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단향, 숙신, 예, 읍루는 요동인 동북지역
한국 사학계에서 동북이라 잘못 알고 있는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을 동북이라 지칭한 적이 없다.
“동삼성(東三省) 혹은 관동삼성(關東三省)이라 칭했으며 청나라 말(末)과 북양정부 시기에 산해관 밖의 봉천, 길림, 흑룡강성을 모두 총칭했다.”
북양정부란 1921∼1928까지 하북성 북경에 있던 중화민국정부를 일컫던 말로 19세기 초에 등장한 명칭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동북삼성의 동북은 대진 시기의 동북이 아니다.
단군조선과 함께 있던 서주(西周: 1046∼771BC) 시기 주나라의 도읍지인 섬서성 호경(서안)을 기준으로 하여 동쪽은 청주, 서쪽은 옹주, 남쪽은 형주, 북쪽은 병주의 방향을 설정하면서 황하가 굴곡하는 경도 110도와 위도 35도로 나뉘는 황하의 북부 즉, 산서성(山西省) 남부와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河內)를 동북(東北)이라 하였다.

<그림 5>에서 동북지역의 위치를 가늠해 보도록 하자. 오늘날의 동북삼성으로 알려진 봉천성, 길림성, 흑룡강성이 동북이 아님을 극명하게 식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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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28부
또 숙신 땅에 살던 사람을 읍루라고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단군조선이 예맥조선이고 예(濊)가 숙신(肅愼)이며 숙신이 읍루(挹婁)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숙신씨에 대한 기록을 더 살펴보기로 하자. <晉書(진서)>에 숙신씨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숙신씨는 일명 읍루라고도 하는데, 불함산(不咸山)에 있으며, 북쪽으로 가면 부여인데 60일쯤 가야하는 거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연해있고, 남쪽으로는 구만한국(寇漫汗國)과 접해 있으며, 북쪽은 약수(弱水)에까지 이른다”라고 하여 숙신을 읍루라고 한다는 것이다.
지나인들이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방향을 헷갈리게 적고 있으나 중요한 산맥과 하천을 추적하면서 수많은 1차사료와 문헌자료들을 교차확인하면 당시의 위치를 어렵지않게 확인할 수 있다.
약수(弱水)란 하천은 아시아 대륙에서 오직 한곳에만 위치한다. ‘약수는 흉노 곤사왕의 도읍지가 있던 감숙성 장액군 산단현에 있는 하천이다.’
한국역사학계의 통설인 엉터리 동북삼성인 길림, 요녕, 흑룡강성 어디에도 약수란 하천은 없다. 다음 <그림 6>에서 약수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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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29부
<北史(북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물길국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는데, 말갈(靺鞨)이라고도 한다”라고 하여 물길의 다른 이름이 말갈임을 밝히고 있다.
지금까지 함께 살펴본 내용을 종합하여 정리하면 예수(패수)가 발원한 산서성 남부에 위치한 왕옥산(방산)은 왕검단군의 고향인 단향이 위치한 곳이며 왕옥산을 방산이라고도 불렀고 이곳 방산에서 예수가 발원하며
이 예수(패수) 때문에 예, 예맥조선(단군조선)이 나타나고 조선은 시대에 따라 예, 숙신(肅愼), 읍루(挹婁), 물길(勿吉), 말갈(靺鞨)로 불리면서 단군조선을 구성한 부족들을 달리 부르던 이름이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숙신왕검의 고향 단향이 위치한 동북지역인 산서성 남부와 하내가 읍루라는 사실을 확정지을 수 있는 기록들을 더 조사해보도록 하자. “읍루는 숙신의 후예다”라고 <冊府元龜(책부원구)>가 기록하고 있으며 송나라 왕칭(王稱)이 지은 <東都事略(동도사략)>에도 “숙신씨의 나라를 동한(東漢)은 읍루라 하고 원위(元魏)는 물길이라 했으며 수와 당은 말갈이라 했다”라고 적고 있다.
