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들 동쪽 끝으로/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뷔인 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짚벼게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 시인의 鄕愁(향수)는 가히 서정시의 최고봉입니다. 탁월한 우리말 조어력, 공감각적 심상의 완숙함, 고향에 대한 상반된 이미지를 극대화하기 위한 홀수연과 짝수연의 교묘한 배합,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의 반복적 후렴구로 노래하듯 감동을 극대화한 향수는 읽을 때마다 애잔한 감동이 몰아칩니다.
고교시절 국어시간에 이 시를 처음 대하면서 선생님께서 “미당 서정주도 정지용 앞에서는 빛이 가려진다”고 하신 말씀에 고개 끄덕인 기억이 나네요. 그러나 이 시를 단순히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만 정의내리면 안됩니다.
정지용 시인이 이 시를 발표한 것은 1927년 <조선지광>이라는 잡지였지요. 국권을 잃고 일제하 식민통치를 받던 시절입니다. 충북 옥천이 고향인 시인은 타국에서 조국과 고향을 그리며 향수를 썼습니다. 식민시절 향수는 잃어버린 내 나라 내 이름 내 언어를 간절히 희구하는 마음의 精髓(정수)였습니다.
그런 향수를 아무데나 갖다붙일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우리 현대사 최악의 독재자 이름 뒤에 붙이다니요. ‘박정희 향수’라는 말들을 합니다. 박정희가 쓰던 香水(향수)를 이른건 아닐진대 어찌 고향을 그리워하는 지고지순한 마음을 가치전도할 수 있는지요.
박정희정권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들은 제게 충격입니다. 박정희의 독재를 비판하는 이들도 경제부흥 등 잘한게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독재도 시간이 지나면 그리움이 되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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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박정희 세대였습니다. 4.19혁명의 정신을 군화발로 짓밟은 박정희의 5.16쿠데타와 함께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군정통치하에서 박정희는 이른바 ‘4대의혹사건’을 저질러 국민들로부터 ‘구악을 뺨치는 신악’이라는 비판을 들었습니다.
‘나처럼 불행한 군인을 만들지 말라’며 악어의 눈물을 지으며 군복을 벗은 박정희는 63년 대선에서 윤보선을 근소한 표차로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중정부장 김재규에게 암살되기까지 18년간 권력을 휘두른 박정희의 잘못은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1965년 한일굴욕외교로 기록된 한일협정. 그는 일본으로부터 6억달러를 받는 댓가로 일본의 식민지배를 용서(?)했습니다. 아니 실상은 일본이 큰소리친 굴욕외교였지요. 경제개발의 명분을 내세웠지만 이는 훗날 월남 파병과 함께 미국의 추인과 권력통치기반을 다지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하기야 1939년 일왕에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까지 쓰고 스스로 창씨개명하여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로 행세할만큼 일제에 대한 충성심이 남다른 박정희가 아니었나요.
▲ 박정희의 만주군 혈서지원 기사가 실린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 사본. 기사에 따르면 박정희는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습니다"라고 다짐했습니다. 붉은색 원 안의 사진이 박정희.
일본군 장교출신으로 독립군을 때려잡는 만주군소속으로 일본이 패망할때까지 활약한 박정희는 해방후 재빨리 광복군으로 변신했다가 비밀리에 남조선노동당의 군내 조직 및 연락담당관까지 맡는 기민함을 보였습니다. 일제가 영원할 줄 알았던 그였던만큼 해방후엔 독립운동에 열정을 보인 좌익에 몸담는 것이 유리하다고 봤을까요.
이후 여순반란사건으로 좌익에 연루된 사실이 발각되어 사형선고까지 받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지만 군내 남로당 조직을 밀고함으로써 옷을 벗는 것으로 무마될 수 있었습니다. 이 정도 행적만 보아도 그는 타고난 기회주의자였던 셈입니다.
쿠데타를 통해 대통령이 되고도 한동안 미국의 신임을 받지 못한 것은 좌익경력때문이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윤보선과의 대선대결때 농촌에서 상대적으로 많은 표를 얻었던 것은 “좌익대통령의 탄생을 기대한 좌익들의 지지덕분”이라니 그를 '뼛속까지' 반공투사쯤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머쓱할 일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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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앞가림도 못하는 분단국이 월남에 派兵(파병), 그 나라와 우리나라의 수많은 젊은이들 목숨을 희생시킨 댓가로 얻은 원조금과 미국의 신임을 바탕으로 독점자본과 결탁하여 부도덕한 재벌들의 기초를 일구었습니다.
