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이 돌아왔습니다. 모처럼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차례도 지내고 세배도 하고 떡국을 먹으며 정담을 나누는 민족 최대의 명절이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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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설날은 한때 금기어가 될만큼 100여년간 모진 가시밭길을 걸었습니다. 우리 민족 수난의 근대사처럼 말입니다.
2천년이 넘게 면면이 이어져 내려온 민족 최대의 축제가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하게 된 것은 소위 대한제국이 ‘태양력’을 채택한 1896년 1월 1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사람들은 어리둥절했겠지요. 이제 막 동지달(12월)이 되었는데 뜬금없이 새해라고 우기니 말입니다.
이때부터 가짜 설날이 탄생한 것입니다. 이미 그 시기는 외세에 의해 국권이 놀아나는 시절이었습니다. 일제는 마침내 강제합병이후 설을 없애려는 공작을 노골화했습니다.
가짜설을 신정(新正)이라 하였고 설날을 구정(舊正), 즉 헌 설날이라 하여 척결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래도 민초들이 꿋꿋이 설날을 즐기자 어이없는 횡포를 부립니다. 섣달 그믐께부터 1주일동안 전국의 떡방앗간 문을 강제로 닫게 한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설날 아침 흰 옷을 입고 세배를 다니는 사람을 보면 검은 물이 든 물총을 쏘아 얼룩지게 하는 등 갖가지 박해를 가했다니 참으로 치졸하기짝이 없습니다.
설날 떡국을 못먹게 하면 설도 없어질까요? 흰옷 입은 사람에게 먹물을 뿌리면 세배를 다니지 않을까요? 그럴수록 우리 민족은 일제에 대한 분노가 커졌고 "양력설은 매국노나 지내는 것"이라는 인식이 심어졌을 따름입니다.
정작 통탄할 일은 일제가 패망하고 광복을 맞은 후 우리 손에 의해 설날을 바꿔치기한 것입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이중과세’라는 한심한 단어를 등장시킨 장본인(張本人)입니다. 일제시대에는 왜놈들에 의해 가짜설이 활개쳤는데 광복이 되고도 우리 대통령이 가짜설을 신봉할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승만은 반일감정이 투철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기실 일제 청산은 시늉만 하고 친일파들을 그대로 요직에 앉힌 중대한 과오를 범했습니다. 만일 그가 민족정신이 확고했다면 일제가 압살하려한 설날을 보란듯 되살려야 마땅했습니다. 양력이 시대적 흐름이라 해도 우리의 전통문화는 그와 무관한 것이니까요.
그는 가짜설날을 무려 사흘간이나 쉬도록 법제화했습니다. 1949년 6월 4일의 일이었습니다. 방앗간 문을 일주일씩 닫아버린 일제나 가짜설을 무려 사흘이나 쉬게 한 이승만이나 오십보백보입니다. 그러나 누대에 걸쳐 내려온 명절을 국민들이 포기할 수 있나요. 그때부터 이중과세(二重過歲), 즉 양력과 음력으로 설을 두 번 쇤다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설날의 설움은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 들어서 더욱 응어리졌습니다. 박정희 역시 철저한 양력 신봉자였습니다. 이승만 독재를 끝장낸 4.19혁명을 군화발로 짓밟은 박정희는 설을 완전히 뿌리뽑을 심산이었지요. (음력)설을 공휴일에서 아예 삭제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설날에 학교 수업을 받도록 했고 공장들도 문을 열도록 강제하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 설만 되면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분명 공휴일은 아니므로 공무원 직장인들은 출근을 하는데 자영업자들은 쉬고 거의 모든 음식점이 철시(撤市)했으며 공장들은 종업원들이 고향에 갈 수 있도록 일주일씩 휴가를 줬습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설날이 회생의 조짐을 보인 것은 박정희의 후예인 전두환이었습니다. 광주민주항쟁을 무자비한 살륙으로 진압하고 대통령이 된 그는 민심 폭발을 막기위해 '국풍81'이라는 억지축제를 급조하고 프로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 등 대중오락산업을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85년 양력 1월 21일 설날을 ‘민속의 날’이라는 희한한 단어로 포장해 휴일로 지정했습니다. 가짜설은 그대로 사흘간 쉬면서 덤으로 하루를 주듯 선심을 쓴 것입니다.
