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째: 신라의 금성(金城)을 포함한 모든 도읍지는 한반도에 없었다.
신라는 992년 동안 도읍지를 최소한 10번 이상 옮긴 것으로 보인다. 신라 최초의 도읍지인 금성(金城)은 감숙성(甘肅省) 난주(蘭州)이다. 이곳이 바로 비단길(Silk road)을 연 곳으로 난주는 경도 103.545도와 위도 36.343도에 위치한 곳이다. 신라 김씨의 시조로 알려진 김일제(金日磾: 김알지의 중시조)는 흉노 조정(朝廷)에서 왕을 하던 휴도왕(休屠王)의 아들로 전한(前漢: BC202-AD8, 섬서성 서안)에서 벼슬을 하던 사람이다. 수, 당나라 때 부르던 흉노족(匈奴族)은 당시 감숙성과 섬서성(陝西省) 북부에 살고 있어 흉노 조정, 김일제, 신라 금성은 서로 관련이 있어 보인다.
두번째의 금성은 산서성 현 임분시(臨汾市)로 한(漢)나라의 왕망(王莽: BC45-AD23)이 전한(前漢)을 멸하고 신(新)나라를 세울 무렵 감숙성 난주에 있던 신라는 난리를 피해 요동(遼東: 경도 110도의 황하 동쪽)인 산서성(山西省) 임분(臨汾)으로 옮겨 제2의 금성을 세운다. 임분은 단군조선을 세운 왕검 단군의 도읍지(都邑地)인 평양성(平壤城)이 있던 곳으로 이곳이 진한(辰韓: 진조선)에 속한 곳이다. 그후 신라는 영토를 넓혀 산서성 남부 패수현의 원곡 일대의 낙랑땅까지 차지하였으나 고구려에 임분의 금성(金城)을 빼앗기고 2대 남해차차웅 20년(AD23)과 3대 유리 이사금 사이에 지나(支那)의 동쪽인 강소성(江蘇省) 서북 연수현으로 도읍을 옮기며 금성도 함께 옮긴 것으로 보인다.
그후 월성(月城)과 명활성(明活城)에 도읍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문무왕 20년(680)에 가락국이 있던 김해(절강성 현 임해)를 소경(小京: 작은 서울)으로 삼았으며 그후 35대 경덕왕(景德王) 16년(757)에는 전주, 양주, 웅주, 한주, 삭주 5곳에 도읍지(都邑地) 를 두었다. 이들 도읍지는 모두 한반도가 아닌 지나대륙(支那大陸)에 있었다. 이런 주장은 <삼국사기>, <중국고금지명대사전>, <대당고김씨부인묘명>, <수서>, <구당서>, <신당서>, <북사>등에 근거한 것이다.
● 둘째: 낙랑(樂浪)은 산서성에 있다.
사서(史書)들의 기록에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의 활동 무대가 한반도가 아닌 지나 대륙인 것으로 <삼국사기: 김부식>, <삼국유사: 김견명>, <후한서: 범엽>, <구당서: 유후>, <신당서: 송기, 구양수>, <목천자전: 유효표>, <자치통감: 사마광>등에 기록되어 있다.
한가지 예로 <구당서>에, 新羅國 本弁韓苗裔也 其國在漢時 樂浪之也 東及南方 俱限大海 西接百濟 北隣高麗 東西千里 南北二千里 (신라국 본변한묘예야 기국재한시 낙랑지야 동급남방 구한대해 서접백제 북린고려 동서천리 남북이천리) “신라국은 본래 변한의 후예다. 그 나라는 한(漢)나라가 있을때 낙랑(樂浪: 하남성 낙양洛陽 북부를 포함하여 산서성 남,동부 패수浿水가 흐르는 패수현의 원곡일대) 땅에 있었다. 동쪽과 남쪽은 모두 큰 바다에서 끝나고 서쪽으로는 백제와 접하고 북으로는 고려(고구려)가 있다. 동서로는 1천리이고 남북으로는 2천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반도(韓半島)는 동서가 672리 남북이 2,400리 정도이고, 우리가 배운대로 경상남북도가 신라(新羅)이고 전라남북도와 충청도가 백제(百濟)라면 경상도에서 전라도까지 동서(東西)가 어찌 1천리가 되며 경상북도 위쪽은 고구려(高句麗) 인데 남북(南北) 2천리란 말인가! 이런 엉터리를 민족사(民族史)라고 가르치고 배우고 있으니 가슴 아픈 일이다. 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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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째: 신라 왕들의 묘는 대륙에 있다.
