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발해군의 위치
“한(漢)나라의 발해군은 부양(浮陽)으로 지금의 청지현(淸池縣)이며 창주(滄州), 탁군에 속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청지현을 찾아보자. “청지현은 본래 한나라의 부양현이다. 수나라가 바꾸어 청지(淸池)라 했다. 명나라가 폐지했다. 고성(故城)은 지금의 직례 창현 동남 40리에 있다. <수서지리지>를 살펴보니 청지(淸地)로 지(地)는 지(池)의 오류이다. 당나라가 두었다. 청인성(淸人城)조를 보라”고 적고 있다.
청인성조를 찾아보자. “청인성은 하남성 중모현(中牟縣) 서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중모현을 추적해보자. “중모현은 춘추 정원포(鄭原圃) 땅이다. 한나라가 중모현을 두었다. 수나라가 내모(內牟)라 개명했다. 또 포전(圃田)으로 개명했다. 당나라가 다시 중모라 하였다. 고성(故城)은 지금의 하남성 중모현 동쪽에 있다. 명나라가 옮겨 지금 관할한다. 하남 개봉부(開封府)에 속한다. 청나라는 그대로 따랐다. 지금은 하남성 개봉도(開封道)에 속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정리하면 한나라가 발해군을 설치하였는데 부양(浮陽)으로 당시 청지현(청인성)이며 하남성 중모현 서쪽이고 오늘날의 하남성 개봉에 속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한국사학계가 알고 있는 황하의 일부로 발해만(渤海灣)을 이루고 있는 발해만 주위의 성(省)인 요녕성이나 하북성 어느 곳에도 발해군이 위치하지 않았고 발해라는 천연호수가 위치한 산동성 좌측인 하남성 개봉(開封)에 발해군이 있었음을 고증한 것이다. 그림으로 발해군의 위치를 표시하면 다음 <그림 13>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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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43부
그런데 하남성에 있던 발해군을 당나라 시기부터 하북성과 산동성으로 옮기면서 역사를 왜곡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발해군 [수나라] 개황 6년(587)에 체주(棣州)를 설치했으며 대업 2년(607)에 창주(滄州)라 하였다”라고 했는데 “한나라의 발해군을 수나라는 종전대로 따랐다. 당나라 무덕 원년(618)에 창주(滄州)로 바꾸었다. 청지(淸池), 요안(饒安), 무체(無棣) 삼현을 관할하였다”라고 하면서 수나라가 607년에 이미 설치한 창주를 12년 후인 618년에 당나라가 다시 창주를 설치했다는 비논리적인 말을 하고 있다.
사실을 왜곡하다보니 이같은 모순이 발생한 것이다. 계속 더 살펴보자. “남피(南皮)는 한나라의 현으로 발해군에 속했으며 수나라에 이르기까지 개명하지 않았다. 무덕 4년(622)에 경주(景州)에 속했다. 정관 원년(627)에 바꾸어 창주에 속하게 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정관 원년에 남피를 개명하여 창주에 속하게 했다”고 하지만 남피를 어떤 이름으로 개명했는지 새로 개명한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역사 왜곡이기 때문인 것이다.
더 살펴보자. “무체(無棣)는 한나라 양신현(陽信縣)으로 발해군에 속했다. 개명하여 무체라 했다. 정관 원년(627)에 무체와 함께 양신에 속하게 했다. 정관 8년(635) 다시 두었다. 태화 2년(829) 체주(棣州)에 속했다. 또 다시 창주(滄州)라 했다”라고 적고 있다.
