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황제 이세민이 요수를 건너자 다리를 걷어치워 사졸들의 결심을 굳게하고, 마수산(馬首山)에 진을 쳤다고 기술하고 있다. 마수산에 대해서는 제3장 제2절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으니 간략하게 부언하면 안시성과 환도성이 있던 환도산으로 당시는 마수산이라 불렀으나 지금은 화염산(火焰山)이라 하며 산서성에 있는 여량산맥의 일부분을 뜻한다.
보장왕4년(645) 여름 4월의 <삼국사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여름 4월에 이세적은 통정(通定)에서 요수를 건너 현도에 이르니, 우리 성읍들은 크게 놀라 모두 성문을 닫고 스스로 지켰다. ...이세적과 강하왕 도종은 개모성(蓋牟城)을 쳐서 이를 함락시켜 1만명을 사로 잡았다.”
보장왕 4년(645) 여름 4월은 당나라 정관(貞觀) 19년(645) 여름 4월과 같은 날이다. 이 날자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먼저 <舊唐書(구당서)> 기록에 “여름 4월에 이적(李勣)의 군대가 요(遼)를 건너서 개모성(蓋牟城)으로 진격하여 성(城)을 빼앗고, 포로 2만명을 생포하였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新唐書(신당서)>에는 “4월에 [이]적(勣)이 요수(遼水)를 건너, 고[구]려가 모두 성(城)을 에워싸고 지켰다. ... [이]적(勣)이 개모성(蓋牟城)을 쳐 함락시켜 2만호와 식량 1십만석을 얻고, 그 땅을 개주(蓋州)로 삼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요수(遼水)로, <구당서>는 요(遼)로, 그리고 <신당서>는 요수(遼水)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를 번역한 이재호도 ‘요수’라고 주해하였다.
그런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中國正史 朝鮮傳 譯註 二(중국정사 조선전 역주 이)>에는 <구당서>의 ‘요(遼)’를 ‘요하(遼河)’라고 번역하는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 문헌사료에 근거하여 역사적 사실만을 고증해야 할 대한민국의 국사편찬위원회가 역사를 왜곡 날조, 조작하고 있는 한 가지 예임을 지적한다.
<구당서>의 요(遼)는 요수(遼水)로 산서성에 위치한 고구려의 요수 즉 압록수를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사편찬위원회는 오늘날의 요녕성에 위치한 요하를 지칭하였다.
요녕성의 요하는 당시 당나라가 침탈한 산서성에 있는 고구려의 요수(압록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별개의 하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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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천리장성 위치 연구> - 제35부
동년 5월자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장량은 수군을 거느리고 동래에서 바다를 건너와 비사성(卑斯城)을 습격했는데, 성은 사면이 매우 높았으나 다만 서문(西門)만은 올라갈 수 있었다. 5월에 성은 함락되고 남녀 8천명이 죽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바다를 건너 비사성을 습격”이라는 대목에 주목하자. 같은 날자의 기록을 <구당서>는 “5월에는 장량(張亮)의 부장(副將) 정명진(程名振)이 사비성(沙卑城)을 공격하여 빼앗고, 남녀 8천명을 생포하였다. 이날 이적의 군대가 요동성으로 진군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신당서>에는 “정명진은 사비성(沙卑城)을 공격하는데, 밤에 그 서쪽으로 침입하자 성(城)이 무너졌다. 8천명을 사로 잡아, 군사를 이끌고 압록수 위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적이 드디어 요동성을 포위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료비판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삼국사기>에는 ‘비사성’으로 기록된데 반하여 <구당서>나 <신당서>는 ‘사비성’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구당서>와 <신당서>에 언급되지 않은 ‘동래’라는 지명이 나타난다.
산동반도의 동래란 지명을 기록한 것은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한 바와 같이 평양성이 마치 한반도의 평양처럼 조작하기 위한 것이며, ‘사비성’을 ‘비사성’ 혹은 ‘사성’으로 바꾸어 기록한 것 역시 동이배달한민족사를 왜곡하기 위한 일제의 만행이 분명하다.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삼국사기>에만 ‘비사성’이라 기록되어 있고 다른 문헌사료에는 ‘사비성’이라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비성을 언급하고 있는 문헌사료들은 <舊唐書(구당서)>, <新唐書(신당서)>, <遼史(요사)>, <大事記續編(대사기속편)>, <欽定續通志(흠정속통지)>, <欽定日下舊聞考(흠정일하구문고)>, <欽定滿洲源流考(흠정만주원류고)>, <欽定盛京通志(흠정성경통지)>, <欽定續通典(흠정속통전)>, <冊府元龜(책부원귀)>, <玉海(옥해)>, <御定韻府拾遺(어정운부십유)> 등 모두 12종에 달한다.