신라왕(新羅王)들의 묘(墓)가 대륙(大陸)에 있다. 1대 혁거세거서간 묘, 2대 남해차차웅 묘, 3대 유리이사금 묘, 5대 파사이사금 묘가 강소성(江蘇省) 사릉(원)(蛇陵園)에 있고, 9대 벌휴이사금 묘가 강소성 연수현(連水縣)에 있고 7대 선덕왕 묘, 31대 신문왕 묘가 강소성 낭산(狼山)에 있고 34대 효성왕 묘가 강소성 법류사(法流寺)에 35대 경덕왕 묘가 강소성 모지사(毛祗寺)에 55대 경애왕 묘가 강소성 남산(南山)에 있다. 25대 진지왕 묘는 사천성 영경사(永敬寺)에 29대 태종무열왕 묘는 사천성 영경사(永敬寺)에 38대 원성왕 묘는 사천성 봉덕사(奉德寺)에 있다. 13대 미추이사금 묘가 하남성 임형현 대릉(大陵)에 있고 41대 헌덕왕 묘는 산동성 천림(泉林)에 있으며 51대 진성여왕 묘는 안휘성 황산(黃山: 백제의 계백장군이 신라와 마지막 싸운곳) 에 있다. 49대 헌강왕 묘와 50대 정강왕 묘는 호북성 보제사(菩提寺)에 있다.
신라는 56명의 왕들중 18분의 묘(墓)가 지나대륙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30대 문무왕 묘는 동해 큰바위 위이고 37대 선덕왕 묘는 동해에 화장했으니 모두 20분의 묘지가 밝혀진 셈이다. 상해(上海)가 있는 강소성(江蘇省)에 10분의 묘, 사천성(四川省)에 3분, 하남성(河南省)에 1분, 산동성(山東省)에 1분, 안휘성(安徽省)에 1분, 그리고 호북성(湖北省)에 2분의 묘가있다. 신라(新羅) 제 1대 혁거세거서간 (赫居世居西干)의 장지(葬地)에 관한 <삼국사기> 의 기록을보면, 在曇巖寺北 (재담암사북) “담암사 북쪽에 있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에는, 在曰雲岩寺南四里(재왈운암사남사리) “ 이르기를 운암사 남쪽 4리에 있다.”로 <삼국사기>의 기록과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이 서로 다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재왈운암사남사리(在曰雲岩寺南四里)”에서 ‘가로왈(曰) 자를 ‘구름운(雲) 자 위에 붙여서 ‘구름낄 담(曇)’자로 조작했고, ‘남사리(南四里)’를 ‘북(北)’으로 날조 (捏造)해 놓았다. 일본X들이 우리 역사서인 <삼국사기>를 조작, 날조한 또 하나의 실례인 것이다. 그들이 조작한 ‘담암사曇岩寺’는 어디에도 없고 강소성 상해근처에 있는 호구산(虎丘山)에 사릉(蛇陵)이 있고 그곳에 ‘운암사雲岩寺’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인들이 <삼국사기>는 조작을 했는데 <세종실록지리지>는 미처 변조하지 못한 탓이다.
● 네째: 수두교 유행은 지나대륙이다.
단군조선(壇君朝鮮)때의 국교인 ‘수두교(일명 삼신오제교)’가 있다. 단군조선과 동시대(同時代)인 요(堯), 순(舜), 하(夏), 은(殷: 상), 주(周)나라 때까지 지나대륙(支那大陸)에 ‘수두교’의 일반 신앙이 널리 유행한다. <오월춘추>의 기록이다.