아무나 알아보지 못하도록 이리저리 지명을 바꾸어 추적이 불가능하게 왜곡했다. 결론은 한(漢)나라 시기(BC206∼AD220)에 하남성 중모(中牟) 즉, 개봉 부근에 설치한 발해군이 산동성 황하를 건너 북쪽으로 발해군을 옮겨놓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나라의 왜곡이라 주장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한나라의 발해군은 창주에 속한다”고 <구당서>가 밝혔고,
둘째, “발해는 지금의 창주의 경계이다”라 하며,
셋째, “한나라 시기 발해군은 지금의 하간부 창주다”라고 하고,
넷째, “동해가 창해이며 창해가 발해이다”라 하고,
다섯째, “발해군은 한나라 고조가 설치하였고 세조 초기에 창수군이라 했으며 태화(위: 227∼232) 21년에 다시 발해군이라 했다”는 기록 등으로 볼 때 창주(滄州)는 천연호수인 발해와 한나라가 최초에 설치한 발해군이 위치한 하남성 중모현을 다스린 개봉(開封) 사이여야 하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발해를 창주라 했으니 창주는 하남성과 산동성 사이의 발해를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창주(滄州)를 오늘날의 하북성으로 옮겨놓은 것으로 확인된다. 현대 지도에 창주는 하북성에 무체는 산동성에 있다. 다음 <그림 14>에서 당나라가 이동시킨 발해군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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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44부
3. 발해만의 등장
발해만은 현재의 황해(黃海)의 일부로서 발해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황해의 유래가 선행되어야 한다.
황해에 관한 원전 문헌사료는 모두 222권, 254개가 있지만 오늘날의 황해를 기록한 것은 단 한 가지도 없고 명·청 시기에 만들어진 왜곡된 자료에 한반도의 황해도(黃海道)를 언급하고 있음이 전부다.
<중국역사지명대사전>에도 황해에 관한 설명은 없다. 황해라는 명칭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프랑스 지도제작자였던 당빌(D′Anville)로서 1735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신중국지도첩>에 지나와 한반도 사이의 바다를 황해(Hoang-hai Ou mer Jaune)로 표시되었다.
함께 살펴본 바와 같이 황해란 단어가 최초로 나타난 것은 아무리 빨라야 1735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황해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황해는 본래 발해가 탁류 및 요수(遼水)와 고수(沽水) 등 여러 물에 의한 진흙과 모래 등을 받아들인 유래에서 이다. 물의 색깔이 황색으로 황해란 옛 이름이 되었다. 지금의 황하 하류가 발해로 들어가는 곳 즉 발해와 황하 사이의 탁류로 인한 것이 황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황해는 발해처럼 흐르는 물이 아니라 천연호수처럼 고여있는 물을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고 제5장 제1절에서 밝힌 바와 같이 “황하처럼 흐르는 물은 해(海), 하(河), 수(水)라 하고 천연호수처럼 고여있는 물은 해(海) 앞에 한 글자를 더 붙여 발해, 동해, 서해, 청해, 북해, 남해 등의 고유명사가 되었다”라고 설명한 이유와 같다.
따라서 황해는 하남성과 산동성 사이에 있는 발해의 또 다른 이름임을 어렵지않게 확인할 수 있다. 황하물이 발해로 들어가는 입구의 토사가 쌓인 지역을 황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주장은 “당나라 때는 거야택(발해)의 수면이 남북의 길이가 300리 동서의 폭이 약 100리 였으며 대야택 이라고도 불렀다. 송나라 때 거야택의 남부는 물이 마르고 땅이 단단해져서 평야가 되었으며 북부는 양산박의 일부가 되었다”라는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 근거한 것이다.
진흙과 모래가 발해(거야택)로 들어와 결국은 송나라 때 물이 마르고 땅이 단단해져서 평야가 된 것이다. 당나라 시기부터 발해란 지명을 왜곡하여 명나라와 청나라 시기 지금의 발해만으로 구체화 되었음이 고증된 것이다.
또한 오늘날의 발해만은 1926년 이전에는 ‘북직례만’과 ‘요동만’이었으나 손문의 중화민국에 의해 1926년을 기점으로 발해만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지금의 요녕성도 1929년까지는 봉천성이었다.
