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논평1*
좁게는 福德之地 柳城 龍城 藍田이 榮州이고 크게는 幽州 遼西에 속하며 현재 지도로는 섬서성 동부 華山 東南이자 陝州의 西方이고 하남성 서북 지역이며 商 時期의 고죽국이고 춘추 시기의 산융비자국이라는 것이지만 전국시기의 燕나라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논평(김태영학파T.K.School):
유감스럽게도 교차확인이 안되어있다.
최고의 역사학자가 되려면 관련된 문헌사료를 모두 읽고 검토, 분석, 교차확인이라는 절차를 거쳐 주장을 해야 한다.
작은 지도에 타원형으로 지역을 표시하다 보니 미흡한 점도 있을 것이나 주어진 정보 안에서는 가장 적절한 설명이라 여겼다.
북연(北燕)의 절정기는 전국시기(403∼221BC)로 그의 강역은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에 있는 위현(급현)인 계(薊)에서 서쪽으로 경도 110도의 황하를 건너 오늘날의 조읍(조양)과 하남성의 양평까지로 이곳에 연 장성이 있던 곳이다. 연장성(燕長城)은 황하가 굴곡하는 형태로 축조된 섬서성과 하남성 서북에 있었다. 즉, 섬서성 일부와 하남성 서북 일부가 북연의 영토였다는 말이다.
북연은 동서가 길고 남북이 아주 좁은 나라였다. 비록 전국시 7웅의 하나였으나 북연은 섬서성 함안에 있던 진(秦)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 BC222년에 진에게 망했다.
단군조선 시기에는 유수(濡水)이고 진(秦) 시기에는 역수(易水)이며 고구려 때는 난하(灤河) 그리고 세칭 상도하(上都河)라 불렸던 하천이 지금의 산서성 남부에 속수(涑水)란 이름으로 위치한다.
전국(戰國) 말(末)에 연(북연)의 형가(荊軻)가 진(秦)나라 왕을 죽이기 위한 밀명을 받고 연나라 태자 단(丹)과 헤어진 곳이 바로 여기 중역수(中易水) 위에서였다. 형가가 진왕을 칼로 찔렀으나 죽이지 못하고 그로인하여 연은 멸망하게 되었다.
산융(山戎)은 단군조선을 일컫는 말이며 지금의 산서성 남서부 영제시(永濟市)를 지칭한다. 이곳이 산융이고 비자국이고 고죽국이고 단군조선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여러 논문들과 <한민족사 고금 지리지명사전>을 참고하기 바란다.
*댓글 논평2*
댓글; 당태종은 고구려가 망하기 전에 죽은 것은 확실하네요. 이것도 전에는 의견이 분분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논평(김태영학파T.K.School): 전에 어떤 의견이 분분하였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고구려가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패망한 것은 668년 9월 21일로 오늘날의 산서성 임분(臨汾)에 있던 평양성이 함락됨으로써였다.
고구려 보장열제 4년(645) 6월에 안시성의 양만춘(楊萬春) 대장군이 쏜 독화살에 왼쪽 눈을 맞은 당태종 이세민은 649년 7월 10일에 사망했다.
그러므로 고구려가 패망하기 20년 전에 이세민은 죽었다. 양만춘 장군의 화살을 맞고 5년간 투병하다가 사망한 것이다. 그런데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에는 고구려의 양만춘 대장군의 화살을 맞고 그로인하여 죽었다는 기록이 없다. 이런 것을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 하는 것이다.
당태종의 처남 장손무기(長孫無忌)가 병석에 누어있는 이세민에게 한 말이다. “知足不辱 知止不殆(지족불욕 지지불태)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이것은 성인(聖人) 노자(老子)의 <도덕경/천곡장>에 나온 말이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熟多得與亡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脩久(숙다득여망 지족불욕 지지불태 가이수구) 많이 얻어 풍성해지면 망할 일이 쫓아온다.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그 몸을 오래 보지할 수 있다.”
당 이세민은 만족할 줄 모르고 그칠줄 몰랐기 때문에 생명을 오래 보지(保持)하지 못하고 일찍 죽은 것이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목숨이고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국과 민족과 대의(大義)를 위해 의인(義人)으로 죽어 청사에 그 이름을 남기는 일이다.
*댓글논평3*
댓글:
무측천의 唐이 大震을 渤海郡王으로 封한 것은 고구려 신라 등을 洛浪郡王으로 封한 것과 같겠지요? 고구려 신라 대진 강역의 여러 지역 중에서 한 지역의 郡王으로만 특정하는 것은 기록의 편리함만은 아니겠지요?
논평(김태영학파T.K.School):
먼저 오류를 지적하면
첫째, 대진을 발해라고 한 사람은 무측천이 아니라 당나라 제6대 왕인 현종(이융기)이다.
이세민의 후궁이 무미랑(武眉狼) 즉, 무측천이고 이세민의 아들 이치(李治: 고종)가 자신의 애미나 다름없는 이세민의 후궁 무측천을 아내로 삼아 낳은 막내 아들인 이단(李旦)의 아들이 이융기(李隆基)이다. 다시 말하면 이융기는 무측천의 손자이다.
둘째, “낙랑군(洛浪郡)”이 아니라 낙랑군(樂浪郡)으로 강이름낙(洛)이 아니라 즐거울락(樂)이다.
셋째, 당나라는 대진, 고구려, 신라를 봉(封)한 적이 없다. 봉(封)이란 토지를 주어 제후로 삼는 것을 말한다. 고구려, 대진, 고려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천자의 황제국이었다. 당나라가 고구려, 신라, 대진에게 봉토(封土)를 주고 제후로 삼았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지나인들의 곡필(曲筆)로 지독한 역사왜곡이며 멍청한 대한민국 사학자들의 부화뇌동(附和雷同)에서 비롯된 헛소리다. 그래서 역사학자는 모름지기 교차확인을 해야 하며 교차확인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독서량(讀書量)에 달려 있다.
역사는 역사성(歷史性: The nature of history)이 갖추어져야 한다. 즉, 사건이 일어난 장소, 사건의 주체인 사람, 역사적 사건, 그리고 기록이란 요소를 역사성이라 한다. <김태영학파의 정의>
“한 지역의 郡王으로만 특정하는 것은 기록의 편리함만은 아니겠지요?”의 답이다. 대체로 도읍지가 있는 장소 즉,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 중점을 두어 이름을 붙인 것이다. 예를들면 좁은 의미의 요동으로 산서성 임분(臨汾)에 있던 평양성을 고구려의 요동이라 했고,
단군조선의 왕검성이 있던 산서성 남부 원곡(垣曲)을 낙랑군이라 하여 신라가 이곳에 도읍한 사실이 있으며,
대진(大震)의 초기 도읍지로 남해부(南海府)인 홀한해에 있던 홀한성 때문에 대진을 발해라 지칭했던 것이다. 대진은 남해부에서 망했다.
천연호수인 발해(동해)와 홀한해(천연호수로 오늘날의 악성수고)가 서로 가까워 그렇게 호칭한 것이다. 물론 대진의 최초 도성은 하내(河內)에 있는 동모산이었고 동모산에서 홀한성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동모산이나 홀한성은 모두 지금의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河內)에 있다. 엄격하게 말하면 홀한해는 하내와 하북성의 경계에 있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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