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고죽국은 유주에 위치
1. 유주에 요서(군)이 있고
<漢書(한서)/地理志(지리지)>와 <後漢書(후한서)>가 기록한 유주(幽州)에는 요서군을 포함하여 7개의 군이 있는데 상곡군, 북평군, 요동군, 현토군, 낙랑군, 그리고 어양군이다. 이들 7개 군은 모두 산서성 남부에 위치한 지명이다.
이곳이 바로 유주이며 따라서 낙랑군은 반드시 유주지역인 산서성 남부에 위치해야 한다. 낙랑군은 산서성 남부에 있었던 것으로 한반도 평양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요서군에는 14개의 현이 있는데 저려현, 해양현, 신안평현, 영지현, 비여현, 빈종현(賓從縣), 유성현(柳城縣), 교려현, 양락현, 호소현, 도하현, 문성현(文成縣), 임유현, 누현이다. 빈종현과 유성현은 섬서성에 있는 지명이고 문성현은 하남성에 있는 지명이다. 이들 세 개의 현을 제외한 11개의 현은 모두 산서성에 있던 지명들이다.
낙랑군에는 25개의 현이 있는데 조선현(朝鮮縣), 남감현, 패수현(浿水縣), 함자현(含資縣), 점제현, 수성현, 증지현, 대방현, 사망현, 해명현, 열구현, 장잠현, 둔유현, 소명현, 누방현, 제해현, 혼미현, 탄열현, 동이현(東𦖮縣), 불이현, 잠태현, 화려현, 사두매현, 전막현, 부조현이다. 동이현의 위치는 추적이 불가능하지만 대부분은 산서성 남부에 위치한 지명들이다.
요동군에는 18개의 현이 있다. 양평현, 신창현, 무려현, 망평현, 방현, 후성현, 요수현, 요양현, 험독현(險瀆縣), 거취현, 거현현, 안시현, 무차현, 평곽현, 서안평현, 문현, 반한현, 답시현 등이 그것이다.
요동군, 요서군, 낙랑군에 모두 57개의 현이 있다고 <한서/지리지>가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대륙의 지명들을 기록하고 있는 <중국역사지명대사전>, <중국고금지명대사전>, <중국고대지명대사전> 어디에도 57개의 지명들 중 단 한 개라도 오늘날의 하북성, 요녕성, 그리고 한반도에 있었다고 기록된 곳은 없다.
낙랑군, 요서군, 요동군이 한국사학계의 주장처럼 하북성이나 요녕성이나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는 방증(傍證)이다. 7개군의 위치를 지도에 표시하면 다음 <그림 7>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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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의 강역 연구> - 제18부
III. 고죽국은 유주에 위치
1. 유주에 요서(군)이 있고
반고의 <漢書(한서)/地理志(지리지)」> “요서군(遼西郡)은 진(秦)나라 때 설치한 것으로 유주(幽州)에 속하며 영지에 고죽성(孤竹城)이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범엽의 <後漢書(후한서)>도 “요서군 영지현: 영지에 고죽성이 있으며 백이숙제의 나라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허신의 <설문해자>는 “수양산은 요서에 있다”라고 적고 있다. 다음은 배인의 <사기집해>의 기록이다. “집해에서 마융이 말하기를: 수양산은 하동(河東) 지방의 포판(蒲坂)에 있는 화산(華山)의 북쪽에 있고 황하가 꺾여 흐르는 곳이다.” 여기서의 華山은 산서성(山西省) 황하 굴곡지점 남서쪽으로 섬서성(陝西省)에 있는 산이다.
현재 발행되고 있는 모든 대륙지도뿐만 아니라 대청광여도에도 이 華山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中國古今地名大辭典(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도 “포판현은 옛날 순임금의 도읍지이다. 전국시대 때 위나라 포반읍이다. 한나라 때 포반현을 설치했다. 후한 때 포판이라고 했다. 수나라 때는 생략했고 고성(故城)은 오늘날 산서성 영제현 북쪽 30리에 있다...”라고 적고 있다.