“하(夏)나라를 세운 우(禹)가 홍수를 다스리기 위해 8년동안 수고했으나 실패하여 남악형산(南嶽衡山: 호남성 형양시 남악구에 있는 산으로 해발 1,300.2m)에서 백마(白馬)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니 꿈에 현이(玄夷: 북쪽에 사는 동이로 산서성에 있던 단군조선을 뜻함)의 창수사자(蒼水使者: 왕검의 아들 부루)가 나타나 말하기를, 구산(九山: 구산은 없고 구산진이 산동성에 있음)의 동남쪽의 도산(塗山: 안휘성 숙주로 비정)에 신서(神書)가 있으니 석달동안 재계(齋戒: 마음과 몸을 깨끗이 하고 부정한 일을 멀리 하는 일)하고 신서를 꺼내보라 하여 우(禹)가 그대로 하고 금간옥첩(金簡玉牒)의 신서를 얻어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을 배워 홍수를 다스리고 주신(州愼: 단군조선)의 덕을 고맙게 생각하여 정전(井田: 농지 개혁)를 제정하고 율도량형(律度量衡: 길이, 용적, 무게등의 단위 법)의 제도를 만들었다.”
<오월춘추>의 기록으로 보아, 단군조선과 관련이 깊은 안휘성, 호남성과 인접한 지역인 강소성,호북성, 절강성에 ‘수두교’가 유행했으며 동황태일(東皇太一) 즉, 단군왕검께 제사(祭祀) 지내는 풍속이 가장 유행한 곳이 바로 호북성(湖北省), 절강성(浙江省), 강소성 (江蘇省)으로 단군조선의 유민(流民)들이 세운 신라(新羅)가 바로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 땅이라고 믿고 있는 한반도 경상남북도에 ‘수두교’가 유행했다는 기록은 없다.
● 다섯째: 66번의 일식으로 본 신라의 강역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를 지은 서울대학교 박창범 교수에 의하면, <삼국사기>에 기록된 신라(新羅)의 일식(日蝕)이 총 66개로 그중에서 53개가 사실로 입증(立證)되어 80%의 실현률(實現率)을 보인다고 한다. 신라의 일식 기록은 서기 201년전과 서기 787년이후로 양분되는데 서기 201년 이전의 신라의 일식 최적 관측지는 양자강(揚子江) 유역이며 서기 787년 이후의 최적 관측지는 한반도 (韓半島) 남부라 한다. 신라(新羅)의 주된 강역(疆域)은 대륙의 강소성(江蘇省), 안휘성 (安徽省), 호북성(湖北省), 절강성(浙江省)으로 이곳이 바로 양자강(揚子江: 장강) 유역이며 당시 신라의 영토(領土)를 천문학 (天文學)이란 과학적인 방법으로 증명(證明)시킨 한 예(例)라 할 수 있다. 고구려의 영토였던 한반도는 고구려가 망한후 신라 35대 경덕왕 때부터 신라 영토의 일부가 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한반도에 있지않았다.
● 여섯째: 운주(運州)는 한반도가 아니다.
“신라 56대 경순왕 8년(934) 가을 9월에 운주(運州)지경(地境)의 30여 군(郡), 현(縣)이 태조(太祖: 고려 왕건)에게 항복했다.”라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운주(運州)는 현 산서성(山西城) 황하강(黃河江)이 꺾이는 지점에 있는 영제현(永濟縣) 동북으로 현 대륙지도상에 운성시(運城市)이다. 이 운성시(運城市) 서남쪽이 바로 그 유명한 탁록(涿鹿: 산서성 서쪽 최남부 운성염지(運城鹽池가 2009년 현재 해지解池로 이름이 바뀌고 그 일대인 당시의 탁록은 지금은 해주解州라 부름)으로 치우천황과 황제헌원이 10년간 싸운 곳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삼국사기>에는 운주(運州)를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洪城)’이라고 친절하게 주해를 달아 놓았다. 그렇다면 이곳 홍성 근처에서 지나인(支那人)들이 자신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헌원(軒轅)이 치우(蚩尤)황제와 BC2707부터 BC2697까지 10년간 73회를 싸웠다는 말과 같다. 이웃집 닭이 웃을 일이다. 이것 또한 일본인들과 식민사학(植民史學)의 역사 날조(捏造)인 것이다. 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
● 일곱째: 임나(任那)는 절강성에 있다.
