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殷: 상商)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은 달기라는 미희(美姬)와 놀아나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고 매일 술로 방탕한 세월을 보낸다. 주지육림(酒池肉林)이라 하여 연못을 파서 그곳에 술을 가득 채우고, 나무 가지에 고기를 매달아놓고, 술과 고기로 배를 채우며 매일같이 향락(享樂)만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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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왕에게는 숙부(叔父: 작은 아버지)가 2사람 있었는데, 한사람은 비간이고 또 한사람은 기자(箕子)이다. 그리고 이복(異腹: 아버지는 같고 어머니가 다름) 형제인 미자란 사람이 있었는데, 공자(孔子)는 이 세 사람, 비간 기자 미자를 은삼인(殷三仁), 즉 은 나라의 인자(仁慈)한 세사람이라고 한 바 있다.
은나라 마지막 주왕(紂王)이 이렇게 정사를 돌보지 않고 술과 계집으로 방탕한, 타락된 생활을 하자, 숙부인 비간이 3일동안 식음을 전폐(全閉)하고 조카인 주왕에게 잘못을 간(諫: 임금에게 잘못을 고치도록 말함)하자, 주왕은 비간더러, “너의 심장은 보통 사람의 심장과는 다른 성인(聖人)의 심장이 분명하다. 내가 그것을 확인해 보겠다”라고 하고, 비간을 죽여 심장을 갈기갈기 찢는 패륜(悖倫)을 저질렀다.
주왕은 포락이라는 형벌을 가했는데, 포락이란 불에 달구어진 동(구리)으로 만든 기둥을 숯불위에 걸처 놓고 달구어진 그 기둥위로 걸어가도록 한 형벌이다. 이토록 정치가 타락으로 극에 달한 은(殷)나라는 주(周)나라에 의해 기묘년인 BC 1122에 망한다.
주(周)나라 무왕은 재위 11년에 5천 군사(軍士: 군인)로 은(殷)나라를 멸한다. 당시 은나라는 황하북부 하남성(河南省) 기현에 있었다. 주나라가 쳐들어오자 주왕은 자살하는데, 무왕은 자살한 주왕의 시체에 화살 3개를 꼽고 주왕의 목을 잘라, 주왕의 목을 백기(白旗: 흰 깃발)에 매달면서 은나라는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주(周)나라는 은나라의 제후국이었지만, 단군조선(壇君朝鮮)때문에 제후국에게 망하게 된다. <시경 詩經>과 <맹자 孟子>의 기록에, "상지손자기려불억 상제기명후우주복 (商之孫子其麗不億 上帝旣命候于周服) 상의 손자들은 수없이 많았으나 상제(단군조선의 단군을 뜻함)가 명(命)을 내려 주나라에 복종하게 하였다."란 뜻이다.
은나라가 망하고 주(周)나라가 일어서면서, 주나라 무왕(武王)은 당시 감옥에 갇혀있던 기자(箕子: 은나라 주왕의 숙부)를 풀어준다. 이때 감옥에서 풀려난 기자가 단군조선(壇君朝鮮)으로 망명하여 단군조선에서 왕이 되었다는 것이 기자조선의 실체이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이란 말이 나오게된 동기는 한(漢)나라때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에 근거한 것이다. <사기>를 인용하면, “무왕봉기자우조선 (武王封箕子于朝鮮)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하였다”는 기록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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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이 허구(虛構)임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서漢書>를 지은 반고(班固)는 무왕의 봉작설을 쓰지 않았다. <한서>의 기록을 보면, 있지도 않은 내용도 살을 붙여 <사기>보다 더 자세하게 기록된 곳이 많다. 주나라 무왕의 ‘기자봉작설’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대 사건이었다. 그토록 중차대한 사건을 기록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기자봉작설’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 남송(南宋)때 범엽이 지은 <후한서> ‘동이열전’의 기록에, “昔箕子違衰殷之運 避地朝鮮 (석기자위세은지운 피지조선) 옛날 기자가 은나라의 운(運)이 다하여 조선으로 피했다”라고 되어 있다.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임명했다는 말은 없다. <후한서>는 지나(중공)의 4대 사서(史書)의 하나다.
셋째: 공자(孔子)의 7대손인 공빈(孔斌)이 지은 ‘동이열전’에 의하면, “殷太師箕子有不臣於周朝之心 而避居於東夷地 (은태사기자유불신어주조지심 이피거어동이지) 은나라 큰스승 기자가 주나라의 신하가 되지 않고 동이땅 (단군조선을 뜻함)으로 피신해 살았다”라고 되어 있다.
기자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던 은(殷)나라의 신하로, 은나라가 망하자 단군조선(壇君朝鮮)으로 피신한 것이다. 여기서도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다는 기록은 없다.
