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까지도 우리는 세종대왕(世宗大王)이 한글을 창제(創製)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것은 큰 잘못이다.
단군조선(壇君朝鮮) 제3대 가륵(嘉勒) 단군 원년인 BC 2181년 에 ‘을보’"에게 명하여 가림토 38글자를 만들게 했다 고 사서(史書)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에는 이글을 향서(鄕書), 국서(國書), 가명(假名)등으로 불렀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 시대를 거쳐 고려때까지 사용되어 오다가 고려(高麗) 중엽때 이 글자를 ‘이두문(吏頭文)’이라고 고쳐 불렀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걸안족의 걸안문과 여진족의 여진문도 이 ‘이두문’을 모방한 것이었다. 단재(丹齋) 신채호 선생이 지은 <조선상고사>에도 “진흥왕 순수비 같은 옛비에도 이두문으로 적은 시(詩)가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세종대왕(1418 – 1450) 때는 이 이두문을 언문(諺文) 또는 ‘암클’이라고 불렀다. ‘언문’이란 “상놈의 글”이란 뜻이며 ‘암클’이란 여자들이 사용한 글자란 뜻으로 사대주의의 극치를 이룬, 당시의 우리글을 비하(卑下)하여 부르던 이름이다.
<세종실록>의 기록에 “形而字倣古篆(형이자방고전) 형태는 옛글자를 본떠 만든 글자다”라고 되어 있고, 당시 집현전 부제학이던 최 만리의 상소문의 기록을 보면, “此斯諺文前朝有之 諺文계本文字非新字也(차사언문전조유지 언문계본문 자비신자야) 이 언문은 전조(고려조高麗朝)부터 있었던 것이며, 언문 모두로 되어있는 본 글자 (세종대왕이 창제했다는 이 글자)는 새로운 글자가 아니다” 라고 하였다.
또한 정 인지(1396 – 1478)의 <발원문>에도 “글자의 모양은 옛날 전자의 모양을 본떳고 소리를 따랐다. 자음은 일곱 가락에 어울리게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한글이 창제(創製 처음으로 만들어짐)된 것이 아님을 잘 나타내고 있다.
1894년 고종31년 갑오개혁(甲午開革)후 이 언문(諺文)을 국문(國文)이라고 고쳐 부르다가 1913년 주시경(1876 – 1914) 선생에 의해 ‘한글’이란 이름으로 불러지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한글’이라고 부르지만 현재(現在) 우리와 똑같은 글을 사용하고 있는 북한에서는 ‘조선어 자모’라고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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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한글이 1443년 12월에 세종대왕이 28글자를 창제했다고 믿는 것은 잘못이다. 그후 어떤 이유에서 인지 4글자는 없어지고 지금은 24글자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한글은 단군조선(壇君朝鮮)때인 BC 2181 년에 만들어진 글자로 4,192년(2011년 현재)의 장구(長久)한 역사를 지닌 자랑스런 글자다.
이라크(Iraq)의 유프라테스강(Euphrates River)과 티그리스강(Tigris River) 사이에서 약 500년간 소가 끄는 쟁기를 사용하여 농사을 짓고 살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으킨 슈메르 민족 (Sumerians)의 글자(설형문자, 쐐기문자 혹은 Cuneiform system of writing)가 우리 한글과 기본글자의 뜻이 같다면 이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1940년 7월 경북 안동에서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에 정 인지가 쓴 서문(序文)끝에 1446년 9월 상순(上旬)이라고 적혀 있는 날짜에 근거하여 한글의 역사를 2011년 현재 565년으로 보는 견해(見解)도 있고 세종실록에는 1443년 12월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한글 창제의 진짜 역사가 아니다.
오늘날 한글을 널리 보급한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의 공적은 높이 평가할 일이지만 어떤 점에서는 본래 38글자였던 것을 28글자로 축소했다는 비판을 받을 만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