세계를 놀라게 한 한강의 기적? 새마을운동?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 ‘북괴의 위협’을 憑藉(빙자)해 민주주의에 재갈을 물리고 부의 양극화를 조장하며 독재권력을 공고히 한 것이 박정희의 통치사 전반이 아니던가요.
박정희 개인의 불행, 아니 그로 인한 국민들의 오랜 불행은 69년 삼선개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박정희의 세 번째 연임을 열어주기 위해 헌법을 개정했고, 그는 1971년 7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됨으로써 마침내 독재의 영구화를 위한 걸음을 내디뎠습니다.
당시 대선에 나선 신민당 후보 김대중은 유세에서 “이번 대선에서 박정희가 당선되면 영구집권을 위한 총통제로 가게될 것”이라고 경고했지요. 아니나다를까, 1972년 박정희는 소위 10월유신을 선포하며 헌법을 폐기하고 긴급조치권에 국회의원 3분의1에 대한 임명권과 간선제 등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초법적인 조치를 취했습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조직이 체육관에서 6년임기의 대통령을 만장일치로 추대하는 한심한 쇼가 시작된 것입니다.
박정희가 18년 독재를 했지만 그래도 경제는 발전시키지 않았느냐는 이들은 과연 경제개발의 달콤한 과실을 향유한 이들이 국민이라고 믿는 것일까요. 한국의 재벌들이 존중받지 못하는 것은 바로 박정희 시대, 권력과 야합한 매판자본이 오늘의 부를 축적했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 수출10억달러, 국민소득1천달러만 달성하면 주말마다 비행기타고 제주도에 놀러갈 수 있을 것처럼 장밋빛으로 포장한 채 ‘돌격앞으로’를 외치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자유와 인권이 희생되었는가요.
67년 대선의 어렴풋한 기억 한토막.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꼬마가 투표를 하는 엄마 아빠에게 “꼭 박정희 대통령 찍어야 해”하고 다짐을 두 번 세 번 받았습니다. 웃으며 “그러마”하는 부모님을 보고 안심할만큼 박정희 정권의 세뇌교육은 집요했지요. 초등학교 1학년꼬마에게 ‘우리 대통령 박정희’는 북한괴뢰의 위협에서 지켜줄 수호천사였던 모양입니다.
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고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라는 기상천외한 구호가 들먹여졌습니다. 까짓 자유가 구속될망정 북괴의 야욕에서 소중한 조국을 지키려면 할 수 없잖아?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우게하고 새마을운동을 공부한 10대는 순치된 꼭두각시에 불과했습니다.
학도호국단으로 군사교육(교련)을 받고 집체훈련을 하며 보낸 고교시절. 77년이었나요? 미국이 청와대를 도청했다며 느닷없이 미국을 규탄하는 관제시위가 전국의 고교에서 잇따라 열렸습니다. “어라? 미국은 우리의 영원한 친구 아니었나?” 양키고홈의 구호가 없던 유일한 나라 대한민국에서 어느날 갑자기 반미시위를 벌어야했던 스포츠머리 고교생들의 황당함이란.
박정희 정권에서 자행된 수많은 고문 살인 의문의 죽음들. 일본이 그토록 끈질기게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65년 한일협정시 맺었다는 독도밀약설때문은 아닐까요. 제게 박정희는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개발독재의 미명하에 수많은 이들을 희생시키고 死地(사지)로 내몬 부끄러운 독재자,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런데 박정희향수라니. 박제된 독재자를 추앙하고 숭모하는 자 누구인가요.
과거 대선에서 박정희와 키가 1cm도 차이 안나게 닮았다고 주장하며 박정희의 이미지를 차용한 한심한 후보도 있었지만 박정희향수를 들먹일 때마다 저는 구토감을 갖습니다. ‘독재자의 딸’이 훈장인양 권력해바라기들이 들끓는데 장탄식이 나옵니다. 남의 재산을 강탈해만든 장학재단을 소유해도 여당의 유력 대선후보에서 한치 흔들림이 없는 현실에 어지러움을 느낍니다.
대한민국이여, 어디 향수 찾을 게 없어서 독재의 허깨비가 그립다 헤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