행함이 널리 알려지고 형제 사이에 우애가 돈독하여 당시 사람들은 해동 증자(曾子민자(閔子)’라고 불렀다. 경사(京師)에 와서 몇일만에 죽었다고 적고 있다.

<신당서>의 기록을 살펴보자. “의자[]은 어버이를 섬김에 효행을 다하고 형제 사이에 우애가 깊어 당시에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리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도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가 있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해동의 증자라고 불렀다고 적고 있다. 이 세 문헌사료의 기록으로 볼 때 의자왕은 부모에게 효행이 지극하고 형제애가 남다른 왕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의자왕 3(643) 11월의 기사에 “[백제]왕은 고구려와 화친하여 신라의 변방인 당항성을 빼앗아 신라에서 당나라로 입조하는 길을 막고자 하여 드디어 군사를 내어 치니 신라 선덕왕 덕만이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구원을 청하므로 [백제]왕은 이 말을 듣고 군사를 철수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항성에 관한 신라의 기록을 보자. 신라 제20대 자비마립간 11(468) “가을 9월에 열다섯 살 이상 된 하슬라 사람을 징발하여 성()을 이하(泥河)-이하는 일명 이천(泥川)이라 한다-에 쌓았다라고 적고 있는데 이하는 하남성과 안휘성 사이로 하남성에 있는 하천이다.




이하 바로위에 항성이 있어 이 항성이 이때 쌓은 성()으로 이해된다. 이 당항성을 백제에게 빼앗김으로써 김춘추가 이민족인 당나라 고종 이치(李治)에게 당나라로 들어오는 당항성을 고구려와 백제에게 빼앗겨 더 이상 당나라에 들어올 수 없으니 신라와 당이 연합하여 이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자는 민족상잔의 불씨가 바로 이 당항성 때문으로 보인다.

살펴본 내용을 종합하면 섬서성 서안(西安)에 도읍한 당나라에 강소성에 위치한 신라가 입조하는 통로에 있는 당항성(黨項城)을 백제에게 빼앗기게 되자 선덕왕은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한 것으로 정리된다. 당항성은 선덕왕이 당나라에 구원을 청할 정도의 요충지로 안휘성과 하남성 경계에 있는 지역이다. 이하와 당항성의 위치를 지도에 나타내면 다음 <그림 17>과 같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으로

 

<백제의 영토 연구> - 51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망한 해의 의자왕 20(660)의 기록을 보자.

또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가 이미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을 지났다는 말을 듣고 왕은 장군 계백(階伯)을 보내어 결사대 5천 명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에 나가서 신라군사와 싸우게 했다. 네 번 접전하여 네 번 다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서 마침내 패전하여 계백은 전사했다.

이에 백제군은 군사를 합하여 웅진의 어귀를 막고 강가에 군사를 둔쳤으나, 소방정이 왼쪽 강가로 나가서 산에 올라 진을 치고 싸우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했다. 당나라 군사는 조수를 이용하여 많은 배들이 서로 잇따라 나아가며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는데, 소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바로 그 도성으로 쳐들어가서 30리쯤 되는 곳에서 머물렀다. 우리 군사는 있는 군사를 다 내어 막았으나 또 패전하여 죽은 사람이 1만여 명이나 되었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당나라는 백강을 지나고 신라는 탄현을 지났다고 설명하고 있다. 전투가 일어나고 있는 곳은 백제의 웅진이 위치한 호북성이다.

당나라는 섬서성 서안에서 오는 것이니 다음 <그림 18>처럼 동북지역에서 백강(백수, 백하)을 타고 내려오며 신라는 안휘성에서 침략하니 웅진의 남서쪽에 있는 탄현으로 들어온 것이다.

백수(白水)는 호북성 조양현(棗陽縣) 동쪽 60리에 있는 대부산(大阜山)에서 출원한다. 서남으로 흘러 곤수(昆水)와 합류하여 곤하(滾河)가 된다. 또 진수(濜水)와 만난다. 양양현 경계에 이르러 서쪽으로 흘러 당백하(唐白河)로 진입한다.