다시 말하면 단군조선인 숙신이 읍루이고, 읍루를 물길이라고 했으며 수와 당나라 시기에는 말갈이라 불렀으며, 이같은 내용은 <책부원구>와 <동도사략>뿐만 아니라
<松漠紀聞(송막기문)>, <欽定滿洲源流考(흠정만주원류고)>, <新唐書(신당서)>, <大淸一統志(대청일통지)>, <資治通鑑後編(자치통감후편)>, <十六國春秋(십육국춘추)>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동북지역인 산서성 남부와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가 읍루 지역임이 입증된 것이다.
따라서 왕검이 건국한 단군조선 → 삼한 → 부여 → 고구려 → 대진으로 승계된 민족이니 <구당서>의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別種)이다”나 <신당서>의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고[구]려에 부속되어 있었으며 성은 대씨이다”라는 기록은 춘추필법의 연장선상으로 적국(敵國)의 민족을 폄훼한 역사왜곡이다.
별종(別種)이란 “다른 종자”로 비록 대진이 고구려를 계승하였다 하나, 고구려를 세운 고씨(高氏)와 대진을 건국한 대씨(大氏)는 당연히 다른 성씨를 가진 별종임에 틀림없다. 글자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의 말장난으로 인하여 대씨는 마치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야만인 인냥 와전되어 온 잠재의식의 결과다.
양견(楊堅)과 이연(李淵)은 같은 선비족(鮮卑族)이지만 수나라를 세운 양견은 양씨(楊氏)이고 당나라를 세운 이연은 이씨(李氏)이니 수나라나 당나라의 관점에서 볼 때 이(李)나 양(楊)은 서로 별종임과 같은 맥락이다.
함께 살펴본 바와 같이 예(맥), 숙신, 읍루, 물길, 말갈은 모두 같은 종족으로 시기에 따라 달리 부르던 이름이니 대중상과 대조영을 말갈이라 호칭한 것이나 고구려인을 예맥이라 한 것은 호칭만 다를뿐 한 종족이다.

그러므로 대씨나 고씨 모두 같은 종족이며 당나라에게 빼앗긴 고구려의 영토를 대진이 모두 회복하여 통치하였으니 대진은 당연히 대한민국의 역사이다. 단지 아쉬운 것은 대진의 강역을 다시 관할 한 고려가 대진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지 못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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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30부
4. 숙신국 불함산은 동북인 산서성 남부
<吳越春秋(오월춘추)>에는 왕검단군 시기와 동시대인 요•순 시대부터 춘추 시기까지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있어 단군조선의 강역을 추적하려면 반드시 이 문헌을 검토해야 한다.
월나라 이전 군주인 무여(無余)는 하우씨의 후예로 월땅에 봉해졌다. 우(禹)의 아비 곤(鯀)은 전욱(顓頊)의 후손이다. ...순(舜)은 순행길에 나서서 곤이 치수(治水)를 위해 9년 동안 애쓴 모양을 볼 수 없었다.
우산(羽山)에서 곤을 죽였다. ...우는 아버지가 치수의 공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것을 슬프게 생각하여 장강(長江)의 물줄기를 따르고, 황하(黃河)를 거슬러 오르며, 제수(濟水)를 오르내리고, 회수(淮水)를 살피며 노신초사(勞身焦思)하며 치수에 힘썼다. ...
7년 동안 아름다운 음악을 듣지 않았고, 집앞을 지날 때도 집에 들르지 않았으며, 관을 벗어 걸어놓은 채 돌아보지 않았고 신발을 벗어놓은 채 신지 않고 뛰어다녔으나 치수의 공을 이루지 못해 숙연히 근심과 걱정에 잠겨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황제중경력(黃帝中經曆)>을 생각하고 이를 펼쳐보니 성인(聖人)의 기록에 이르기를 ‘구산(九山) 동남쪽에 천주(天柱)가 있는데 완위산(宛委山)이라 한다. 적제(赤帝)께서 계신 대궐의 바위 꼭대기에 문옥(文玉)으로 받치고 벽석(壁石)으로 덮어놓은 금간(金簡)이 있는데 청옥(靑玉)에 글씨를 새겼고 백금으로 엮었으며, 그 문자는 모두 록자(琭字)로 썼다’고 하였다.
우는 곧 동쪽으로 순행하여 형악(衡嶽)에 올라 백마의 피로써 제사를 지냈다. ...꿈속에서 오색 수를 놓은 비단 옷을 입은 남자를 만났다. 그는 스스로 현이(玄夷)의 창수사자(蒼水使者)라 하면서 말했다.