네째: 기자가 은(殷)나라의 감옥에서 단군조선에 망명한 때는 BC1122 년경이다. 당시 단군조선은 진한(辰韓), 마한(馬韓), 변한(弁韓)으로 나뉘어 있었던 때이다. 단군조선의 변한(弁韓: 변조선) 에서 기씨(箕氏)가 왕 노릇한 것은 변한왕 74대중 69대인 기후씨(箕후氏: BC390), 70대 기욱씨(BC346), 71대 기석씨 ( BC321), 72대 기윤씨(BC296), 73대 기비씨(BC277), 그리고 74대 기준씨(箕準氏: BC243)로 기자(箕子)로 부터 기후씨까지는 약 730년의 연대차이가 난다.
다시 말하면, 기자가 단군조선 즉 변한(변조선)의 왕이 된 것이 아니고 , 기자가 단군조선에 망명한후 약 730년이 지난 후에, 그의 후손인 기후씨가 변한의 69대 왕이 된 것이다. 따라서 기자(箕子)가 조선(朝鮮)의 왕이 된 사실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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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기자를 다른 이름으로 서우여(徐于餘)라고도 한다하는데, 만약 기자의 이름이 서우여이기때문에 ‘기자조선’이란 말이 나왔다면, 그것은 동명이인 (同名異人)으로 역사의 기록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한단고기>의 기록를 보면, 단군조선 제21대 소태단군(蘇台壇君: BC 1337)이 나이가 많아 어지러워진 국정을 감당할 길이 없어, 종친인 서우여에게 국정을 맡기려 했다. 제22대 단군(壇君)이 된 색불루(索弗婁) 단군(BC1285)의 반란으로 좌절된다.
이 서우여는 단군조선(진한)의 19대 종년단군(BC1435)의 동생인 청아왕종선의 증손으로 색불루에게 반기를 들어 군사를 일으키려고 하자, 색불루는 서우여에게 변한을 다스리는 권한을 줄테니 싸움을 그치자고 했다.
서우여가 이 제안을 받아들여 변한(변조선)의 30대 왕이 된다. 이때가 BC1397년의 일이다. 변한의 30대 왕인 서우여(徐于餘)는 기자(箕子)가 아니다. 동명이인이며 약 163년간의 연대차이가 난다.
여섯째: <서경書經> ‘홍범편’에 은(殷)나라 기자(箕子)가 주나라 무왕(武王)에게 잘못을 고치도록 말한 글로써, "天乃錫禹洪範九疇(천내석우홍범구주) 왕검 단군으로부터 하나라 우왕이 신서(神書)인 홍범구주, 즉 9가지 규범을 받았다."라고 되어있어, 주(周) 무왕이 홍범구주를 배척하므로 기자가 무왕과 변론하고 기자의 조상이 살던 변조선(弁朝鮮)땅으로 도망간 것이다.
당시 변조선(변한)땅은 현 산서성(山西省)이며 기자(箕子)의 선조가 살았다는 곳은 산서성 태행산(太行山) 부근이다. 다시 말하면 기자의 선조 역시 단군조선의 백성이었다..
기자가 조선으로 도망한 것은 자신이 살고있던 은나라가 은(殷)나라의 제후였던 주(周)나라에 망한 동시에 은나라 국교(國敎: 한 나라의 근본 종교)인 ‘수두교’가 주나라 무왕에 의해 압박을 받으므로 ‘수두교’의 종주국(宗主國)이며 조국(祖國: 조상의 나라)인 단군조선 (壇君朝鮮)으로 돌아온 것이다.
주(周)의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임명)했다는 <사기>의 기록은 진실 (眞實)이 아니며, “기자조선이 있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변조선(변한) 땅에 대대로 살던 기자(箕子)의 40대 후손인 기후가 쿠테타(Coup detat:무력정변) 로 변조선 왕이 되어 6대를 내려가 기준(箕準)에 이른다. 연(燕: 황하아래 하남성河南省에 있던 아주 작은 나라)나라 왕 노관이 한(漢)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할 때, 노관의 부하 인위만(衛滿)이란 자가 변조선에 망명을 요구했으나 단제(壇帝: 북부여 해모수)께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변조선왕 기준이 실수하여 위만을 박사(博士)로 삼고 상.하 운장을 떼어 위만에게 봉(封)했다. 강도(强盜) 위만이 망명 온지 불과 3년만에 변조선을 멸망시킨다. 이때 기준(箕準)이 위만에게 쫓겨 한(韓: 마한)의 땅에서 한왕(韓王)이 되어 자신의 성(姓)인 기씨(箕氏)에서 한씨(韓氏)로 바꾸고, 자신의 40대 조상인 기자(箕子)를 문성대왕으로 추존하며, 모든 기씨 조상을 한왕(韓王)으로 추존(推存: 추앙하여 존경함)한다.
그리하여 기준(箕準)은 청주한씨(淸州韓氏)의 시조(始祖)가된다. 청주(淸州)는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가 아니고, 지나대륙 산서성(山西省) 상당으로 현 장치시(長治市)이다.
이렇게 추존된 기자(箕子)와 청주한씨 후손들이 이씨조선의 사대주의자(事大主義者)들과 함께 엉터리 기자조선(箕子朝鮮)을 만들게 된다. 그후 일본X들과 일제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동이배달한민족사 (東夷倍達韓民族史)가 왜곡 날조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