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4강 진출이 확정되는 순간 총영사관에서 응원하던 300여명의 한인들은 밖으로 뛰쳐 나갔습니다. 오사카 총영사관 앞 보도에서 꽹과리와 징을 두드리며 한동안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던 동포들은 급기야 오사카의 도심을 행진하기 시작했습니다.
농악대를 앞세운 채 대~한민국을 외치는 동포들의 손에는 자랑스런 태극기가 들려 있었습니다. 보무도 당당하게 행진하며 두시간 동안 시내가 떠나가라 요란한 소음을 만들어낸 그곳이 한국 아닌 일본이었다는 사실이 더욱 감격적이었습니다.
지금도 8년전 그날을 떠올리면 온 몸에 짜릿한 전율이 오릅니다. 2002한일월드컵에서 저는 16강전까지는 한국에서 취재하고 8강전부터는 일본에 있었습니다. 일본에서의 열흘은 정말 잊혀지지 않는 기억입니다.
대한민국이 4강의 위업을 달성하며 월드컵 최대의 돌풍을 일으키는 동안 일본인들이 이웃나라 국민에게 보내준 아낌없는 격려때문이었습니다. 월드컵을 유치할 때부터 한국과 일본은 치열한 경쟁자였습니다.
국제축구연맹 FIFA가 공동개최라는 솔로몬의 지혜로 동반자가 됐지만 양 국은 코리아와 재팬 어느쪽을 먼저 쓰느냐를 놓고 신경전을 벌였고 상대보다 더 좋은 성적을 거둬야한다는 강박관념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탈리아를 안정환의 헤딩 골든골로 제압하고 8강에 진출한 반면 일본은 16강에 오르는 것에 만족했습니다. 일본의 탈락에 한편 고소한 마음으로 일본행 비행기를 타면서 이제 일본에서는 월드컵 열기가 시들해 질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일본에선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비록 자신들은 떨어졌지만 ·일본 국민들은 한국의 선전을 축하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미디어들도 한결같이 한국에 대해 긍정적이었습니다.
월드컵이 끝날 때까지 일본에선 두 개의 신드롬이 불었습니다. 당시 세계 최고의 인기선수였던 데이빗 베컴과 한국의 열풍이었습니다. 일본을 쪽발이의 나라, 가까이 할 수 없는 이웃, 무조건 이기고 봐야 할 앙숙으로 본 기자에게 일본에서 부는 한국의 인기는 천만뜻밖이었습니다.
일본인들은 강호들을 차례로 물리치며 4강까지 오른 한국을 경이로운 대상으로 인식했습니다. TV 방송국들은 경쟁적으로 리포터들을 한국에 파견해 붉은 악마의 놀라운 응원열기부터 남대문 시장통의 음식문화를 소개했고 신문들도 연일 한국 기사들을 탑에 올렸습니다.
4강 확정후 한국의 응원단이 오사카 도심을 거침없이 누비는 동안 일본인들은 부러움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박수를 해주는 모습이었습니다. 야유를 하거나 못마땅한 태도를 보이는 이는 단언컨대 한명도 볼 수 없었습니다.
한국과 독일의 4강전 응원이 펼쳐진 도쿄의 요요기 스타디움에서는 재일 한국인들만이 아니라 한국에 매료된 일본인 응원단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일본보다 가깝게 생각한 중국에선 한국을 시샘하는 언론들의 악의적인 보도가 줄을 이었고 재중 한국인들이 봉변을 당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일본에선 한국과 한국인이 찬탄과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더욱 놀란 것은 한국과 터키의 3-4위 전이 벌어진 다음날이었습니다. 일본의 유력 스포츠신문을 펴들자 양면에 컬러로 한국과 터키 선수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걸어가는 모습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습니다. 상단에 ‘한국’이라는 큰 활자가 있었고 안쪽면에 한글제목까지 달린 것을 보고 한국 신문을 보는 건지 일본 신문을 보는 건지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일본 체류는 뜻밖의 감동과 신선한 충격으로 채워졌습니다. 한국의 4강 달성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일본의 보통 사람들을 보며 한국과 일본 양 국민은 진실로 우정을 나눌 수 있고 양국의 미래 관계도 충분히 희망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고, 신사 참배를 강행하며, 툭하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의 망언들은 사실 극우 정치인, 보수단체와 수구 언론의 행태일뿐 대다수 일본 국민들과는 무관합니다.
일본의 과오는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하고 적절한 배상과 사죄를 해야 하지만 감정에만 매몰된다면 한일 양국이 선린우호의 관계로 발전하기란 요원합니다. 선의의 일본과 선량한 일본인들은 우리도 가슴을 열고 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대한민국에 이어 일본도 월드컵에서 사상 첫 원정 16강의 위업을 일궜습니다. 대부분의 본국 국민들과 동포들은 일본의 선전을 달가워하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솔직히 상대팀이 이기기를 바랬다는 이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물론 그것은 속이 좁아서가 아니라 오늘의 일본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약소국이 아닙니다. 일제가 심어놓은 엽전이라는 모멸감과 피해의식에 사로잡힐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만큼 당당해야 합니다. 일본이 잘하면 아낌없이 칭찬하고 이웃사촌으로 같이 기뻐합시다.
기왕이면 한일 양국이 승승장구해서 결승에서 만나는 멋진 꿈을 꿔봅니다. 그러나 월드컵 성적보다 중요한 것은 한일 양 국민이 서로를 가깝고도 가까운 이웃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열린 마음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