“사비성(沙卑城)은 황하 북부 하남성 학벽시와 하북성 경계에 있는 현 악성수고(岳城水庫)로 대진국의 남경이며 홀한해의 홀한성이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지을 때 <구당서>와 <신당서>를 저본으로 하고 참고하여 지은 것이 분명한데 <삼국사기>를 잘 관찰해보면 여러 곳에서 이 같은 조작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동, 서, 남, 북의 방향을 거꾸로 뒤바꾸어 지리지명을 찾지 못하게 일본인들이 장난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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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천리장성 위치 연구> - 제36부
보장왕 4년(645) 5월과 9월 사이의 사건을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황제(당왕 이세민)는 안시성에 이르러 군사를 보내어 이를 공격하자 북부욕살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혜진이 우리군사와 말갈군사 15만명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원했다...
고연수는 듣지않고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서 안시성에서 40리 떨어진 곳으로 갔다... 그리고 황제가 행차한 산의 이름을 고쳐 주필산(駐蹕山)이라 하고, 고연수를 홍려경으로 삼고, 고혜진을 사농경으로 삼았다.”
주필산에 대한 <구당서>에는 “이어서 거동하였던 산을 주필산(駐蹕山)이라 이름하고, 장군으로 하여금 파진도(破陣圖)를 작성하게 하고... 고연수에게는 홍려경을 고혜진에게는 사농경을 제수하였다.”
<신당서>에도 “거동하였던 산을 주필산(駐蹕山)이라 이름하고, 파진도를 그렸으며, 전공을 기념하는 글을 돌에 새겼다. 그리고 [고]연수에게는 홍려경을 제수하고, [고]혜진에게는 사농경을 제수하였다”라고 하여 <신당서>, <구당서>, <삼국사기> 모두 당왕 이세민이 머물렀던 산의 이름을 주필산이라 했다는 것이다.
주필산은 안시성 전투 시 머물렀던 산으로 주필산의 위치를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즉 수산(首山)이다... 속칭 수산(手山)이다. 주필산은 안시(安市)에 있다.” 안시성 전투에서 이세민이 머물렀던 산이니 안시에 위치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중국역사지명대사전>도 비슷하게 기록하고 있다. “즉 수산(首山)이다...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머물렀던 산이라 이름 지어진 것이라 전한다.”
앞에서 함께 살펴본 바와 같이 고구려의 핵심 강역은 산서성이며 이곳에 위치한 안시성의[이] 전쟁에서 나타난 지명임으로 주필산은 반드시 산서성 안시성 부근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수산(首山)은 수양산의 다른 이름으로 산서성 남서부에 위치한다. 그러나 안시성과는 대략 300리 정도 떨어진 거리임으로 수양산을 주필산은 아니라고 본다.
인용문에서 안시성에서 40리 떨어진 곳으로 고연수가 군사를 이끌고 갔다고 했으니 주필산은 안시성과 약 40리 정도의 거리에 있어야 하고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도 “주필산은 안시에 있다.”하였으며
주필산의 주(駐)는 ‘말이 머므르다’, ‘말이 선채로 있다’, ‘머무르다’의 의미이며, 필(蹕)자는 ‘거동 필’자로 주필산이란 “임금이 거동하는 중간에 어가를 세워 머무는 산”이란 뜻으로 임금이 탄 말이 끄는 수레가 쉽게 올라갈 수 있는 높이가 낮은 산이어야 한다.
그런데 안시성 서남쪽으로 약 40-50리 떨어진 곳에 용문산(龍門山)이 있는데 높이가 불과 122m로 말이 끄는 수레가 쉽게 올라갈 수 있는 높이다. 논자는 지금의 용문산이 당시의 주필산이라고 주장한다. 주필산, 수양산, 압록수, 안시성의 위치를 다음 <그림 14>로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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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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