백이숙제의 나라인 고죽성이 있는 영지는 “요서군으로 秦(221-206BC)나라 때 설치한 것이며 유주(幽州)에 속한다.”는 중요한 기록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의 산서성 남서부가 유주라는 것이며 ‘유주’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동북, 기주, 요서군(遼西郡), 유주, 영지, 고죽성, 고죽국(백이숙제의 나라), 수양산, 포판, 하동지방 모두는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서부와 남부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 분명해진 것이다.
산서성 남서부가 고죽국이라는 결정적인 근거가 바로 수양산인 오늘날의 중조산(中條山)이다. 지금의 하북성에는 백이숙제가 고사리를 캐먹다 죽었다는 수양산(首陽山)인 현재의 중조산이 없다. 따라서 한국의 일부 제도권 역사학계와 재야사학계가 주장하고 있는 하북성 창려에 수양산은 문헌사료에 전혀 근거없는 억설(臆說)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들 지명들은 함께 따라다니기 때문에 한 개의 지명이라도 누락이 될 경우 ‘수양산이 있는 백이숙제의 나라 고죽국’이라 할 수 없고 따라서 ‘산서성’밖에 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고죽국의 정확한 위치는 단군조선과 진한, 마한, 변한, 그리고 고구려의 영토를 찾는데 중요할 뿐만 아니라 요서와 요동을 밝히는 단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고죽국, 고구려, 요수, 요동, 요서는 서로 밀접한 관계가 성립한다는 말이다. 동북, 기주, 유주, 요서군, 영지, 고죽성, 고죽국, 고구려, 수양산, 황하, 하동, 산서성, 섬서성, 화산 등이 위치한 강역을 다음 <그림 8>과 <그림 9>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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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의 강역 연구> - 제19부
IV. 요동과 요서의 위치
1. 황하 동쪽은 요동 서쪽은 요서
요동과 요서의 위치를 살펴보도록 하자. 요동(遼東)이란 ‘요(遼)가 있는 동쪽’ 또는 ‘요(遼)의 동쪽’이란 의미이며 요서(遼西)란 ‘요(遼)가 있는 서쪽’ 또는 ‘요(遼)의 서쪽’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요(遼)라는 글자가 어떤 뜻을 갖는 글자인지 어원을 알면 요동•요서의 위치를 밝히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요(遼)란 큰샘들이 있는 땅’이란 의미를 갖는 글자이다. 샘이란 땅에서 솟아나는 물을 말한다. 그런데 유주(幽州)에는 7개의 군(郡) 가운데 상곡군(上谷郡)을 제외한 6군 속에서, 요서군(遼西郡)에만 48개의 작은 물이 있어 함께 3,046리를 흐르고, 요동군(遼東郡)에는 대요수(大遼水)가 1,250리를 흐르며,
현토군(玄菟郡)에는 마자수(馬訾水)가 2,100리 흘러가고, 낙랑군(樂浪郡)에는 열수(列水)가 820리를, 우북평군(右北平郡)에는 경수(浭水)가 650리를, 어양군(漁陽郡)에는 고수(沽水)가 750리를 흘러, 이물을 모두 합치면 8,616리를 흐르는 엄청난 샘물과 같은 것으로, 요(遼)라는 글자의 뜻과 일맥상통하다 할 것이다.
그런데 요(遼)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지명들인 요산(遼山), 요산현(遼山縣), 요주(遼州), 요양(遼陽: 요주), 소요수(小遼水), 대요수(大遼水) 등이 모두 산서성(山西省)에 위치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산서성이 요(遼)라는 글자를 지니게 된 이유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요(遼)가 있는 동쪽의 의미인 요동이란 지금의 산서성임을 입증한 것이다.

