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수 내린 물에 석양이 빗길 제/ 버들꽃 날리는데 낙화암이란다./ 모르는 아이들은 피리만 불건만/ 맘 있는 나그네의 창자를 끊노라./ 낙화암 낙화암 왜 말이 없느냐’(춘원 이광수 ‘낙화암’).
한국인이라면 낙화암을 모를 이들은 없을 것입니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패망한 AD 660년 삼천궁녀가 적군에 쫒겨 가파른 절벽에서 백마강 아래 몸을 던진 모습이 마치 꽃이 떨어지는 것 같다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백제의 유적지를 둘러보는 하이라이트는 역시 부소산의 낙화암 코스입니다. 이날 재외동포기자들을 안내한 주인공은 이만식 문화관광해설사. 반갑게 일행을 맞은 그이는 잘못 알려지고 왜곡된 백제의 역사에 대해 구수한 설명으로 말문을 열었습니다.
낙화암은 본래 고려시대까지 타사암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떨어져 죽었다’고 타사암(墮死岩)이었는데 이것이 조선조에 들어 낙화암(落花岩)이라는 자못, 서정적인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다는군요.
나라가 패망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도륙되는 아비규환(阿鼻叫喚)속에 강물에 스스로 몸을 던질수밖에 없었던 궁중의 여인들. 곰곰 반추하면 참혹함과 비장함이 넘쳐날진대 떨어지는 모습이 꽃처럼 아름답다는 것은 너무도 무심한게 아닐런지...
부소산의 일정은 백제의 세 충신 성충과 흥수 계백의 숭고한 넋을 기리는 사당 삼충사(三忠祠) 앞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세 충신의 하나인 계백장군이 시선을 끕니다. 황산벌에서 5천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신라의 5만 군사에 맞서 네 번 싸워 네 번 이기는 기백을 보인 그 장군말입니다. 전쟁에 나서기전 이런 말을 남기며 자신의 처자들을 직접 죽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 나라의 힘으로 당과 신라의 대군을 당하자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도다. 나의 처자가 붙잡혀 노비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깨끗이 죽는 편이 낫겠다.”
그러나 신라의 화랑 관창을 생포하고도 어리다고 돌려보낼만큼 마음이 모질지 않은 계백이 정말 자신의 식솔들을 죽였는지에 대해선 고개가 갸우뚱해집니다. 다만 패망한 나라의 비장함을 강조하는 뜻에서 후세의 사가들이 그렇게 묘사했을 것이라는 얘기지요.
마찬가지로 낙화암의 삼천궁녀도 터무니없이 과장됐다고 지적합니다. 적군에 쫒겨 벼랑에서 떨어져 죽은 여인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많은 궁녀들이 몸을 던졌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기때문입니다.
좁은 숲길로 이어진 작은 절벽에 삼천명이 모였다가는 부소산 전체가 사람으로 뒤덮여야 맞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삼국유사는 그저 ‘여러 후궁(諸後宮)이 떨어졌다’고 기록했을뿐입니다.
낙화암에서 백마강(白馬江)을 굽어봅니다. 백마강 역시나 이름만 들어도 로맨틱한 느낌을 던져주는데 사실 백마강은 금강의 지류입니다. 부여 일대를 휘감아 흐르는 금강 줄기를 백마강으로 부르는 것이지요.
강물이 비단결 같다 하여 지어진 금강(錦江)은 강수량이 줄고 오랜 세월 방치해 강폭이 좁아졌는데 일부에서는 4대강 사업으로 우렁찬 옛 모습을 회복했다며 4대강사업의 몇 안되는 성공사례라는 말도 하더군요. ^^
부소산에는 저 유명한 고란사가 있습니다. 삼천궁녀의 넋을 기리는 사찰입니다. 벼랑에 희귀한 고란초가 자생한다고 고란사로 불렸다지요.
법당 뒤편에는 한번 마시면 삼년 젊어진다는 약수가 있습니다. 약수를 너무 마셔 갓난아기가 된 할아버지의 전설을 들으며 모두들 한모금씩 시원하게 목을 축였습니다.
낙화암 오른쪽 백마강 변에는 구드래나루터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유람선으로 변신한 황포돛배가 드나드는 작은 나루터지만, 백제가 해양 대국일 때는 일본·중국과 교류하는 국제항구가 아니었을까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구드래’는 큰 임금(大王)을 뜻하는 백제 고유어로 서기 720년 편찬된 ‘일본서기’에선 백제를 ‘구다라’라 기술하고 있습니다. 구다라는 일본인들이 백제를 ‘대왕국’(大王國)으로 높여 부른 것이라고 합니다. 백제의 유민들이 패망의 한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가 왕실을 이끌었으니 당연한 예우가 아닌가 싶습니다.
백제의 도읍지인 부여(扶餘)의 원래 이름은 '소부리(서울)'였다고 합니다. 패망한 백제는 수도가 주(州)로 격하되는 설움을 겪습니다. 통일신라인은 부여를 '소부리주'라고 낮춰 불렀고 부여라는 이름은 신라 경덕왕(757년)에 와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군요.
이곳의 황포돛배에 승선했습니다. 물론 배가 참 특이하게 생겼습니다. 마치 한옥을 배위에 올려놓은듯 합니다. ^^
황포돛배는 황토로 물들인 돛을 단 배라는 뜻입니다. 고려 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유일한 운송 수단으로 끊임없이 금강을 오르내렸습니다. 내륙에서 뜻밖에 선상의 즐거움을 맛볼줄은 몰랐습니다.
백마강을 유유히 떠가는 황포돛배. 비록 엔진의 힘으로 가고 있지만 1400여년전 화려했던 백제의 영화가 세월의 흐름속에 덧없이 흘러간듯 하여 애잔한 마음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