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통사(東北通史)를 중심으로-
5. 동북사의 범위와 시대 구분
둘째, 제3절에서 간단히 밝혔지만 고구려의 환도성을 침략한 내용을 문헌에 근거하여 밝혀보자. 관구검이 환도성을 침략한 때인 245년의 고구려의 환도성은 산서성 현재의 화염산(火焰山)에 있던 환도성이다.
<신당서> ‘동이전’의 기록에, "마자수는 말갈의 백산에서 시작되며 색이 오리의 머리 색깔과 같아 압록수(압록강)라 부른다. 국내성 서쪽으로 흘러 염난수와 합해지고 서남쪽으로 안시(성)에 이르러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평양성은 압록의 동남쪽에 있어 큰 배로 사람을 건내고 믿음직한 참호역할을 한다"라고 하여 이곳 안시성이 있던 곳에 환도성이 함께 있었음을 <그림 8>에서 참고하기 바란다.

<태평환우기>에 의하면, 고구려와 위나라 관구검과 싸운곳은 비류수(沸流水)와 문수(汶水)라 하는데 비류수는 산서성 압록수 서쪽에서 발원하여 황하로 진입하는 하천이고 문수는 산동성 태안부 서남쪽으로 흐르는 강이다.
<삼국지>의 기록대로, “옥저땅 1천리를 지나서… 동천열제는 밀우등과 함께 남갈사로 피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옥저는 갈사국이나 동부여라 부르던 곳으로 문수가 위치한 곳이며 황하를 사이에 둔 하북성과 산동성 일대를 지칭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고구려의 동천열제와 관구검이 싸운 지역은 산서성 남서부, 하북성 남부, 그리고 산동성 서북부이다.
셋째, “공손강이 대방군을 개척하여 설치한 일”에 관하여 김육불의 주장처럼 대방군이 동북지역이라고 하는 열하, 요녕, 길림, 흑룡강성에 위치하였는지를 문헌사료에 의거 밝혀보도록 하자.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는 대방현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후위가 두었다. 대방군조를 보라”고 하였다. 대방군조를 살펴보자. “한나라가 대방현을 두었다. 후한말에 공손강이 낙랑군 남부를 나누어 대방군 땅이라 하였다. 대수로 인한 이름이다. ...후위가 다시 대방현이라 하였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晉書(진서)>에 “대방군은 공손도가 두었다”고 하였다. 공손강과 공손도의 서로 다른 이름이 기술되고 있다. 이들 관계를 먼저 정리해보자. 공손도(公孫度: ?-204)는 공손탁(公孫度)이라고도 하는데 도(度)를 탁으로 읽기도 하기 때문이다. 공손강은 공손도(탁)의 아들이다. 공손도라는 인물에 주목하면서 잠깐 고구려의 역사를 함께 상고해 보자.
“고구려 제9대 고국천 남무열제의 장자[동생]인 발기(發岐)가[는] 동생인 연우(延優)가 제10대 산상연우 황제가 된 것에 불만을 품고 황궁(환도성)을 포위하고 3일동안 격전을 하였으나 백성들이 발기를 돕지 않았다. 발기는 순나의 백성 3만명을 거느리고 요서(遼西) 전지역을 요동태수(한나라의 요동은 감숙성 난주) 공손도(탁)에게 넘겨주며 구원을 청하였다. 공손도(탁)는 발기의 투항을 받아 기뻐하며 정병 3만을 일으켜 고구려를 침입하여 환도성(丸都城: 산서성 화염산 말꼬리 부분)에 들어가 마을을 불질렀다. ...발기는 후회하고 비류강에서 자살하였다.”
인용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공손도가 요서에 있던 낙랑의 남부를 나누어 대방군이라 한 것은 고구려의 왕자인 발기가 형제간의 불화로 인하여 그 땅을 공손도에게 스스로 넘겨준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마광의 <資治通鑑(자치통감)>에 대방군의 위치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이 보인다. “대방현은 한나라 때 낙랑군에 속했다. 공손도가 대방군을 두었다. 두우(杜佑)가 말하기를 건안(建安: 196-200) 중에 공손강이 둔유(屯有)를 나누어 염현(鹽縣)이 있는 남쪽 거친 땅에 대방군을 두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염현의 위치를 알아보자. “염지는 산서성 해현 동쪽에 있다. 안읍현 남쪽이다. ...두우의 주(注)에 염(鹽), 염지(鹽池)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두우 때문에 대방군의 위치는 정확하게 밝혀진 것이다. 요동이라 하고 유주이면서 요서인 수양산이 위치한 산서성 남부 운성염지의 남쪽이 바로 대방군이었다. 이들 지명은 모두 당시 바다(海)라고 하는 황하와 인접한 지역이다. 압록수, 평양성, 환도성, 비류수, 패수, 대방군 등을 지도에 나타내면 다음 <그림 13>과 같다.
