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종로1가 신신백화점 건너편 대로엔 늘 붉은 색 적십자사 버스가 서 있었습니다. 흰 간호사 복장을 한 여성분들이 버스앞에서 길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헌혈(獻血)을 권유하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이들이 다가가면 기겁을 하거나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손사래치는 모습이 일상적인 풍경이었지요. 헌혈에 대한 인식이 저조한 탓에 필요한 혈액을 강권(强勸)해서라도 충당해야 하는 시절이었습니다.
헌혈을 처음 해본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그때 학교로 적십자사 직원들이 와서 학생들에게 헌혈을 권유했고 많은 학생들이 참여했습니다. 사실 제가 그때 기꺼운 마음으로 참여한 것은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헌혈을 하겠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기때문입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때 비후염으로 수술을 잘못 했다가 지혈(止血)이 안되어 거의 죽을뻔한 지경에 이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동네병원에서 겁도 없이 큰 수술을 맡겼다가 한 보름간 계속 피를 흘리다가 메디컬센터로 실려가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메디컬센터 담당의사는 혈액부족으로 어지러워 앉지도 못하는 창백한 제 모습을 보자마자 당장 수혈을 시작했고 그로부터 며칠간 640ml 병으로 6개를 연속 투여했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수술도 잘못됐지만 계속 영양제 등 링거만 맞는 바람에 피가 희석(稀釋)이 되어 지혈이 안됐다는 것이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수혈을 시작하면서 상처부위가 피가 멈추기 시작했고 일주일후에는 언제 아팠냐는듯 멀쩡하게 걸어다닐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제 몸에 흐르던 피의 3분의 2는 누군가의 것이었습니다. 그때 사람의 피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달은 저는 건강해지면 저도 헌혈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던 게지요.
대학을 다니면서도 헌혈을 두어 번 했지만 정작 꾸준히 했던 시절은 엉뚱하게도 예비군 훈련을 받을 때였습니다. 남성들이라면 다 아시겠지만 80년대 예비군 훈련을 받을 때 훈련장에 가면 첫날 헌혈자들을 모집하는 적십자사 직원들이 나왔습니다.
이 때 헌혈을 하면 당일 훈련을 면제해줬기 때문에 빨리 집에 갈 생각에 많이들 동참하곤 했습니다. 평소엔 헌혈버스가 보이면 피해가던 사람들이 예비군 훈련장에서는 먼저 하려고 새치기하며 아귀다툼(?)을 벌이는 모습은 웃지못할 코미디이기도 했지요.
이처럼 적십자사 버스들이 고등학생들이나 예비군, 현역군인들에게 의존했던 것은 일반적인 헌혈양으로는 도저히 필요한 혈액을 충당할 수가 없었기때문입니다. 그로부터 얼마간 세월이 지나 헌혈시 훈련면제의 혜택이 사라지자 헌혈하는 예비군들이 거의 없어서 혈액 수급에 적잖은 문제가 되고 있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헌혈을 하면 헌혈 증서라는 것을 줍니다. 이 증서는 필요하면 헌혈한만큼 수혈을 받을 수 있는 일종의 담보증서입니다. 그래서 ‘건강할 때 헌혈하여 필요할 때 찾아쓰자’라는 슬로건도 나왔던 것이구요.
그런데 이 헌혈증서의 댓가성이라는 성격이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헌혈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조건없이 혈액을 기증하는 것인데 나중에 본인이 필요할 때 그에 상응하는 분량을 쓰거나 또다른 남에게 모아서 줄 수 있다면 진정한 헌혈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한동안 헌혈하면 문화상품권이나 영화예매권을 주었는데 이것 역시 사실상의 현금화라는 모양새로 인해 폐지됐다고 들었습니다. 헌혈증서라는 것은 헌혈에 대한 인식이 잘 되지 않은 시절 헌혈을 독려(督勵)하기 위해 생긴 것이라 선진국에선 거의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선진국의 단계에 진입한만큼 헌혈증서제도를 폐지할 때도 됐는데 혹여 십수년전 예비군 교장에서 훈련면제라는 당근이 사라지자 헌혈자가 급감한 것과 같은 현상이 나오지 않을까 두려울만도 합니다.
뉴욕의 마이클 블룸버그 시장이 9일 헌혈을 했다는 소식이 뉴욕의 주류 미디어에 일제히 보도됐습니다. 블룸버그 시장은 이날 뉴욕 블러드 센터를 방문해 1파인트(0.478리터)를 헌혈했습니다.
WCBS에 따르면 블룸버그 시장은 올 겨울 폭설과 강추위로 헌혈 감소 현상이 발생하자 시민들의 참여를 끌어내기 위해 솔선수범을 보인 것이라고 합니다. 블룸버그 시장은 헌혈 후 바늘공포증 등으로 헌혈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의식한듯 “정말 하나도 아프지 않고 아주 편하게 했다”며 “당신이 만일 급한 수술을 하게 됐는데 혈액이 없어서 죽을 수도 있다. 헌혈은 정말 소중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블룸버그 시장의 헌혈 소식을 듣고 한가지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한국처럼 헌혈증서나 문화상품권은 아니더라도 우유나 초코파이처럼 먹을 것은 주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니나다를까 이날 블룸버그 시장은 로나 둔(Lorna Doones)와 오레오스(Oreos) 쿠키, 그리고 생수를 받았더군요. ^^
누군지 알 수는 없으나 절박한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내 자신의 일부를 조건없이 떼어주는 숭고한 행위, 그것이 바로 헌혈입니다.
너무 오랫동안 헌혈을 잊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만물이 생동(生動)하는 봄도 됐으니 미국판 헌혈의 집 ‘블라드 센터’라도 찾아 본래 의미의 헌혈을 한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