지금까지 황하는 약 10차례 물줄기가 바뀌었는데 하남성 정주 바로 위쪽의 황하에서 시작되어 천연호수인 발해 앞에서 일어난 황하범람 사례이다. 다음 <그림 15>에서 황하의 물줄기 변천 상황과 발해를 황해라고도 하였음을 원으로 표시된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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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45부
4. 당나라가 일방적으로 만든 대진의 국호 발해
“예종(睿宗)[현종] 선천(先天) 연간(712∼713)에 사신을 보내어 조영을 좌효위대장군발해군왕(左驍衛大將軍渤海郡王)에 벼슬을 내려주고 거느리고 있는 지역을 홀한주(忽汗州)로 삼아서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을 겸임시켰다. 이로부터 말갈(靺鞨)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오직 발해(渤海)로만 불렀다”라는 <신당서>의 일방적인 기록에 의해 대진(大震)의 국호가 발해로 둔갑되었다.
우선 선천(先天: 712∼713)은 당 제6세 현종(玄宗)의 연호로 예종이 아니다. <冊府元龜(책부원구)>에도 “현종 선천 2년”이라 적고 있다.
후고구려를 일으키려는 대중상과 그의 아들 대조영에게 크게 패한 당나라의 제6대 왕인 현종(이융기)이 그가 왕위에 오른 원년인 713년에 일방적으로 "좌효위 대장군이자 발해군왕이며 홀한주 도독"으로 책봉했다고 그들의 역사서인 <신당서> ‘북적 열전’에 기록한 때문이다.
대진이란 국호가 발해로 왜곡, 날조, 조작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대중상은 고구려를 부흥하기 위해 국호를 후고구려라 하고 연호를 중광(重光: 668∼698)이라 했으며
둘째, 당나라의 주장처럼 말갈이란 국호를 사용한 적이 없고
셋째, 당나라에 반기를 든 대중상과 걸사비우에게 무후(武后)가 대중상에게는 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으로 걸사비우에게는 허국공(許國公)으로 책봉하여 그들의 죄를 용서했다는 주장은 당나라의 일방적인 기록으로 허구이고
넷째, 대조영이 698년에 국호를 후고구려에서 진국(震國)으로 개명하면서 연호를 천통(天統: 698∼719)이라 하여 칭제건원(稱帝建元)한 명실공히 황제국이 되었고
다섯째, 사방 5천리의 광활한 영토를 가진 대진의 황제가 적국(敵國)인 당나라로부터 좌효위대장군발해군왕(左驍衛大將軍渤海郡王)이란 하찮은 벼슬, 즉 ‘발해군이란 마을의 왕’을 인정받을 이유도 없으며
여섯째, 진국(震國)이란 국호를 사용한지 15년이란 세월이 지난 713년에 적국인 당나라가 발해란 국호를 지어주었다는 이야기는 논리성과 설득력이 없다는 이유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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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46부
현종이란 인물에 대해서 알아보자.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의 후궁은 무미랑(武眉狼)이라는 여자였다. 이세민은 고구려 정벌시 안시성 성주 양만춘(楊萬春) 대장군의 화살에 왼쪽 눈을 맞고 그로 인한 상처로 말미암아 3년 만에 죽는다.
이세민의 뒤를 이은 아들 고종 이치(李治)는 자신의 어머니나 매한가지인 아버지 이세민의 후궁 무미랑을 총애하게 되어 을묘(655)년 10월 19일에 고종의 황후로 책봉된다. 이때 그녀의 이름을 무미랑에서 무측천(武則天)으로 바꾸었다. 경인(690)년에는 이름을 다시 무조(武曌)로 바꾼다. 하늘 공(空)자에 날 일(日)과 달 월(月)을 붙여서 새로 만든 글자로 ‘비칠 조’ 혹은 ‘비출 조’자라 하며 이 글자를 만든 사람이 바로 무측천이라 전한다.
고종과의 사이에서 장남 이홍(李弘), 둘째 이현(李賢), 셋째 이현(李顯), 막내 이단(李旦)이 있었다. 이홍은 675년에 독살하고, 둘째 아들 이현은 684년에 죽이고, 셋째 이현은 왕위에서 폐위하여 유폐시켰고, 막내 이단은 왕위에 있었으나 무측천이 섭정하였다. 섭정도 성이 차지 않자 690년에는 이단을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무측천이 직접 황제가 되었다.
대진을 발해라고 국호를 일방적으로 만든 이융기(李隆基)가 바로 무미랑의 막내아들 이단의 아들이다. 이융기는 쿠데타(coup d’etat)로 왕이 된 사람이다.
