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이유로는 지금의 하북성에는 백이숙제가 고사리를 캐먹었다는 수양산(首陽山)인 중조산(中條山)이 없다는 사실이다. 당시의 수양산(首陽山)은 현재의 중조산으로 산서성 남부에 있는 산이다. 하북성에 있다는 수양산을 중조산이라 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유주(幽州)에 속하는 영지(令支)에 있는 고죽성(孤竹城)은 백이숙제가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먹다 죽었다는 고죽국으로 산서성 남서쪽 황하(黃河) 근처에 있는 현재의 영제시(永濟市)이며, 영평(永平), 평주(平州), 노룡(盧龍),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유주(幽州), 갈석(碣石) 모두 산서성에 있던 지명들이다.
인간이 지명은 옮길 수 있지만 유수(濡水)나 중조산(中條山)같은 하천(河川)과 산(山), 즉 자연지형물 그 자체를 옮기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산서성이 고죽국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고죽국, 수양산 그리고 유수의 위치를 다음 <그림 5>에서 참고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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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압록수 위치 연구 – 제15부
2. 고죽국은 고구려의 영토
수(隋: 581-618)나라 양제(煬帝) 밑에서 황문시랑(黃門侍郞)이란 벼슬을 한 사람이 배구(裵矩: 547-627)이다. 배구는 하동군(河東郡) 문희현(聞喜縣) 사람으로 수양제에게 고구려의 정벌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사람이였다.
하동 문희현이 출신지라 산서성에 대한 역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하동인 산서성에 있던 고구려의 영토가 원래는 백이숙제의 나라인 고죽국(孤竹國)이라고 밝힌 것으로 보인다.
<隋書(수서)>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배구가 앞서 예를 들어 말하기를, 고구려는 본시 고죽국인데 주(周)나라가 여기에 기자(箕子)를 봉(封)하였고 한(漢)에 이르러 3군으로 나누었으며 진(晉)대에 요동을 통솔하였다.”라고 양제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의 영토가 전에는 고죽국 이였다는 중대한 사실을 밝힌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舊唐書(구당서)>와 <新唐書(신당서)>에도 똑같이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隋書(수서)>, <舊唐書(구당서)>, <新唐書(신당서)>의 기록을 정리하면 고죽국이 고구려의 영토였으므로 오늘날의 산서성 남서부가 고구려의 영토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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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압록수 위치 연구 – 제16부
고구려는 우(禹)가 구주(九州)로 나눌 때에 기주(冀州)땅에 속했으며 주(周)나라 때에는 기자(箕子)의 나라가 되었고 한(漢)나라의 현토군(玄菟郡)이다. 요동에 있었으며 평양성에 도읍했다. 라고 <宋史(송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고려의 본래 이름은 고구려이다. 우(禹)가 구주(九州)로 나눌 때에 기주(冀州)땅에 속했고 주(周)나라 때에는 기자(箕子)의 나라였으며 한(漢)나라의 현토군이다. 요동에 있었는데 부여의 별종으로 평양성에 도읍했다. 한나라와 위(魏)나라 이래로 항상 직공하면서도 자주 변방을 침략하기도 하였다. 수양제는 두[네] 번이나 출병하였고 당 태종은 친히 정벌하였으나 모두 이기지 못하였다.”
라고 하여 고구려는 기주땅에 속했고 평양에 도읍했는데 수나라가 두[네]번 그리고 당태종이 직접 정벌했으나 이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禹)가 나눈 구주의 하나인 기주땅이 요동(遼東)이고 이 기주땅에 고구려와 평양성이 위치했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그렇다면 우(禹)가 나눈 기주(冀州)가 어디였는지를 확인하면 당시의 고구려 영토의 위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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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압록수 위치 연구 – 제17부
고대(古代)에 나타난 구주설(九州說)은 <상서(尙書)/우공(禹貢)>, <여씨춘추(呂氏春秋)/유시람(有始覽)>, 그리고 <회남자(淮南子)/지형훈(墬形訓)>이다. <상서/우공>의 구주는 기주(冀州), 연주(兗州), 청주(靑州), 서주(徐州), 양주(揚州), 형주(荊州), 예주(豫州), 량주(梁州), 옹주(雍州)이다. <상서>에는 ‘유주(幽州)’가 없으며 ‘기주(冀州)’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禹)는 땅을 나누고 산에 이르러 나무를 베고 높은 산과 큰 강에 제사지냈다. 기주는 호구산(壺口山)에서 시작하여 양산(梁山)과 기산(岐山)까지 다스렸고, 태원(太原)땅을 닦고 악산(岳山) 남쪽 기슭에 이르렀으며 담회(覃懷)땅의 일을 마치고 장수(漳水)가 가로지르는 곳에 까지 이르렀다.
그곳 흙은 희고 부드러웠고 부세(賦稅)는 일 이등이 섞였고 밭은 오등 정도였다. 항수(恒水)와 위수(衛水)가 잘 다스려지자 대륙 호숫가는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섬나라 오랑캐들은 여러 가지 옷을 바쳐왔다. 그들은 갈석산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黃河)로 들어왔다.”고 하였다.
<상서/우공>의 기주에 나타난 지명들인 태원, 호구산, 양산, 장수, 악산, 항수 등은 산서성에 있는 지명들이고, 기산은 섬서성과 산서성에 있는 지명이며, 담회와 위수는 황하북부 하남성 일명 하내(河內)에 있는, 산서성과의 경계에 있는 지명이다.
또한 당(唐)나라의 지리서인 <元和郡縣圖志(원화군현도지)>에서도 ‘하동지방이 기주’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기주는 산서성과 황하북부 하남성 일대를 지칭하고 있음이 분명하고 기주땅에 고구려와 평양성이 있다 하였으므로 기주땅인 이곳 산서성이 고구려의 영토인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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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압록수 위치 연구 – 제18부
전국시대인 BC239년에 지었다는 <呂氏春秋(여씨춘추)/有始覽(유시람)>은 구주(九州)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황하와 한수(漢水) 사이로 예주(豫州)이며 주(周)국이다. 황하의 양쪽 사이로 기주(冀州)이며 진(晉)국이다. 황하와 제수(濟水) 사이로 연주(兗州)이며 위(衛)국이다. 동쪽으로 청주(靑州)이며 제(齊)국이다.
사수(泗水)가로 서주(徐州)이며 노(魯)국이다. 동남으로 양주(揚州)이며 월(越)국이다. 남방으로 형주(荊州)이며 초(楚)국이다. 서방으로 옹주(雍州)이며 진(秦)국이다. 북방으로 유주(幽州)이며 연(燕)국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하남성 낙양에서 동서남북의 방향으로 구주를 정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본문에서 “황하의 양쪽사이로 기주”란 경도 110도와 위도 35도에서 황하가 꺾이는 지점으로 세로로 흐르는 황하 우측과 가로로 흐르는 황하 위쪽인 산서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산서성이 ‘ㄴ’ 자처럼 황하로 둘러싸여 황하의 양쪽사이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산서성이 하동지방이며 앞의 <원화군현도지>의 기록대로 ‘하동지방이 기주’임으로 결국 기주가 산서성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요약하면 <呂氏春秋(여씨춘추)/有始覽(유시람)>에서 말하는 기주는 산서성을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하북성이나 요녕성은 기주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황하(黃河)와 인접하여 황하가 꺾이는 황하의 양쪽 사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림 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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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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