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례직방씨(周禮職方氏)>에 기록된 구주에 대해서도 비교 검토해보기로 하자. <주례직방씨>는 ‘천하의 지도를 관리한 곳’으로 주나라 당시 서주(西周)의 도성인 섬서성 호경(서안)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방향을 나타내면서 9주를 다음과 같이 나누고 있다.
“동남은 양주(揚州), 남쪽은 형주(荊州), 황하의 남쪽은 예주(豫州), 동쪽은 청주(靑州), 황하의 동쪽은 연주(兗州), 서쪽은 옹주(雍州), 동북은 유주(幽州), 하내는 기주(冀州), 북쪽은 병주(幷州)라 부른다.”
라고 적고 있으며 동북이 유주이며 하내(河內)는 <상서/우공>의 기주처럼 그대로 기주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원래의 기주인 산서성 남부와 하내를 둘로 나누어 서부를 유주라 하고 동부는 전과같이 기주로 하였다는 것이다.
<여씨춘추>가 기술하고 있는 유주지역과 일치하고 있다. 다음 <그림 7>에서 당시 주나라의 도읍지인 호경(서안)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9주 중 동북지역인 유주의 위치를 가늠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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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天通志(봉천통지)>가 기록한 기주(冀州)의 허구성 연구 – 제19부
그림에서와 같이 유주인 동북지역이 산서성 남부임을 알 수 있다. <그림 3>의 유주지역과 일치하는 곳이다. <주례직방씨>의 유주와 기주도 지금의 하북성과 요녕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동북이 유주라는 기록은 <書蔡氏傳旁通(서채씨전방통)>, <通典(통전)>, <五禮通考(오례통고)>, <禮書綱目(예서강목)>, <周官集注(주관집주)>, <周禮纂訓(주례찬훈)>, <周禮述註(주례술주)>, <欽定周官義疏(흠정주관의소)>,
<周禮註疏刪翼(주례주소산익)>, <周禮全經釋原(주례전경석원)>, <周禮傳(주례전)>, <周禮集說(주례집설)>, <周禮訂義(주례정의)>, <周官總義(주관총의)>, <周禮詳解(주례상해)>, <周官新義(주관신의)>, <周禮註疏(주례주소)>,
<禹貢錐指(우공추지)>, <禹貢長箋(우공장전)>, <陳氏尙書詳解(진씨상서상해)>, <尙史(상사)>, <逸周書(일주서)>, <遼史(요사)>, <晉書(진서)>, <前漢書(전한서)>, <山東通志(산동통지)>, <畿輔通志(기보통지)>,
<欽定滿洲源流考(흠정만주원류고)>, <大淸一統志(대청일통지)>, <圖書編(도서편)>, <玉海(옥해)>, <群書考索(군서고색)>, <藝文類聚(예문유취)>, <玉芝堂談薈(옥지당담회)>, <春明夢餘錄(춘명몽여록)>, <唐開元占經(당개원점경)>,
<欽定授時通考(흠정수시통고)>, <讀書劄記(독서차기)>, <元朝典故編年考(원조전고편년고)>, <歷代帝王宅京記(역대제왕택경기)>, <春秋分記(춘추분기)>, <皇王大紀(황왕대기)>, <經稗(경패)>, <大淸一統志(대청일통지)>,
<十一經問對(십일경문대)>, <通典(통전)>, <書纂言(서찬언)> 등 모두 47종에 이르며 <중국역사지명대사전>, <중국고금지명대사전>, 그리고 <중국고대지명대사전>은 포함시키지 않은 숫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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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天通志(봉천통지)>가 기록한 기주(冀州)의 허구성 연구 – 제20부
기주, 유주, 요서, 동북 등이 언급된 시기는 춘추전국시기에서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에 이르는 때로 1928년경 오늘날의 하북성이란 이름이 생기기 훨씬 이전의 일이다.
또한 ‘동북삼성’이란 이름 역시 1938년경에 나타난 명칭으로 ‘동북’과 ‘동북삼성’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며 지리지명과 위치가 완전히 다른 곳이다.
동북과 동북삼성의 명칭 사용은 어림잡아 약 2,600년에서 1,270년의 시간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명나라와 청나라 그리고 중화민국을 거치면서 ‘동북지역인 산서성 남부’를 동북삼성인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과 하북성으로 지명을 옮기면서 ‘산서성 남부의 동북’을 ‘동북삼성의 동북’으로 지리지명과 역사를 왜곡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지금부터 김육불이 주장하고 있는 <봉천통지>의 기주에 대해서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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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天通志(봉천통지)>가 기록한 기주(冀州)의 허구성 연구 – 제21부
2. <봉천통지>의 기주
<奉天通志(봉천통지)>에 기주(冀州)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연혁1, 통부1 [우(虞), 하(夏), 상(商), 주(周), 연(燕), 진(秦), 한(漢), 후한(後漢)] 우, 하, 상 모두 유주(幽州)와 영주(營州) 두 지역을 다스렸다. 유주[일부는 하북성에 들어갔다], 영주[일부는 산동성에 들어갔다] <書經(서경)/虞書(우서)> 舜典(순전)에 12주가 시작되었다.
마융(馬融)이 말하기를 우(禹)가 수토를 평정하여 9주를 두었고 순(舜)은 연(燕), 제(齊) 지방이 너무 멀어 연을 나누어 유주를 두었으며, 제를 나누어 영주로 삼았다. 정강성(鄭康成)이 말하기를 순이 청주(靑州)는 바다를 건너야 하므로 제를 나누어 영주로 삼았고 기주(冀州)의 남북이 매우 멀어 연(燕) 이북을 나누어 유주로 삼았다.(손성연(孫星衍) <尙書今古文注疏(상서금고문주소)>)
<史記(사기)/夏本紀(하본기)>와 <史記正義(사기정의)>에는 순(舜)이 청주를 나누어 영주 요서와 요동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通典(통전)/州郡典(주군전)> [청주]에 순이 청주를 나누어 영주로 삼았고, 그 요동지역인 안동부(安東府)는 [우공]에서 청주의 지역에 해당한다. 또 <주군전/[안동부]>에는 순이 청주를 나누어 영주목으로 삼았고, 요수(遼水)의 동쪽에 해당한 곳이라 하였다.
<大明一統志(대명일통지)> [25]에 우공의 기주, 청주 두 주의 지역은, 순이 기주 동북을 나누어 유주로 삼았는데, 즉 지금의 광녕(廣寧) 서쪽 지역이다. 청주 동북은 영주로 삼았는데, 즉 지금의 광녕 동쪽 지역이다 라고 하였다.(<遼東志(요동지)>, <讀史方輿紀要(독사방여기요)> 모두 같다.)
<盛京疆域考(성경강역고)>에 우(禹)는 치수(治水)를 하고 공물을 책정하여 바치게 하였으며 9주를 다스렸다. 순이 즉위하고 처음 기주 동북 의무려(醫巫閭) 지역을 나누어 유주로 삼았다. 또 청주의 동북 요동 등을 나누어 영주로 삼았다고 하였다.
살펴보면 지금의 봉천성(奉天省)은 순 시기 유주, 영주, 두 주 지역이고, 앞의 책에서 이미 뚜렷이 증명하고 있다. 또한 명일통지의 해석을 가장 분명한 것으로 여겨 정론으로 삼을 수 있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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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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