나이 61세에 여산(驪山)에서 우연히 그의 며느리 양옥환(楊玉環)을 만나게 되고 그녀의 미모에 도취된다. 윤리적인 사회규범도 아랑곳하지 않고 온갖 수단방법으로 며느리를 취하여 귀비로 만들었다. 수왕 이모(李瑁)는 현종 이융기의 친아들로, 융기가 총애하던 무혜비의 소생이었으며, 양귀비 양옥환은 이모의 처인 이융기 자신의 며느리였다.
이모와 부부가 된지 1년만에 현종에게 불려갔다. 당시 양귀비는 18세였다. 이런 비도덕적 비윤리적인 사람이 대진을 발해라고 임의대로 부른 것이다.
이융기는 이태백을 매우 좋아하였다. 하루는 이태백이 술에 취해 신발을 벗기라고 태감에게 명령하였다. 그 태감은 다름 아닌 현종이 아끼던 환관 고력사(高力士)였다. 고력사의 지위는 당시 발해군공(渤海郡公)이었고 당나라 조정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사람이었다.
고력사는 이태백의 신발을 벗겼다. 이태백은 즉석에서 ‘청평조(淸平調)’ 한 수를 썼다. 현종과 양귀비는 이 시를 보며 이태백을 극찬하였다. 고력사는 이 후 이태백을 지극히 원망하게 된다.
태감 고력사의 벼슬이 ‘발해군공’이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조영이 세운 발해’와 아무관계가 없는 자이다. 다시 말하면 당 현종 이융기가 자신의 신하인 고력사에게 ‘발해군공’이라 칭한 것처럼 일방적으로 대조영을 “좌효위 대장군이자 발해군왕이며 홀한주도독으로 책봉했다”고 망발(妄發)을 한 것을 대한민국의 역사학자들은 앞뒤 정황이나 1차 사료의 검토 비판없이 무책임하게 받아들인 결과로 지나인들의 동이배달한민족 역사 왜곡의 연장선상에서 그들과 야합한 결과를 초래해왔다.
김치와 된장국이 우리 동이배달한민족의 고유한 음식임은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있는 사실이나 대한민국 인구의 약 2,5배인 1억3천만 일본인들이 김치를 ‘기무치’로 된장국을 ‘미소숩’이라 부르기 때문에 다른 나라 사람들은 마치 ‘미소숩’과 ‘기무치’가 ‘된장국’과 ‘김치’를 대신하는 것으로 잘못 알려진 것과 같은 맥락이다.
가장 일반적인 상식으로 생각해보자. 칭제건원 즉, 황제라 칭하고 고유의 연호를 사용한 대진국(大震國) 황제가 무엇이 아쉬워 적국인 당나라로부터 군왕(郡王) 즉, 군(고을)의 왕을 책봉 받겠는가.
따라서 발해란 국호는 당나라가 왜곡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음으로 본고에서는 발해 대신 대진(大震) 또는 대진국(大震國)으로 일관하며 동양 삼국의 역사서에서도 발해 대신 대진으로 명칭할 것을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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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47부
V. 동모산, 천문령, 니하의 위치
1. 동모산의 위치
동모산은 고구려가 패망하자 대중상이 당나라 군사와 싸우며 고구려의 유민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읍루 지역에 위치한 이곳에 최초의 도읍지를 정한 곳이다. 동모산의 위치에 따라 정확한 대진국의 영토 설정이 가능하기 때문에 철처한 고증이 필요한 천연지형물이다.
대진의 건국과 관련된 1차사료는 <구당서>와 <신당서>로 이 두 사서를 자세히 조사, 비교, 분석, 교차확인 하면서 동모산의 위치를 추적해보도록 하자.
<구당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발해말갈의 대조영(大祚榮)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別種)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조영은 가속(家屬)을 이끌고 영주(營州)로 옮겨와 살았다. 만세천통 연간(696)에 거란의 이진충(李盡忠)이 배반을 하니, 조영은 말갈의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각각 [그들의 무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몸을 피해 달아나 요해지(要害地)를 차지하여 수비하였다.