‘제(帝)[왕검]께서 문명(文命: 글로쓴 명령)을 이곳에 보내 사역(使役: 사람을 부려서 일을 시킴)하게 함을 듣고 그대의 형편을 살피노라 아직은 신서(神書)를 얻을 수 있는 때가 아니나 그대에게 그 기일을 일러줄 것이니, 이제 한숨을 쉬지말라, 후에 오늘을 잊지 말고 부부산(覆釜山)의 일을 노래하라.’ 창수사자는 동쪽으로 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부루] 산에 있는 신서를 얻으려거든 황제산(黃帝山)[부루산] 바위 아래에서 몸을 재계(齋戒)한 후 3월 경자일(庚子日)에 산에 올라 돌을 빼어보면 금간지서(金簡之書)가 있을 것이다.’ 우는 공손히 물러나 산에서 내려왔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인용문에서 “현이(玄夷) 창수사자 ... 제(帝)께서 문명(文命)을 이곳에 보내 ... 아직은 신서를 얻을 수 있는 때가 아니나 ... 후에 오늘을 잊지말고 부부산(覆釜山)의 산의 일을 노래하라. 경자일에 산에 올라 돌을 빼어내면 금간지서가 있을 것이다”에 주목하면서 주밀하게 분석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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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발해)의 강역 연구> - 제31부
우선 ‘제(帝)’란 ‘임금’으로 단군왕검을 일컫는 말이며 ‘현이(玄夷)’란 황하의 북쪽에 살고 있는 동이족이라는 것이다. 현(玄)이란 글자는 ‘검다’의 뜻으로 북쪽 방향을 나타낸다.
부부산(覆釜山)이란 단군왕검의 고향인 단향(壇鄕)이 위치한 산서성 남부 왕옥산(王屋山)을 뜻하며 본 인용문에서는 부루산을 표현한 것으로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하나라를 세운 우(禹)는 단군조선의 왕검의 아들인 태자 부루에게서 금간옥첩을 직접받아 치수에 성공을 했으나 지나인들은 이적(夷狄)이라 하는 단군조선에서 우가 금간옥첩을 얻어 치수했다고 인정하기가 싫어 황제[헌원]를 등장시키고 꿈에 현이인 창해사자를 만났다고까지 각색하여 역사를 왜곡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단군조선은 예수(濊水)이자 연수(沇水)이고 제수(濟水)이며 패수(浿水)가 발원한 왕옥산이 위치한 산서성에 있던 나라이며 창해(蒼海)란 왕옥산 남쪽 황하를 일컫는 말이다.
인용문에서 나온 부부산(覆釜山)은 황제산이 아니라 부루단군의 산임을 알 수 있다. <산해경/대황북경>에 “동북인 황하밖에 거친 땅으로 황하와의 사이에 부우산(附禺之山)이 있다”라는 부우산과 같은 산으로 부루산, 부우산, 부부산(覆釜山), 부함산(불함산), 방산의 여러 이름을 가진 산서성 남부에 위치한 오늘날의 왕옥산이다.
황제는 BC2697년경 사람이고 부루단군은 BC2300년 인물이니 시간적으로 황제헌원이 될 수 없다. 황제헌원(黃帝軒轅)은 공손(公孫)이라고도 하며 염제신농씨의 동생인 욱사(勖嗣) 소전국군(少典國君)의 제후로 그로 인하여 공손이란 이름을 얻었으며 후에 희성(姬)으로 개명한 사람이다.
희(姬)씨 성을 받은 사람은 첩의 소생을 의미한다. 따라서 황제헌원은 염제신농씨의 동생 욱사의 첩의 소생임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헌원(공손)의 고향은 신정시(新鄭市) 서북으로 오늘날의 하남성 개봉을 뜻한다. 개봉은 황제헌원의 고향도 되지만 하나라를 세운 우(禹)의 고향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로 황제를 끌어들인 것으로 추측된다. 인용문에는 우가 7년 동안 치수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관자>에는 5년, <묵자>에는 7년, <맹자>에는 8년, <사기>에는 13년으로 달리 기술하고 있다. <묵자>의 기록이 <오월춘추>의 기록과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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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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