제5절에서 살펴본 내용을 종합하면 조선은 산서성 남부와 하내에 위치하였고, 동호는 부여와 고구려를 지나에서 지칭하는 말로 북부여는 산서성 북부 내몽고 지역이며, 대방군은 산서성 남서부에 위치하고, 관구검이 침략했다는 환도성은 안시성과 함께있던 환도산으로 지금의 화염산이며, 비류수는 압록수 서쪽에 위치하며 황하로 진입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조선과 고구려의 강토는 산서성 이었음을 고증한 것이다. 따라서 김육불이 주장한 동북지역인 열하, 요녕, 길림, 흑룡강성에는 이들 산과, 하천과, 지리지명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김육불의 주장은 허구임이 다시 입증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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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김육불의 역사왜곡 비판>-동북통사(東北通史)를 중심으로- 제28부
지금까지 내용을 종합하면 산서성 남부에 탁록(운성염지)이 위치했고 북연이 쌓았다는 연나라 장성의 기점인 조양은 고죽국인 산서성 남서부 영제현 남쪽에서 발원하여 황하로 들어가는 규수 지역으로 황하를 중심으로 이지역이 북연주(北燕州)였음을 알 수 있다.
산서성 서남쪽으로 섬서성에 위치한 조읍(朝邑)이 당시의 조양으로 보이며 하남성 서북부 황하변의 양평(陽平)이 당시의 영평[양평]인 것으로 판단된다. 조양에서 조읍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역사의 왜곡이라고 믿는다. 북연 장성은 반드시 북연의 영토였던 산서성 남부에서 찾아야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산서성 남부는 단군조선(동호)의 강토로 북연에게 빼앗긴 땅이다.
2) 탁록은 천연소금이 생산되는 운성염지(해지) 상원에 있다.
3) 이곳을 요동이라 칭한다.
4) 북연은 발해와 갈석 사이의 큰 고을로 남으로는 제와 조와 통하고 북으로는 호와 접한 곳으로 영토가 좌우로 길다란 곳이다. <그림 6> 참조
5) 조양은 지금의 규주이다.
6) 규수는 영지현(영제)에서 서남으로 흘러 황하로 들어간다.
7) 반천(규수)이 위치한 반현은 탁록현 서남 칠십리이다.
😎 황하를 사이에 두고 조양(조읍)은 섬서성에 양평은 하남성에 위치한다.
9) 진(秦)과 동호(東胡)를 막기위한 장성이다.
10) BC226년 10월에 진(秦)나라 정(政)이 북연의 도성인 계(薊: 산서성 남부 석성산 부근)을 격파하자 연왕이 동부여(갈사국)가 있는 동쪽으로 달아나 그곳을 점거하였으며 5년 후인 BC221년에 북연을 완전히 멸했다. <그림 10> 참조

11) 황하와 인접한 지역이다.
12) 고죽국에는 고죽성이 있던 영지(영제)와 수양산인 지금의 중조산이 있다.
13) 연나라 장성과 관련되어 온 우갈석산이 황하 가운데 위치한다.
14) 패수가 위치한 산서성 남부가 단군조선(변한)의 영토였고 연 장수 진개에게 빼앗긴 곳이다.
따라서 김육불이 주장하고 있는 동북지역인 열하, 요녕, 길림, 흑룡강성에는 북연, 북연주, 탁록, 규주, 반천, 천연염지(운성염지), 영제, 탁수 등의 하천과 지리지명 및 위에서 열거한 14가지가 존재하지 않음으로 허구임이 입증되었다.