한반도 김해에 6개의 가락국(駕洛國)중 금관가락국이 제일 큰데 이 금관가락국이 있었던 곳인 임나(任那)에 야마토(大化) 일본이 궁가(宮家: 미야께)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해 놓고 백제, 신라를 속국으로 만들었다는 “임나 일본부설”로 일본인들은 한반도 남쪽 가야국이 있었던 곳에 임나가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한반도(韓半島) 남쪽에는 가야국(伽倻國)도 신라(新羅)도 없었다. 당시 김 수로왕의 가락국(駕洛國: 가야국伽耶國)은 절강성(浙江省)에 있었다. 임나는 무지절독 (武持節督)으로 ‘무사나 무인들이 뭉쳐서 이루어진 군사기지 같은 것’이다. 임나(任那)는 지나대륙 (支那大陸) 절강성(浙江省) 임해(臨海: 김해金海)가 있는 곳에 있었으며 백제(百濟)의 속국으로 백제가 망(亡)하면서 임나(任那)도 망한다. 이들의 주장은 거짓으로 임나는 한반도에 있지도 않았다.
● 여덟번째: 경주에는 왕들의 묘와 묘비가 없다.
한반도 경상도에 1,000년 사직(社稷: 나라)의 신라(新羅)가 있었다면 신라왕들의 묘(墓)가 모두 경상남북도에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한반도 경상남도 경주(慶州)에 1,000년동안 도읍지(都邑地)였던 왕궁터, 56명의 신라왕들의 묘(墓), 왕들의 묘비(墓碑)가 있어야 한다.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고낭포리에 신라(新羅)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의 릉(陵)이 있고 비각(碑閣)이 있다고 말할 분들도 있으리라 본다. 그러나 그 묘(墓)는 진짜 묘가 아니고 비(碑)가 있다면 그 비석(碑石)은 이씨조선때 세운 비(碑)가 분명하다. Carbon-14(탄소년대 측정법) 방법으로 한반도(韓半島)에 있는 모든 묘지와 비석을 년대측정(年代測定) 하면 간단히 풀리게 될 문제라 본다.
한반도 경상남북도는 말할 것도 없고 한반도 (韓半島) 어느곳에도 신라왕의 묘지(墓地)가 있다고 기록된 사서(史書)는 없다. 천년 사직(社稷: 나라)인 한반도 경주에 왕궁터도, 황제(皇帝: 당나라 고종이 신라 29대 무열왕 김춘추를 ‘태종황제’ 라 했다)들의 묘도, 묘비도 없다는 것은 무엇을 시사(示唆)하는가! 촌부(村婦: 시골 여자)가 죽어도 묘비를 쓰는데 하물며 천자국(天子國)인 대신라국(大新羅國) 왕들의 묘(墓)와 묘비(墓碑)가 없다니…. 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태종 무열왕 www.ko.wikipedia.org
● 아홉번째: 계백장군이 싸운 황산(黃山)은 연산 벌판이 아니다.
<삼국사기> 제2권 백제6, 의자왕20년(660) 5월의기록을 보면, “ 당(唐)나라와 신라 군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말을 듣고 왕(의자왕)은 계백(階伯) 장군을 보내어 결사대 5천명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에 나아가 신라(新羅) 군사와 싸우게 했다. 4번 싸워 4번 다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서 마침내 패전하여 계백이 전사했다. 이때 계백(階伯)장군이 마지막으로 싸운 황산(黃山)은 한반도 충청남도 연산 벌판이 아니고 지나(支那)대륙에 있다. 안휘성(安徽省), 절강성(浙江省) 강서성(江西省)이 서로 만나는 곳에 황산(黃山)이 있고 당시 백제(百濟)의 사비성(泗沘城)은 황산 바로 윗쪽 현 대륙지도에 양자강(揚子江) 바로 밑 청양(靑陽)이라는 곳이다. 현 대륙지도(大陸地圖)에는 황산(黃山: 경도 118.276도 위도 29.926도의 위치)이라고 글자 한자 틀리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신라는 대륙에 있었다.
● 열번째: 이하(泥河)와 당항성(黨項城)은 한반도에 없다.