<방여기요>에서 백수가 곤수(昆水)와 합류하여 곤하(滾河)가 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백하(白河)는 옛 육수(淯水). 원래 하남성 숭현(嵩縣) 서남의 공리산(攻離山)에서 발원한다. 동남으로 흘러 남소현(南召縣)에 이른다. 남쪽에서 굽어 흘러서 남양(南陽)과 신야(新野)를 경유하여 호북성 양양현(襄陽縣)에서 당하(唐河))와 만나 당백하(唐白河)라 한다. 한수(漢水)로 진입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가 쳐들어오는 탄현을 추적해 보도록 하자. 유감스럽게도 탄현(炭峴)이란 지명은 없으나 탄산만(炭山灣)이란 지명이 나온다. “탄산만은 호북성 양신현(陽新縣)에 있다. 석탄이 생산된다라고 적고 있다.




<그림 18>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탄산만 즉 탄현(炭峴)이 있는 양신은 웅진의 동남 방향으로 아주 가까운 지역이다. ()석탄이란 글자이고 현()이란 ’, ‘고개’, ‘이란 의미의 글자이다.

그런데 <한한대자전>에 다음과 같은 뜻풀이가 있다. “()은 호북성 양양(襄陽)에 있는 산.”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자료비판이 요구되는 곳이다. 양양(襄陽)이 아니라 양신(陽新)이 되어야 한다. 지나인들이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조작한 것으로 믿는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당나라 군사는 섬서성에서 오고 신라 군사는 안휘성에서 와 양면으로 공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상 천지에 두 나라가 연합하여 한 지역을 공격하는데 한 곳에 두 군사가 합하여 한쪽으로만 공격하는 전법은 없다.

백제의 의자왕은 이렇게 북서(北西)로부터 당나라가 동남으로부터 신라가 공수동맹하여 호북성 무한에 있던 백제의 웅진성을 공략(攻略)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에서

 

<백제의 영토 연구> - 52

VI. 백제는 대륙에서 개국·패망

 

1. 백제부흥운동의 임존성 위치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백제 부흥운동은 임존성任存城)과 주류성(周留城)을 거점으로 하고 있다. 먼저 주류성의 위치에 관한 한국사학계의 통설은 없고 다양한 견해들만 분분할 따름이다. 첫째, 충남 서천군 한상면 부근 둘째, 전북 정읍시 고부면 두승산성 셋째, 전북 부안군 상서면 위금암산성 넷째, 충남 서천군 한산면 건지산성 다섯째, 충남 연기군 금의면 일대 등 다섯 곳의 하나로 추정하고 있다.

660년 백제가 패망한 후 부흥군이 661년부터 6639월까지 약 3년에 걸쳐 당군(唐軍)에 저항했다는 주류성의 정확한 위치를 밝히지 못한 것은 백제를 한반도에 설정해놓고 가공의 장소를 찾다보니 근거없는 잡설들만 난무한 것으로 한반도에 백제가 있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임존성의 위치에 대해서 임존성은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이라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앞에서 함께 살펴본 바와 같이 백제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음으로 백제의 부흥운동의 거점이 되었던 주류성이나 임존성을 충남이나 전북에서 찾는 일은 헛수고임을 전제(前提)하면서 주류성과 임존성의 위치를 추적해 보도록 하자.

주류성을 기록하고 있는 1차사료와 문헌자료는 약 13종이며 임존성을 기술하고 있는 문헌사료는 약 14종에 이른다. 이밖에 백제 부흥군에 대한 기록이 <흑치상지묘지명(黑齒常之墓誌銘)>, <부여융묘지명(扶餘隆墓誌銘)>, <당유인원기공비(唐劉仁願紀功碑)> 등에 간략하게나마 나타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백제가 패망하자 장수 흑치상지(黑齒常之), 복신(福信), 승려 도침(道琛) 등을 중심으로 주류성을 거점으로 하여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扶餘豐)을 왕으로 삼고 백제부흥운동을 감행하게 된다.

<구당서><자치통감>승려 도침과 장수 복신은 사람들을 모아 주류성에 근거지로 삼고 왜국에서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세웠으며라고 기술하고 있으나 주류성의 위치에 대한 언급이 없다. 오직 <大淸一統志(대청일통지)><欽定滿洲源流考(흠정만주원류고)>에서만 주류성은 전주(全州) 서쪽에 있다라고 적고 있다.

