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에서 우승의 위업(偉業)을 일군 여자청소년(U-17)축구대표팀이 귀국에 앞서 26일 뉴욕 JFK 국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전날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열린 숙적(宿敵) 일본과의 결승전에서 전후반을 3-3으로 비기고 승부차기 5-4 승리의 드라마를 엮으며 한국 축구사상 첫 월드컵 우승의 대낭보(大朗報)를 전한 여자청소년대표팀이 뉴욕에 도착한다는 제보를 접하고 저희 ‘뉴스로’가 온오프라인 매체 통틀어 가장 먼저 소식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공항에는 한국의 미디어 중 YTN이 유일하게 나왔지만 첫 소식은 저희보다 늦었으니 속보(速報)에서 뉴스로가 특종(特種)을 한 셈입니다.
떡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청소년대표팀이 이날 뉴욕 관광을 즐기는 모습까지 취재하고 싶었지만 딸 같은 소녀들이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기자 근성(根性)을 자제(?)했습니다. 리얼리티 쇼를 찍는 것도 아닌데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따라 붙어서 좋을 리 있겠습니까? ^^
▲ 26일 뉴저지 메종 마드리드 식당에서 저녁식사후 포즈를 취한 청소년대표팀
얼마 전 20세 이하 여자청소년 월드컵에서 남녀 통틀어 역대 최다성적인 3위를 차지한데 이어 더 어린 소녀들이 우승의 금자탑(金字塔)을 일궜으니 요즘 대한민국은 여자들 덕분에 어깨를 으쓱하게 됩니다.
일부에선 여자들의 선전(善戰)에 남자들의 분발(奮發)을 촉구하기도 하지만 기실 남자도 83년 세계 청소년대회 4강과 2002년 월드컵 4강의 쾌거를 일군 바 있으니 이제 남자와 여자의 공적(功績)이 균형을 이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자축구를 생각하면 실로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감회가 듭니다. 20년전만 해도 그 존재조차 희미했던 여자축구가 20세이하, 17세이하 대표팀이 세계를 호령(號令)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기뻐하는 마음 한편으로 깊은 유감이 가슴 한 켠에 남아 있습니다. 20년전 우리 여자축구가 일본에 당한 13-1의 참패때문입니다. 이번에 많은 언론이 당시 패배를 돌이키며 한국여자축구가 20년만에 엄청난 발전을 이뤘다고 보도했습니다.
말인즉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20년전의 참패를 눈 앞에서 지켜본 기억이 생생한 저로선 당시 한일전만 생각하면 분통이 터집니다. 하지 말았어야 할, 안해도 될 경기였기때문입니다.
한국 여자축구는 해방후 반짝 빛을 발했다가 60년대와 70년대 암흑기(暗黑期)에 있었습니다. 여자축구가 유명무실(有名無實)했던 시기입니다. 그 여자축구가 돌연 등장한 것은 90년 북경아시안게임에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데 따른 정책적 판단이었습니다.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왜 여자대표팀을 북경아시안게임에 보내기로 했느냐는 것입니다. 보내고 싶었다면 좀 일찍 구성해야지, 아시안게임을 불과 석달여 앞두고 팀을 만든다는게 가당키나 합니까?
육상 등 타 종목출신 선수들로 팀을 급조(急造)해 아시안게임을 나가는 객기(客氣)를 부린 것은 여자축구 강호였던 주최국 중국의 들러리가 되주려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축구라는 것을 처음 해본 선수들이 대부분인 여자팀의 공식 평가전을 축구협회가 우리 안방(동대문 운동장)에서, 그것도 강호에 속하는 일본팀과 붙였다는 것입니다.
볼 트래핑 등 기본기조차 안된 선수들을 공식 평가전에, 국민정서상 패배를 용인하기 힘든 일본전에 나가라는 것은 휘발유를 안고 불섶에 뛰어들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참패가 불보듯 훤했습니다. 선수들의 사기(士氣)는 물론이고 왜 애꿎은 축구팬과 국민들까지 열받게 하는지 이해불가였습니다. 그 시절 축구협회에 골수 친일파(親日派)라도 있었을까요.
당시 축구기자였던 저는 말도 안되는 평가전 계획을 강력히 비판했습니다. 안방에서 일본에 떡(?)이 되는 참담함을 왜 자청(自請)한다 말입니까? 동네축구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우리 팀을 아시안게임 메달을 노리는 일본과 붙이는건 한마디로 난센스였습니다.
또 한가지 목소리를 높인 이유는 이 경기에서 평생 꼬리표처럼 남을 엄청난 참패의 기록이 우려됐기때문입니다. 한국이 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헝가리에 9-0, 터키에 7-0의 참패를 기록한 것은 여전히 월드컵 본선 사상 가장 큰 패배로 남아 있습니다. 점수 차가 많은 경기가 나올 때마다 과거의 기록이 어김없이 등장합니다.
당시 월드컵은 한국전쟁 직후 항공편이 제대로 없어서 경기 당일 도착해 시차도 안맞는 상황에서 당한 불가피한 패배였습니다. 그런데 40년이 지나 여자축구의 참패기록을 못 만들어서 안달이냐 이겁니다.
“굳이 평가전을 하려면 약체를 골라서 해야 한다.”, “조금만 시간을 더 줘도 잘 할텐데 왜 하필 일본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는데 사실 북경아시안게임에서 우리가 홍콩을 1-0으로 이긴 것만 봐도 설득력 있는 주장이었습니다.
“평가전을 강행한다면 깨기 힘든 참패를 당할 것”이라는 경고(?)는 공허한 외침에 불과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13-1입니다. 과연 우리가 일본에게 같은 스코어로 앙갚음 할 날이 올 수 있을까요?
이번에 일본을 물리치고 월드컵 우승의 쾌거는 이루었지만 20년전 여자대표팀의 첫 평가전에서 일본에 13-1로 참패를 당한 기록은 지울 수 없는 멍에로 남아 있습니다.
물론 스포츠란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습니다. 엄청난 대승도, 치욕의 패배도 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일종의 스포츠 역사인데, 안해도 될 망신살을 자초했기 때문에 유감천만(遺憾千萬)이라는 것입니다.
이번에 한 포탈사이트가 20년전 기록을 메인에 띄우자 적잖은 네티즌들이 불쾌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왜 잔치상에 재뿌리냐?”는 것입니다.
당시 경기를 동대문운동장에서 지켜봤다는 한 네티즌은 이렇게 쓰라린 기억을 털어놓더군요.
“이 경기 봤었다. 한국의 1점도 페널티 킥 얻어서 일본 골키퍼 손을 맞고 자살골 비슷한 골로 1점을 얻었다. 이 경기 생각하면 아직도 치욕스런 기분이 가시질 않는다..”
월드컵 우승과 함께 과거를 들추는 것은 좋지만 그 멍청한 평가전이 어떤 배경에서 치러진 것인지 알고는 있자는 뜻에서 올린 글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