제2절에서 후술하겠지만 요동에 관한 1차사료는 <관자>로 요동에 천연소금이 산출되는 염지가 있다고 하였고, 둘째는 <사기/조선열전>으로 요동의 옛 요새를 다시 수리하여 패수(浿水)를 경계로 삼았다는 것과, 셋째는 <한서/지리지>에 요동군은 진(秦)나라 때 설치했으며 유주(幽州)에 속한다고 하였고,
넷째는 <수서>로 고구려는 본시 고죽국인데 주(周)나라가 여기에 기자를 봉하였고 한(漢)에 이르러 3군으로 나누었으며 진(晉)대에는 [고구려가] 요동을 통솔하였다고 하고, 다섯째는 “고구려는 우(禹)가 구주(九州)를 나눌 때 기주(冀州)땅에 속했고 주(周)나라 때는 기자의 나라가 되었으며 한(漢)나라의 현토군(玄菟郡)이다. 요동에 있었으며 평양성에 도읍하였다”라고 <송사>가 기록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종합하면 요산, 요산현, 요주, 요양, 소요수, 대요수 등 요(遼)자가 들어간 지리지명들이 모두 산서성에 위치하며, 유주이자 요서인 산서성 남서부에 고죽국이 있었고 고죽국이 고구려의 영토였으며 고구려가 있던 이곳 산서성이 요동이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요동과 요서의 위치를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지도로 나타내면 다음 <그림 10>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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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의 강역 연구> - 제20부
IV. 요동과 요서의 위치
1. 황하 동쪽은 요동 서쪽은 요서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과 <그림 10>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문헌사료들이 기록하고 있는 요동과 요서는 한국역사학계의 통설로 믿고있는 요녕성 요하(遼河)를 기준으로 한 요하의 서쪽을 요서 요하의 동쪽을 요동이라 하지 않았고 요녕, 길림, 흑룡강성을 동북이라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1차사료와 문헌자료에 기록된 요동과 요서는 당시 바다(海)라고 부르던 황하와 인접한 오늘날의 산서성임을 고증하였으므로 학계의 통설은 허구임이 뚜렷하게 판명된 것이다. 요동•요서에 관하여 더 자세한 내용은 논자의 학술논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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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의 강역 연구> - 제21부
IV. 요동과 요서의 위치
2. 요동에서는 천연 소금이 산출
요동에 관한 최초의 문헌 기록은 춘추시기(770-403BC)에 관중(管仲: 719-645BC)이 지은 <管子(관자)/地數(지수)>편에 “초나라 여수(汝水)와 한수(漢水)에는 금(金)이 있고, 제나라 거전(渠展)에는 소금(鹽)이 있으며, 연(북연)나라 요동(遼東)에는 구운 소금(煑)이 있다”라고 하여 요동에서 소금이 생산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요동이란 지명은 최소한 춘추시기에 존재했던 지명이며 요동이라 일컫는 곳이 당시 북연의 땅이었는데 그곳에서 소금이 생산되었다고 적고 있다.
두 번째 요동에 관한 기록은 <사기(史記)/조선열전(朝鮮列傳)>으로, “한(漢)이 일어났으나 그 곳이 너무 멀어 지키기 어려워 요동의 옛 요새를 다시 수리하고 패수
에 이르러 경계로 삼아 연(북연)에 속하게 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다음은 북연에 대한 기록이다. “서주 초기에 봉하였으며 희성(姬姓)이고 도읍은 계(薊)이다. 전국시 7웅의 하나이며 기원전 222년에 진(秦)에 의해 멸했다.”
북연의 도읍지인 계(薊)에 대하여 “계는 남쪽으로 제(齊)와 조(趙)와 통하며 발해(勃海)와 갈석(碣石) 사이에 있는 큰 고을이다. 사고(師古)의 주해에 의하면 계현(薊縣)은 연[북연]의 수도이다”라고 적고 있다.
<사기/화식열전(貨殖列傳)>에서는 “연은 발해와 갈석 사이의 큰 고을이다. 남으로 제(齊)와 조(趙)와 통하며 동북으로 호(胡)와 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의 호는 동호(東胡)라고도 부른 고구려와 북부여를 뜻한다.
