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이맘 때 반기문(潘基文) 유엔사무총장 관저에서 한승수 당시 국무총리가 초대된 적이 있습니다. 당시 뉴욕 주재 특파원 일부도 취재차 이스트 리버의 전망이 아름다운 맨해튼 서튼 플레이스의 사무총장 관저(官邸)를 방문했습니다.
당시 모임엔 유명환(柳明桓) 외교부 장관도 동행을 했는데 워싱턴 D.C.에서 곤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을 만나기로 한 유 장관을 자연스럽게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 때 제가 가져간 투박한 형태의 녹음기를 유 장관이 보면서 “요즘 참 신기하게 생긴게 많이 나오네요”하는 말을 하더군요.
사실 이 녹음기는 MD로 불리는 미니디스크를 넣는 아주 구형이었는데 보통 방송국에서 쓰는 물건이지만 워낙 고물이라 일반인들은 보기 힘든 축에 속했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첨단기기들이 쏟아지는 세상에 남들과 다르게 생긴 녹음기를 들이대니 유 장관에게는 되레 신제품처럼 보였던 모양이었습니다.


이듬해에도 뉴욕에서 유 장관을 한번 더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솔직히 그에 대한 인상이 나쁘지 않은 편이었습니다. 뭐랄까, 직선적이지만 솔직하고 소탈하다는 느낌이었지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에 대한 겉인상에 불과하니 이러쿵 저러쿵 평가할 계제(階梯)는 못됩니다.
MB정권의 외교부 수장(首長)으로 신임을 받는 그가 최근 잇단 설화(舌禍)로 구설을 빚더니 급기야 딸에 대한 특혜 문제로 사퇴하는 최악의 낭패를 당했습니다. 냄비솥처럼 한번 끓었다하면 전국이 들썩이는 한국의 여론앞에 믿었던 청와대마저 등을 돌리는듯 하니 회생불능의 치도곤을 맞은 셈입니다.
MB정권의 많은 인물들에 대해 도덕성의 잣대를 드리우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뉴스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번 유명환 장관 케이스를 접하며 ‘가관(可觀)’과 ‘점입가경(漸入佳境)이라는 글자들이 떠오르더군요. 갈수록 태산이라다니 보여주는 꼬락서니들이 눈 뜨고 보기 힘든 형국입니다.
아버지가 장관을 하는 외교부처에서 딸이 일하는 것도 모자라 1명을 뽑는 자리에 특혜선발이 되었다는 것은 뻔뻔함을 넘어 이제 이 나라 공복이 무개념의 극치를 달리는 것은 아닌지요.
언론은 이번 일이 현대판 음서(蔭敍)제도라며 유 장관을 맹비난하고 있습니다. 아다시피 음서제도는 공신이나 현직 고관의 자제를 과거(科擧)에 의하지 않고 관리로 채용하던 제도를 말합니다. 이를테면 행정고시나 사법고시 외무고시를 통하지 않고 고위 공무원이 될 수 있는 특혜를 주는 것입니다.
일명 문음(文蔭)·음사(蔭仕)·음직(蔭職)이라고 부르다시피 한결같이 ‘음(陰)’자가 들어가는걸 보면 뭔가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떳떳하지 못하게 일이 행해진다는 느낌을 던져줍니다.
고려 목종 원년(997년)에 5품 이상의 관리 자제에게 음직을 준 것이 시작이었고 문종 3년(1049년)에는 이들에게 곡물과 땔감 약초를 의미하는 전시(田柴)를 지급하는 공음전(功蔭田) 제도가 마련됐습니다.
조선시대엔 음직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공신이나 2품 이상의 관리에겐 아들 손자 사위 형제 조카까지, 3품관에겐 아들 손자로 상향조정했습니다. 음관은 원칙적으로 장자만이 받을 수 있었으나 장자가 유고시엔 장손이나 차남이 받을 수 있었습니다. 관직의 대물림을 제도적으로 가능케 한 것입니다.
고려시대의 음서제도는 권문세족의 발호와 농장의 확대로 백성들을 결국 귀족들의 노예로 만들었고 왕권을 약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아다시피 조선조엔 이로 인한 세도정치가 극에 달해 토지세 등 전정(田政)과 군정(軍政)·환곡(還穀) 등 이른바 삼정(三政)의 문란을 가져 왔습니다. 고려도 조선도 나라가 망하려는 조짐을 보인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말도 있지만 하필 얼마전 광복절 경축사에서 MB가 공정한 사회를 강조한 마당이어서 불에 기름을 부은듯 여론은 활화산으로 들끓고 있습니다.
“장관 아버지를 둔 딸의 특혜 채용이 공정한 사회를 말하는 것이냐?”, “외교부가 유장관의 사기업이냐?”, “고시 인원을 줄인다더니 고위직의 대물림을 위한게냐?” “젊은 사람 북한 보내고 딸 취직시키려 했냐?” 등등 낯 뜨거운 비난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더욱 한심한 것은 외교부에서 유 장관 딸인줄 몰랐다는 말도 안되는 변명(辨明)을 늘어놓은 것입니다. 외교부의 최말단 직원을 뽑아도 가족과 친인척을 면밀히 조사하는 것이 기본인데 외교부가 장관의 딸인줄도 모르고 심사를 했다는 건가요?
아마도 유 장관의 딸은 이름도 바꾸고 얼굴도 성형했으며 정보기관의 도움을 얻어 신분까지 세탁한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이건 국가의 기밀이 넘어갈 수도 있는 중대사이니 좌시(坐視)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오래전 DJ가 대통령에 취임한지 얼마 안됐을 때 라디오 연설을 통해 공직자들에게 ‘명예를 위하려거든 재물을 포기하고 재물을 얻고 싶다면 공직을 포기하라’고 연설한 대목이 뇌리를 스칩니다.
이 정권의 고위 인사들에게 ‘노블리스 오블리제(지도층의 도덕적 책무)’라는 고상한 단어는 요구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라는 무리한 주문을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아무래도 이들은 우리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외계인(外界人)이 아닐까요.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은 너무도 애달픈 나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