전주란 지명에 대해 전현조(全縣條)를 보라. 금나라가 설치했는데 지금의 열하성 경내 객나심 땅이다.”라고 하였으며 전현조에는 한나라가 영릉현을 두었다. 수나라가 고쳐 상원현을 두었으며. 오대시 진()나라 사마씨가 변경하여 청상이라 했고 현을 전주로 하였다. 원나라가 변경하여 전주로라 하였다. 명나라 초기 전주부라 하였다. ...청나라 때는 광서성 계림부에 속했다. 중화민국시() 고쳐 주를 현으로 했다. 원래대로 광서성 계림도에 속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 광서성은 백제의 영토인 것은 사실이나 방향이 잘못되었다. 백제의 웅진성은 호북성 무한에 그리고 사비성은 안휘성 청양에 위치하였으니 전주 동북쪽이라 설명해야 옳다. 또한 금나라 시기에 설치한 전주는 열하성인 지금의 내몽고에 위치한 곳이니 역시 당시 백제의 영토와는 전혀 다른 지역으로 믿을 수 없다. 논자는 주류성이 호북성 웅진성이 있던 오늘날의 무한 지역의 한 곳이라고 믿는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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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지명들이 대륙에있는 지명들을 사용하는것을보면 어찌보면 한반도가 인류최초의 원형지역이였는지도 모릅니다,

춘천 중도 선사유적지에는 마을을 형성하였던것과 공주석장리 주거문화와 대전에도 대규모 주거문화지가 있으며 논농사를 지어먹은 흔적등을보면 대륙보다 앞선 주거문화가 아니겠습니까?

대륙에도 주거문화유적지가 있습니까? 홍산문화가 더 오래되었는지도 춘천과 비교 분석할일이 아니겠습니까?

 

<백제의 영토 연구> - 53

1차사료인 <구당서>에 임존성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왕자 부여충승(扶餘忠勝)과 충지(忠志) 등은 그 무리를 거느리고 왜인들, 탐라국 사신과 함께 일시에 모두 항복했다. 백제의 여러 성()들이 모두 반항심을 버리고 순종하였으나 백제의 장수 지수신(遲受信)만은 임존성에 웅거하면서 항복하지 않았다. ... 임존성이 빼앗기자 지수신은 그의 처와 자식을 두고 도망하여 고구려에 투항하니 이에 백제의 남은 무리들이 모두 평정되었다.”

라고 적고 있으며 <신당서>에서도 같은 내용이 보인다. 함께 살펴본 바와 같이 1차사료인 <구당서><신당서>에서는 임존성의 위치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치통감>

임존성은 백제의 서부 임존산에 있다. 자치통감고이(資治通鑑考異)에 이르길 임효성(任孝城)인데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지금은 그 성이 여럿이란 말이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자치통감고이>백제의 승려 도침 등이 물러나 임존성을 지키며 웅거했다 (임존성은 실록에 혹시 임효성이라 하나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지금은 여럿이란 말이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인용문에서 언급한 임존산’, ‘임존성’, ‘임효성의 정확한 위치를 밝혀주는 문헌기록이 없을뿐더러 현대지도에도 이들 지명이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임존성을 찾을 수 있는 단서가 보인다.

임성현은 한나라가 두었다. 후한 때는 임성국을 두어 관리했다. ()나라 시기 국을 폐지했다. 남조 송 시기 현을 폐지했다. 후위가 다시 두었으며 임성군에서 다스리게 했다. 북제가 군을 고쳐 고평이라 했다. 수나라가 군을 폐지하고 현으로 했다. 명나라가 생략하고 현을 제령주(濟寧州)에 속하게 했다. 즉 지금의 산동성 제령현(濟寧縣) 관할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어 임성현(任城縣), 임성국, 임성군 등 여러 이름으로 바뀌었으나 임성(任城)의 위치는 산동성 제령으로 백제 제2의 도읍지였던 한성(漢城)인 제령(濟寧)임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을 살펴보자. “()은 주나라 국명으로 풍성(風姓)이다. 즉 지금의 산동성 제령현이다라고 적고 있다. <중국역사지명대사전>에도 임성현, 임성군, 임성국의 위치를 모두 산동성 제령으로 기록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에서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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