진개의 단군조선 침략은 연나라 소왕(312-279BC) 시기의 사건으로 당시 만들었다는 연 장성의 정확한 위치를 지금까지 밝히지 못하고 약 2,316년 동안 논쟁이 되어왔다. 이제 논자가 연 장성의 위치를 문헌사료에 근거하여 밝힌다. 연 장성의 위치를 지도에 표시하면 다음 <그림 14>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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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김육불의 역사왜곡 비판>-동북통사(東北通史)를 중심으로- 제29부
7. 조선의 개척
“선사시대 한족(漢族) 다음으로 동북(東北) 지방에 들어온 것으로 상고할 수 있는 것은, 곧 기자(箕子)가 동쪽 조선(朝鮮)에 봉해졌다는 것이 그것이다”라고 김육불은 말하고 있다. 기자조선은 허구로 이미 밝힌 바 있으므로 부언하지 않겠다. 그리고 김육불이 언급하고 있는 조선은 단군조선과 위만조선으로 모두 산서성에 있었던 나라이다.
김육불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한서/지리지>를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낙랑군이 25현을 관할하는데, 조선이 으뜸이라고 하였고, 안사고(顏師古) 주(注)에 응소(應劭)의 견해를 인용하여 말하기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고 하였다.” 김육불이 인용하고 있는 이 같은 내용과 동북지방의 위치를 밝히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다. 전혀 관련이 없는 내용의 사료를 전시하듯 인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음의 인용문을 보자. “일본의 고고학자가 평양의 대동강 남쪽 강기슭에서 여러 해 발굴하여 얻은 한 대(漢代)의 유물 중에 ‘樂浪太守 朝鮮右尉’ 등이 쓰여진 봉니(封泥)와 ‘樂浪禮官’이 새겨진 와당(瓦當)이 있었는데, 모두 한(漢)나라의 낙랑군 소재를 증명할 수 있는 유물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김육불과 일본의 고고학자의 주장대로 낙랑군이 한반도 평양의 대동강 안쪽에 위치했었는지 확인해 보자.
<한서/지리지>와 <후한서>가 기록한 유주(幽州)에는 요서군을 포함하여 7개의 군이 있는데 상곡군, 북평군, 요동군, 현토군, 낙랑군, 그리고 어양군이다. 이들 7개 군은 모두 산서성 남부에 위치한 지명이다. 이곳이 바로 유주이며 따라서 낙랑군은 반드시 유주지역인 산서성 남부에 위치해야 한다.
제5절 <그림 12>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 낙랑군에는 조선현, 패수현, 루방현, 임패현이 있으며 이곳에 패수가 위치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낙랑군은 산서성 남부에 있었던 것으로 한반도 평양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7개군의 위치를 지도에 표시하면 아래 <그림 15>와 같다.
봉니(封泥)란 문서 같은 것을 끈으로 묶고 봉할 때에 사용한 진흙 덩어리를 말한다. 김육불이 인용한 것과 같이 진흙 덩어리 한 개와 기와장 한 개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한반도 평양의 대동강 일대가 낙랑군이라고 주장하였다.
미국 켄터키에서 AD135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히브루와 로마의 동전들이 땅속에서 발굴되었다. 로마의 동전들이 발굴되었다고 해서 켄터키가 로마의 영토였는지 묻는다. 1924년에는 미국 아리조나주에서 십자가들이 새겨진 로마의 유물들이 무덤에서 발굴된 바 있다. 로마 유물들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아리조나가 로마의 영토였는지 다시 묻는다. 1957년에 캘리포니아에서 오래된 명나라의 금덩어리가 발견되었다. 명나라의 것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미국 캘리포니아가 명나라의 강토였는지 또 묻고 싶다.
고고학이란 “인류의 과거의 물질적 유물을 취급하는 학문”으로 인류학의 한 분야이다. 인류학은 체질인류학, 문화인류학, 언어인류학 그리고 고고학의 분야로 나눈다. 논자는 고고학이란 민족의 이동사라고 보며 역사학의 보조학문이라고 믿는다.
역사는 오직 기록으로 하는 학문이다. 역사와 고고학은 전혀 별개의 학문인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역사의 대가라고 하는 김육불은 어찌하여 역사학과 고고학의 차이도 몰랐더란 말인가. 더욱이 진흙덩이와 기와장 한 장을 가지고 약 2,000년 동안 존속해 온 단군조선의 낙랑을 한반도에 함부로 비정한단 말이더냐.
낙랑은 김육불이 주장한 동북지방인 열하, 길림, 요녕, 흑룡강성 그리고 한반도도 아니다. “동북이 유주”란 산서성 황하가 흐르는 산서성 남부와 하내를 일컫는 것으로 수많은 1차사료와 문헌자료들이 기록하고 있다. 김육불은 여기서도 허구의 소설을 썻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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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cp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