배경이야 어찌됐든 국민들은 행불된 자식 살아 돌아온 것처럼 휴일지정을 반겼습니다. 본 이름대신 민속의 날이라는 정체불명의 신조어가 만들어졌지만 아무도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설날이었으니까요.
전두환의 후계자임에도 민주진영의 분열로 운좋게 당선된 노태우는 1989년 2월 1일 대통령령으로 ‘관공서 공휴일에 관한 규정’을 개정합니다. 설날과 추석 연휴를 각각 사흘로 늘리는 대신 가짜설은 사흘에서 이틀로 줄인 것입니다.
가짜설의 시세가 여지없이 떨어진 것은 김대중 정부 들어서입니다. 공휴일이 많다는 이유로 1999년 1월1일부터 대부분의 관공서는 이날 하루만 쉬고 2일부터 정상 출근하도록 했습니다. 마침내 가짜설 연휴가 폐지되고 사실상 설날이 복권된 것입니다. 외세에 의해 태양력을 채택하면서 설날이 천덕꾸러기가 된지 103년만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설날이 우리 민족의 명절로 완전히 돌아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난 세월의 폐해가 남아있기때문입니다. 아직도 신정(양력설)이라는 용어가 달력에 표기되고 공공연히 사용됩니다. 설은 오직 하나임에도 구정으로 비하하는 신정이라는 말부터 퇴출시켜야 합니다.
양력 1월 1일의 휴일 지정도 취소해야 합니다. 애당초 이날은 설을 없애기 위해 휴일로 대체된 것이니 원상회복의 의미도 있습니다. 세계 많은 나라에서 휴일로 삼는다고 우리까지 쉬어야 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 논리라면 추석은 다른 나라와 아무 상관도 없는데 사흘씩이나 쉴 필요가 있을까요. 언감생심(焉敢生心) 한글날을 노는 날이 많다고 공휴일에서 내쫒은 대한민국 아닙니까?
양력 1월1일을 명분도 없이 쉬기 때문에 이날 떡국을 먹고 세배를 하는 ‘이중과세’가 여전히 횡행(橫行)하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진짜 설날의 의미는 반감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설날을 민족최대의 명절이라며 기린다고 하지만 중국인들의 춘절(春節)에는 비할 바가 못됩니다. 저들은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보름을 쉬면서 설날을 제대로 만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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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달아 연휴를 늘리자는게 아닙니다. 100년이 넘게 안팎으로부터 핍박(逼迫)받은 우리의 설이 본래의 위상을 되찾으려면 가짜설을 기념하는 날을 없애고 정월 대보름(1월 15일)을 휴일로 지정해야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설날부터 대보름까지 하루하루 의미를 새기며 새해를 보냈습니다. ‘설은 나가서 쇠어도 보름은 집에서 쇠어야 한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요.
우리가 설을 지키지 못하면 누가 지키겠습니까. 중국설의 아류(亞流)로 지낼텐가요? 안그래도 많은 미국인들은 설날을 ‘중국 설(Chinese New Year)’이라고 부릅니다. 엊그제 뉴욕의 중국총영사는 중국설을 기념하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점등식에 자랑스럽게 참석했더군요. 설날은 오직 저들의 것인양 말입니다.
뉴욕 플러싱에서 수년째 열리는 한인사회와 중국커뮤니티의 합동 설퍼레이드도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중국이 동북공정으로 고구려 역사를 저들의 것으로 둔갑시키고 있는데 숫적인 열세에 있는 우리가 설에 대한 민족사적 자각없이 합류하는 것은 저들의 들러리요, 나아가 한민족이 중국의 소수민족이 아니냐라는 착각을 심어줄 수도 있습니다.
진짜 설날입니다. 새해 복 많이 지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