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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창현의 뉴욕 편지
가슴따뜻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중견기자의 편지. 1988년 Sports Seoul 공채1기로 언론입문, 뉴시스통신사 뉴욕특파원(2007-2010, 2012-2016), KRB 한국라디오방송 보도국장. 2006년 뉴아메리카미디어(NAM) 주최 ‘소수민족 퓰리처상’ 한국언론인 첫 수상, 2009년 US사법재단 선정 '올해의 기자상' CBS-TV 앵커 신디슈와 공동 수상. 현재 '글로벌웹진' 뉴스로(www.newsroh.com) 편집인 겸 대표기자. 팟캐스트방송 ‘로창현의 뉴스로NY’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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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119주기③] 1894년 美기자 고종과 대원군 단독인터뷰

글쓴이 : 노창현 날짜 : 2014-10-19 (일) 10:31:19



 

뉴욕의 ‘이브닝월드’ 세계특파원, 조선왕궁에서 명성황후도 만나


 

미국의 기자가 조선의 마지막 왕을 단독 인터뷰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같은 소리가 아닙니다. 지금으로부터 120년전인 1894년 12월3일 뉴욕의 이브닝 월드는 ‘세기의 인터뷰’ 기사를 전면 게재했습니다.


 

‘은둔의 왕국(Hermit Kingdom)’ 조선의 왕궁에 들어가 고종(1852-1919)을 알현하고 인터뷰한 것입니다. 이 기사의 톱 제목은 ‘조선의 왕이 말하다(Korea's King Talks)’입니다.


 


 

 


 

고종만이 아닙니다. 고종의 아버지인 대원군(1820-1898)과도 만나 별도의 인터뷰를 했습니다. 이 대단한 ‘인터뷰어’가 과연 누구일까요. 이브닝월드의 ‘세계특파원(world corespondent)’ 제임스 크레블맨이 그 주인공입니다.


 

그는 고종을 인터뷰하는 내내 왕의 뒤에서 병풍 너머로 바라보던 명성황후(1851-1895)에 대해서도 상세한 묘사를 해서 눈길을 끌었습니다. 또한 고종을 만날 때 옆에 왕세자(crown price)가 배석했다고 기술했습니다. 당시 스무살의 이척(순종 1874-1926)으로 추정됩니다.

 

 

 

 


 

이 기사엔 고종과 왕자, 명성황후, 대원군의 이미지와 고종을 알현한 근정전과 일본공사관 그리고 자신과 일본어 및 조선어 통역관을 그린 것 등 총 7개의 삽화가 함께 게재됐습니다.


 

이브닝월드의 보도는 고종과 대원군의 흥미진진한 인터뷰 내용은 물론, 경복궁 등 서울과 왕궁의 모습을 상세히 묘사하고 당시 궁중 내부의 음모와 암투, 일본과 중국, 러시아, 미국의 4대강국 틈바구니에 놓인 조선의 상황을 기자의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됩니다.


 

기사는 톱 제목아래 모두 7개의 부제들이 달려 있습니다. ‘세계특파원, 호소 요청받아’를 시작으로 ‘미국의 도움 모색’, ‘미국민에게 직접 호소’, ‘동방(조선)의 쓰라린 고통’, ‘미국은 (조선의) 첫 조약국, 보호 기대’, ‘고적함으로 뒤덮인 서울’, ‘은둔의 왕국, 전쟁과 음모로 유린되고 위협받아’ 가 이어졌습니다.


 

제목들만 일별해도 당시 조선이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황에서 국가적 존망(存亡)의 위기속에 직면해 있는지 잘 드러납니다.


 

영어권매체사료연구가인 워싱턴의 문기성씨는 “당시 조선에 대해 보도한 수많은 신문 사료들이 있지만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을미사변으로 이어지는 혼돈의 조선에서 권력의 최고 핵심부와 생생한 인터뷰를 나눴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소중한 사료가 아닐 수 없다”고 평가했습니다.


 

◆ 조선의 왕 “美국민이 도와달라” 간절한 호소


 

삽화속의 크레블맨 기자는 텁수룩한 수염의 당당한 체구로 모자와 부츠를 착용하고 있는 모습으로 한국에 있는 유일한 미국인 특파원이라고 소개됐습니다. 함께 있는 일본옷 차림의 사나이는 통역관, 삿갓을 쓰고 흰 옷차림은 조선인 하인으로 명시했더군요.