“20대 자비마립간 11년 (AD468) 봄에 고구려와 말갈(靺鞨)이 북쪽 변경의 실직성(悉直城)을 습격했다. 가을 9월에 15세 이상된 하슬라(何瑟羅) 사람을 징발하여 성(城)을 이하(泥河)에 쌓았다.”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이하(泥河)는 하남성(河南省)과 안휘성(安徽省) 사이로 하남성에 있는 강(江)인데 이하(泥河) 바로 위에 항성(項城)이 있어 이 항성이 이때 쌓은 성(城)으로 보인다. 그 유명한 당항성(黨項城)이 바로 이 항성(項城)을 일컫는 것이다.
이 당항성은 신라가 당시 섬서성(陝西省) 서안 (西安)에 있는 당(唐) 나라로 들어가는 관문(關門)으로 27대 선덕왕 11년(642)에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의 연합군에게 이 당항성(黨項城)을 빼앗김으로써 김춘추가 이민족(異民族)인 당(唐)나라 고종 이치(李治)에게 “당(唐)나라로 들어오는 당항성을 고구려와 백제에게 빼앗겨 더 이상 당나라에 들어올 수 없으니 신라와 당이 연합하여 이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자”는 동이배달한민족(東夷倍達韓民族)의 민족상잔(民族相殘)의 비극의 불씨가 바로 이 이하(泥河)에 있던 당항성(黨項城) 때문으로 보여진다.
현 대륙지도 하남성(河南省)에 항성(項城)과 이하(泥河)가 글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 한반도 어느곳에 이하(泥河)란 하천과 항성(項城)이란 지명이 있는지? 식민반도사학(植民半島史學)에게 정중히 묻는 바이다.
● 열한번째: 신라와 말갈이 싸운 곳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제6대 지미이사금 14년(125) 봄 정월과 가을 7월에, 제7대 일성이사금 4년(137) 봄 2월과 6년(139) 8월에, 제10대 내해이사금 8년(203) 겨울 10월에, 제17대 내물이사금 40년(395) 가을 8월에, 제20대 자비마립간 11년(468) 봄에, 제21대 소지마립간 2년(480) 11월과 3년(481) 3월에, 약 356년 동안에 걸쳐 9차례 말갈(靺鞨)과 전쟁을 한 것으로 되어있다. 다음은 제7대 일성이사금 4년(137)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四年春二月 靺鞨入塞 燒長嶺五柵(사년춘이월 말갈입새 소장령오책) “ 4년 봄 2월에 말갈이 변방에 쳐들어와 장령에 있는 다섯개의 목책(木柵: 나무 말뚝을 박아 만든 울타리)를 불태웠다.” 여기에서 언급된 장령(長嶺)은 장령진(長嶺鎭)과 같은 장령(長嶺)으로 보이며, 시중에 나와 있는 <삼국사기>에는 “장령진(長嶺鎭)은 경주 동쪽 25리에 있다.”라고 너무도 친절하게 해설을 해놓았다. 경주 동쪽 25리라면 불과 12km 떨어진 곳인데 경주 코앞이 신라의 변방(邊方)이라고? 그렇다면 신라(新羅)와 고구려(高句麗) 중간 지점인 경상북도나 강원도 부근에 말갈(靺鞨)이 살고 있었다는 어이없는 이야기가 성립되는 것이다.
원래 단군조선(壇君朝鮮)은 연방국(聯邦國)으로 단군조선 말기에 ‘조선족’에서 갈려나간 지파(支派)로 예(濊), 읍루(揖婁), 물길(勿吉), 말갈(靺鞨)로 부르다가 말갈에서 몽고족, 속말갈, 흑수말갈로 나누어지며 흑수말갈에서 여진족(女眞族)으로 여진족에서 생여진(生女眞), 숙여진(熟女眞)이 생기고 생여진에서 만주족(滿州族)으로 이어지는 족속(族屬)을 말한다. 말갈(靺鞨)을 지금의 내외(內外) 몽고에 살고 있던 몽고족(蒙古族)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식민사학이나 반도사학의 관점(觀點)에서 보면 한반도의 전라도와 충청도는 백제(百濟), 경상남북도는 신라(新羅), 그리고 백제와 신라 윗쪽은 고구려(高句麗)의 영토다. 그런데 한반도에 있던 신라(新羅)가 말갈(靺鞨)과 356년에 걸쳐 9번이나 전쟁을 했다니 대체 말갈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했는지, 남의 땅을 빌려서 싸웠다는 것지 요령부득이다. 물론 식민반도사학(植民半島史學)의 원조(元祖)이자 바이블(Bible: 권위있는 서적)이라고 불리우는 <조선사> 37권 어디에도 한반도의 고구려, 백제, 신라 사이에 말갈(靺鞨)이 살고 있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신라(新羅)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열두번째: 당(唐)나라와 싸운 석성(石城)은?