당시 제(齊)의 도읍은 하남성 정주와 낙양 사이였고 조(趙)의 도읍지는 섬서성 장안(長安)이였다. 북연의 수도 계(薊)가 하남성뿐만 아니라 섬서성과도 가까운 곳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요약하면 연의 도읍지는 ‘갈석과 발해’의 사이에 위치하고 남으로 섬서성 장안의 조(趙)와 통하고 동북으로 호(胡)와 접하는 동서는 길고 남북은 폭이 좁은 강토를 소유한 아주 작은 나라임을 의미한다. 동서가 길고 남북의 폭이 좁은 당시의 북연강역을 도형으로 표시해보면 대략 다음 <그림 11>과 같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구운 소금인 천연소금이 산출되는 요동과 북연은 동북지역이며 유주이고 광녕의 서쪽인 산서성 남부와 하내를 지칭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학계에서 주장하고 있는 요녕성 요하의 동쪽인 요동에는 천연 소금염지가 없음을 명심하기 바란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종합해보면 기주, 유주, 동북 지방, 의무려, 광녕, 요동, 북연, 요동의 소금 등이 위치한 지역은 산서성 남부와 하내 지역임을 1차사료와 문헌자료에 의해 고증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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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의 강역 연구> - 제22부
V. 패수의 위치
1. 단군조선은 패수의 서쪽에
<한서/지리지> 낙랑군 ‘패수현’조에 “물이 서쪽으로 증지현(增地縣)에 이르러 대해(大海: 큰 바다 즉 큰 황하)로 들어간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패수의 물이 황하로 들어감을 설명하고 있다.
사료 비판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패수와 관련된 1차사료들을 확인한 바로는 <한서/지리지>에서만 “패수의 물이 서쪽으로 흘러 대해(大海)로 들어간다”라고 되어 있으며, 해(海: 황하) 앞에 큰대(大)를 넣어 마치 황하가 아닌 다른 큰 바다로 오해하도록 조작했고 패수의 물이 동쪽이 아닌 서쪽으로 흐른다고 왜곡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대목에 관한 한 후대에 가필한 위작(僞作)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하내(河內)는 대하(大河) 북쪽이다”라고 하여 황하북부 하남성을 하내라 함으로 결국 대해(大海)나 대하(大河)나 황하를 지칭하는 것으로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황하를 잘 관찰해보면 폭이 좁은 곳도 있지만 바다처럼 넓은 곳이 있다. 섬서성과 산서성 사이와 하내(河內)에서 패수가 흘러 들어가는 황하는 폭이 넓다. 다시 말하면 하내(河內)를 경계로 흐르는 황하 즉, 낙양 북부 맹진(孟津)에서부터 산동성으로 들어가기 전까지의 황하는 폭이 넓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반도의 패수설이 바로 <한서/지리지>의 ‘패수현’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의심이 되는 부분이다. <한서/지리지>의 ‘패수현’조를 제외한 다른 사료나 문헌 자료들은 한결같이 대해(大海)가 아닌 해(海: 황하), 하(河: 황하), 황하(黃河)로 표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水經(수경)>에서 “패수는 낙랑(군) 루방(현)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해(海: 황하)로 들어간다”라고 하여 패수가 황하로 들어간다고 설명하고 있다.
<說文解字(설문해자)>에는 “패수는 낙랑(군) 루방(현)에서 나와 동쪽으로 해(海: 황하)에 들어간다”라고 하여 역시 패수의 물이 황하로 들어감을 나타내주고 있다.
<水經注(수경주)/십삼주지>에는 “패수가 낙랑(군) 루방현을 나와 동남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쪽에서 바다(황하)로 들어간다. ... 패수현은 낙랑의 동북에 있고, 루방현은 낙랑군의 동쪽에 있다. 패수가 그 남쪽에서 나와 루방을 지난다. 옛 연나라 사람 위만이 패수 서쪽에 있는 조선까지 갔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수경주>에서도 역시 패수는 동쪽에서 황하로 들어간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朝鮮)은 패수의 서쪽에 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전국시대에 위만이 왕으로 왕험성에 도읍했으며 땅이 수 천리였다. 그 땅은 지금 고구려(高句麗)가 다스리는 땅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수경주>에서도 <수서>와 <신당서>처럼 조선과 고구려의 강토가 같은 곳임을 알 수 있다는 대목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위 기록들을 종합하여 패수의 위치를 그림으로 표시하면 <그림 12>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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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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