진충이 죽자, 측천(則天)은 우옥검위대장군 이해고(李楷固)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 잔당을 토벌하게 하였다. 먼저 걸사비우를 무찔러 죽이고 천문령(天門嶺)을 넘어 조영을 바짝 뒤쫒았다. 조영이 고[구]려·말갈의 무리를 연합하여 해고에게 항거하자 군대는 크게 패하여 해고만 탈출하여 돌아왔다.
[이때] 마침 거란과 해(奚)가 모두 돌궐에게 항복을 하므로 길이 막혀서 측천은 [그들을] 토벌할 수 없게 되었다. 조영은 마침내 그 무리를 거느리고 동으로 가서 계루(桂樓)의 옛 땅을 차지하고 동모산(東牟山)에 웅거하여 성을 쌓고 살았다.
조영이 굳세고 용맹스러우며 군사를 잘 부리자, 말갈의 무리 및 고[구]려의 남은 무리가 점점 모여들었다. 성력연간(698∼699)에 스스로 진국왕(振[震]國王)에 올라 돌궐에 사신을 보내 교통하였다. 그 땅은 영주(營州) 동쪽 2천리에 있으며 남쪽은 신라와 서로 접하고 있다.”
라고 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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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48부
<신당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로서 고[구]려에 부속되어 있었으며, 성은 대씨(大氏)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무리를 이끌고 읍루(挹婁)의 동모산을 차지하였다. 그곳은 영주(營州)에서 동으로 2천리에 위치하며 남쪽은 신라와 맞닿아 니하(泥河)로 경계를 삼았다.
동쪽은 바다에 막혀있고 서쪽은 거란과 접하고 있다. 성곽을 쌓고 사니 고[구]려의 망명자들이 점점 모여 들었다. 만세천통 연간(696)에 거란의 진충(盡忠)이 영주도독 조홰(趙翽)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사리(舍利) 걸걸중상(乞乞仲象)이라는 자가 있어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와 고[구]려의 남은 부족들이 동쪽으로 달아나 요수(遼水)를 건너서 태백산(太白山)의 동북을 거점으로 하여 오루하(奧婁河)에 의지하여 성벽을 쌓고 굳게 수비하였다. 무후(武后)는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으로 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으로 책봉하여 그 죄를 용서했다.
비우가 그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자, 무후는 옥검위대장군 이해고(李楷固)와 중랑장 색구(索仇)에게 조서를 내려 그를 쳐 죽였다. 이때에 중상은 이미 죽고 그의 아들 [대]조영이 남은 무리를 이끌고 도망쳐 달아났는데 해고(楷固)가 끝까지 추격하여 천문령(天門嶺)을 넘었다.
조영(祚榮)이 고[구]려 군사와 말갈군사를 거느리고 해고에게 저항하니 해고는 패전하고 돌아왔다. 이에 거란이 돌궐에 부속하니 왕사(王師: 왕의군대)의 길이 끊겨져 그들을 토벌할 수 없게 되었다.
조영은 곧 비우의 무리를 합병하여 거리가 먼 것을 믿고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국왕(震國王)이라 부르며 돌궐(突厥)에 사자(使者)를 보내 교통하였다. 땅은 사방 5천리이며 호구(戶口)는 십여만이고 승병(勝兵: 뛰어난 군사)은 수만이다.
서계(書契)를 제법안다. 부여, 옥저, 변한, 조선 등 해(海: 황하) 북쪽에 있던 여러 나라의 땅을 거의 다 차지하였다.
중종 때에 시어사(侍御史) 장행급(張行岌)을 보내 초위(招慰: 불러서 위로함)하니 조영은 아들을 보내 입시(入侍: 왕을 알현함)하였다.
예종(睿宗)[현종] 선천(先天) 연간(712∼713)에 사신을 보내어 조영을 좌효위대장군발해군왕(左驍衛大將軍渤海郡王)에 벼슬을 내려주고 거느리고 있는 지역을 홀한주(忽汗州)로 삼아서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을 겸임시켰다. 이로부터 말갈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오직 발해로만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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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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