“신라 제 30대 문무왕(文武王) 11년(671) 6월에 왕(문무왕)은 장군 죽지(竹旨) 등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백제 가림성(加林城)의 벼(식물: Oryza sativa)를 밟아버리게 했으며 마침내 당(唐)나라 군사와 석성(石城)에서 싸워 적군(당나라군) 5천3백 명의 목을 베고 백제장군 2명과 당(唐)나라의 과의(果毅: 군사의 장교급 정도를 뜻한 것으로 보임) 여섯 명을 사로잡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이다. 당나라의 도성(都城)인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에서 백제땅 충청도 부여까지는 직선거리 약 3,744리이다. 한반도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식민반도사학(植民半島史學)의 이론대로라면 한반도 경상도에 있던 신라와 싸우기 위해 당나라는 3,744리의 머나먼 길을 군사와 말을 배에 싣고 황해를 건너와서 전쟁을 했다는 것인데…, 만화같은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 전쟁에서 사대주의자(事大主義)들에게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 대목은 당(唐)나라 군사 5천3백명을 참수(斬首: 목을 벰)했다는 엄청난 기록이다. 당(唐)나라의 참패(慘敗)인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석성(石城)은 강서성(江西省)과 복건성(福建省) 사이에 있는 지명이다. 원래 백제(百濟)의 영토였으나 660년 나당(羅唐) 연합군에게 백제가 망한 후 신라의 영토가 된 곳으로 당(唐)나라는 신라를 배신(背信)하고 신라마저 정복(征服)하려고 백제의 부흥군(復興軍)을 도와 신라(新羅)에 도전(挑戰)하므로 발생한 전쟁으로 보인다. 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
● 열세번째: 복건성에는 아직도 신라의 흔적이
<삼국사기> ‘제21대 소지마립간’의 기록에, 秋七月 置臨海長領二鎭 以備倭賊 (추7월 치임해장령2진 이비왜적) “가을 7월에 임해와 장령에 2진을 설치해서 왜적(倭賊: 일본의 전신으로 당시 복건성의 맞은편인 대만에 있을 때임)에 대비했다.” 당시 신라의 핵심 영토는 강소성, 안휘성, 호북성, 절강성, 복건성이다. 복건성(福建省)에는 신라구(新羅區)란 지명이 있었고, 2009년 현재의 복건성 자체 지도에도 신사(新祠), 신우(新圩), 신현(新縣), 신천(新泉), 라암(羅岩), 라원(羅源), 라교(羅橋), 라방(羅坊)등 신라의 신(新)자, 라(羅)자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다.
<태백일사> ‘고구려본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고구려 보장 12년(646)에 신라의 백성을 천주(泉州: 복건성에 있으며 왜倭가 있던 대만과 마주보는 곳으로 경도 118.525도 위도 25도에 위치함)에 옮기고 이로서 알맹이로 삼았다. 이 해(年)에 백제가 조공을 하지 않아 병력을 파견하여 요서의 진평군을 취하고 백제군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복건성과 인접하는 절강성(浙江省) 임해(臨海: 김수로왕의 가락국이 있던 김해金海)에는 신라산(新羅山)이 있다고 <중국고지도>와 <대청일통지>에 기록하고 있다. 신라가 망하고 1,070여년이 지난 지금도 지나대륙(支那大陸)에 신라와 관련된 지명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당시 이곳이 신라의 영토였음을 입증하는 것이며 신라(新羅)는 한반도(韓半島)에 있지 않았다는 증거다.
● 열네번째: 한반도의 현 지명들은 신라가 망한후에 생긴 것들이다.