 


 

기사의 첫머리는 “왕국을 뒤덮은 위기와 생명을 위협받는 와중에 조선의 왕은 오늘 나에게 미국 국민들에게 도움을 직접 호소한다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장차 대한제국의 첫 황제가 될 일국의 통치자가 미국의 기자에게 호소해야 할만큼 상황은 급박했습니다.


 

고종은 미국과 조선간에 (1882년) 조인한 우호협약에 따라 미국이 전쟁 등의 위기에 처한 조선을 보호해주기로 한 내용을 환기시켰습니다. 그는 ”조선이 더 이상 은둔의 나라가 아니며 개화로 나갈 준비가 돼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크레블맨 특파원은 조선이 3천년 이상 독립된 나라로 있었다고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 모습입니다. 그가 고종을 알현할 때 헨리 알렌 미대표단 단장과 동행했으며 “멋진 가마를 타고 입궐했다”고 전했습니다.

 


 

그는 “궁 안에는 4-500채의 주택들이 방사형으로 위치했고 3천명 정도 살고 있다”고 말하고 “적청황백색의 지붕과 연못, 커다란 담장으로 둘러싸인 곳을 지났다. 엄청나게 큰 홀(근정전)의 7-800년은 된듯한 나무로 된 문을 통해 들어가자 시종들에 둘러싸인 왕을 볼 수 있었다”고 묘사했습니다.


 

“유럽식의자에 앉은 한국의 통치자와 대면했을 때 그는 행복하지 않은 표정으로 불안한듯 손을 허리띠에 교차하고 있었다. 작고 갸날픈 사나이는 친절한 입모양과 여성처럼 깊고 그윽한 눈을 갖고 있었다. 그는 악수를 하지 않았다. 그의 몸에 손을 대면 죽음이 선언된다. 사람들은 길에서 그를 바라보는 것도 안된다.”


 

존엄한 왕은 그러나 미국 기자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싶은듯 절박한 호소를 이어나갑니다. “짐은 물론, 백성들도 완전히 독립된 문명국의 일원으로 나갈 것이오. 미국과의 우정을 믿고 있소. 당신의 나라는 항상 우리와 우정을 나누기로 약속했소. 미국에 대한 신뢰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오.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겠소.”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그로버 클리블랜드가 두 번째 임기 2년차에 들어간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은 조선에 큰 관심이 없었고 외교를 책임진 그레샴 국무장관은 일본에 우호적이었지요.


 

고종이 파격적으로 미국의 기자를 만나 미국민들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식을 택한 것은 일종의 정공법이었습니다. 국민이 주인인 미국식 민주주의를 고종이나 그 측근들이 상당 부분 이해하고 있었다는 해석을 가능케 합니다.


 

이같은 상황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크레블맨 특파원은 고종에게 “미국은 자주권을 가진 나라를 간섭하지 않는 정책을 갖고 있다. 그런 미국이 어떻게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냐?”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돌발 질문에 고종은 당황한듯 했습니다. 크레블맨 특파원은 “그의 목소리는 낮아서 속삭이는듯 했다”고 표현했더군요. 보필(輔弼)하는 신하들 앞에서 고종의 행동은 부자유스러워보였다면서요. 마침내 그의 입에선 “미국이 약간의 군인들만 보내서 우리 왕궁만 지켜줘도 상황은 바뀔 수 있다”는 말이 나왔다. 미국의 군인들을 원하는(Want a Yankee Guard?) 고종의 요청에서 그는 “일본이 얼마나 그에게 압박을 가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전했습니다.


 

고종은 “이미 미국의 장관에게도 말을 전했다. 우리는 미국이 조선에 진심어린 우정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실질적인 희망의 증거들을 기대한다. 미국 대통령이 조선의 독립을 보호해주길 바란다.”고 거듭 당부했습니다.


 

◆ 명성황후 암살위기, 젖가슴 드러내 평민위장?



 

인터뷰하면서 크레블맨 특파원은 자신을 응시하는 여인의 시선을 느꼈습니다. 바로 명성황후였습니다.


 

“왕이 이야기하는 동안 반짝이는 눈을 한 왕비가 병풍 뒤에 난 공간사이로 듣고 있는 여성을 볼 수 있었다. 바로 그녀였다. 10년전 적들을 속이기 위해 젖가슴을 드러낸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소리쳤다 ‘봐라. 조선의 왕비가 이런 짓을 할 수 있냐? 그러느니 차라리 죽을거다’라고 속였다.”