<삼국사기> ‘잡지 제6지리 4’에 의하면, “삼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의 지명(地名)만 있고 위치는 자세히 알 수 없는 땅들” 358곳 중에 우리 한국사람들의 귀에 너무나도 익숙한 지명들로 해주(海洲), 강릉(江陵), 하동(河東), 부평(副平), 강남(江南), 해남(海南), 용산(龍山), 대구(大丘), 부산(釜山), 마포(馬浦)등의 지명이 기록되어 있다. 필자는 한국내의 지명들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더 많은 이름을 발췌하지 못하고 필자의 생각으로 한반도의 지명들이라고 믿어지는 지명들만 10개를 소개한 것이다. 만약 한반도 경상남북도에 신라가 있었다면 신라의 영토안에 있었던 대구와 부산(釜山)의 위치를 자세히 알 수 없다는 말인데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기 그지없다.
삼국사기는 고려 17대 인종(仁宗) 23년(1145)에 김부식 어른이 쓴 것이다. 고려 인종은1141년에서 1165년 까지 24년간 황제 (皇帝)로 있었던 분이다. 신라가 935년에 망하고 210년 후에 <삼국사기>가 지어졌다. 신라가 망하고 약 1,070년이 지난 지금도 지나대륙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당시의 지명들이 혹은 지명들의 흔적이 있는데, 신라가 망한지 불과 210년 후에 당시 신라의 영토라고 믿고 있는 한반도 경상남북도 안에 있는 지명의 위치를 알 수 없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한마디로 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크게 웅변(雄辯)하는 것이 된다.
▲ 태조 왕건 www.ko.wikipedia.org
● 열다섯번째: 경주(慶州)는 경상북도에 없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56대 경순왕 9년(935)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11월에 왕은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서울을 떠나 태조(太祖: 고려 왕건)에게 귀순했다. 꽃다운 수레와 훌륭한 말이 30여리에 뻗쳐 길은 사람으로 메워졌으며 구경꾼들이 쭉 둘러서 있었다. 태조는 교외에 나가서 영접해 위로하고 대궐 동쪽에 가서 좋은 집 한구(區: 구역)를 주고 맏딸 낙랑공주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다. 12월에 왕(경순왕)을 봉하여 정승공(正承公)을 삼으니 그 지위는 태자의 위에 있었다. 봉록 1천석을 주고 시종한 관원과 장수들을 모두 채용해 주었으며 신라를 고쳐 경주(慶州)라 하여 공(公)의 식읍으로 삼았다.”
또한 <삼국사기> ‘잡지 제3 지리 1’에는, 末王金傅 以國歸我太祖 以其國爲慶州(말왕김부 이국귀아태조 이기국위경주) “마지막 왕 김부(경순왕의 이름)는 나라를 가지고 우리 태조(고려 왕건)에게 귀순하매 그 나라(신라)를 경주라 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한반도 경주가 신라의 1,000년 동안의 도읍지(都邑地)로 배웠고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보는바와 같이 경주(慶州)는 신라가 망하고 난 후에 고려(高麗)를 세운 왕건(王建)이 만들어 준 이름인 것이다.
원(元)나라 때 탈탈이 지은 <요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開州 鎭國軍 節度 本貊地 高麗爲慶州 渤海爲東京龍原府 有宮展 都督慶 鹽 穆 賀四州事 (개주 진국군 절도 본맥지 고려위 경주 발해위동경용원부 유궁전 도독경 염 목 하사주사) “개주는 진국군이고 절도사를 두었다. 본래는 맥(고구려를 뜻함)의 땅이었으며 고려가 경주라 했다. 발해(대진)의 동경 용원부이며 궁전이 있다. 도독을 경주 염주 목주 하주 4곳에 두었다.”
<요사>에서도 <삼국사기>처럼 고려가 경주라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발해(대진)의 동경 용원부라고 했다. 대조영이 세운 대진(大震: 발해)은 5경(다섯 곳의 수도)이 있었는데 동경 용원부가 바로 요녕성(遼寧省) 지금의 요양(遼陽)이었다. 2009년 대륙 지도에는 요양 동남쪽에 동경릉(東京陵)의 지명도 있다. 대진(大震)의 황제묘나 신라 경순왕의 묘인지 누가 알겠는가? 경주는 요녕성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