 


 

크레블맨 특파원이 거론한 이 에피소드는 명성황후가 대원군과 허욱의 임오군란(壬午軍亂) 때에 암살 음모를 알아채고, 변장을 한채 궁궐을 벗어나 여주로 내려가 은신한 것을 시사한 것입니다. 당시 명성황후는 발각의 위기에서 홍계훈의 누이로 연기를 하여 도성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때 명성황후가 왕비의 신분을 속이기 위해 평민여성처럼 가슴을 드러내보이는 깜짝놀랄 행동을 했다는 것은 크레블맨 특파원의 기사에서 처음 등장한 내용입니다. 만일 이게 사실이라면 명성황후의 담대(膽大)함과 임기응변(臨機應變)을 말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크레블맨 특파원은 “왕비는 위험에 처한 요즘 왕을 자기 눈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고 있다. 그녀는 대원군과 그의 일파들이 왕을 퇴위(退位)시키고 손자를 왕으로 올리려 한다고 생각한다. 왕세자는 유럽의 신사와도 같은 똑똑한 청년이었다”고 묘사했습니다.


 

왕과의 알현(謁見)을 마치고 나온 크레블맨 특파원은 자신을 기다리던 대원군을 만납니다. 회색 지붕별채에서 만난 대원군 역시 미국 특파원의 힘을 알고 있었습니다. 조선의 진짜 통치자로 알려진 그는 미국 언론을 통해 자신이 섭정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려 한 것입니다.


 

크레블맨 특파원은 대원군이 78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목소리가 트럼펫처럼 우렁찼고 웃음도 호탕했다고 묘사했습니다.

 

 

 

 


 

“조선은 세계에 문을 열 준비가 되어 있소. 더 이상 외국인에게 빗장을 걸지 않아요. 다만 이변이 너무 급격하면 혼란이 생깁니다. 수천년간 유지한 문화와 관습은 하루에 바뀔 수 없소. 변화는 점진적이어야 하고 백성들이 질서를 회복하고 법령을 준수하도록 하는게 우리의 임무요.”


 

대원군이 중간중간 농담을 하는 모습에서 “저 사람이 30년전 서양의 야만인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수백명의 무고한 기독교인들의 목을 베었다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고 털어놓았습니다.


 

흥미롭게도 대원군은 “일본정부가 자신에게 선물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금시계를 보여주며 값이 얼마나 될것 같냐고 묻기도 했다”고 합니다.


 

한편 고종은 크레블맨 특파원 일행이 궁을 빠져나올때 사람을 보내 “미국의 우정을 믿는다. 꼭 도와달라”는 전갈을 다시 한번 보내왔습니다.


 

실로 고종의 미국에 대한 신뢰는 돌덩이처럼 단단했습니다. 그는 이듬해 10월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나서 일체의 음식을 거부했습니다. 독살(毒殺)의 두려움때문입니다. 권력암투와 주변강국들의 음모가 얽혀지며 테러가 빈발하고 많은 이들의 의문의 죽음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일국의 왕비마저 궁에서 시해되는 미증유의 환란에 왕인들 두렵지 않겠습니까. 고종은 궁 밖에서 미국의 선교사들이 봉인(封印)한 채 보내온 음식만을 먹었다고 크레블맨 특파원은 전합니다.


 

고종의 손녀이자 의친왕의 딸인 뉴욕의 이해경 여사도 언젠가 이런 말씀하시더군요. “어머니(의친왕비)를 통해 고종황제가 ‘미국이 도와줄거야, 꼭 도와줄거야’ 하고 되뇌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러나 고종의 간절한 믿음에도 미국은 1905년 카스라 태프트 밀약을 통해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길을 열어주고 맙니다. 강대국의 논리앞에 약소국을 위한 정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을사늑약(乙巳勒約)이후 이준 열사 등을 네덜란드 헤이그에 비밀리에 파견한 것이 빌미가 되어 강제 퇴위된 고종은 1919년 1월21일 아침 경운궁에서 돌연 붕어(崩御)합니다. 그가 즐기던 커피 혹은 식혜에 누군가 독을 탔다는 소문이 퍼져나갔습니다.


 

조선의 마지막 비운의 왕은 24년전 일본 낭인배의 무참한 칼에 스러진 명성황후를 따라 그렇게 한 많은 인생을 마감하고 만 것입니다.


 

<4편 계속>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4-12-02 10:10:47 뉴스로.com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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