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이 ‘세계의 수도’로 불리는 것은 200개 이상의 민족이 모여 사는 지구촌의 ‘샐러드 볼’이기도 하거니와 유엔본부의 상징성, 마천루의 숲, 금융마켓의 중심, 최고 수준의 문화예술 환경 등이 종합적으로 어우러진 메가시티이기 때문입니다.
세계의 수도임을 웅변(雄辯)하듯 자유의 여신상과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록펠러센터, 타임스퀘어, 센트럴파크, 월스트릿 등등 내로라하는 아이콘과 랜드마크도 수두룩합니다. 그런 뉴욕이 지구촌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는 시기는 크리스마스로부터 새해로 넘어가는 순간이 아닐런지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크리스마스트리인 록펠러센터의 트리가 불을 밝히고 그 앞에서 스케이팅을 즐기는 선남선녀(善男善女)들의 모습,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선봉은 역시 타임스퀘어입니다.
수천 명의 카운트다운에 맞춰 오색찬란한 크리스털 볼이 조금씩 하강하면서 오색의 종이테이프가 뿌려지며 환호성이 터집니다.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무릎을 꿇고 청혼하는 남성의 모습도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입니다.
맨해튼의 요란한 새해 축제를 볼 때면 문득 제야(除夜)의 종소리가 떠오릅니다. 이곳처럼 들뜨고 호들갑스런 신년맞이가 아니라 차분한 새해 설계에 어울리는 묵직하면서도 명징한 보신각 종소리 말입니다.
알고 보면 우리에게는 산타클로스보다 몇 수 높은 조왕신(竈王神)이 있습니다. 충청도를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에서는 부엌 부뚜막에 조왕단을 만들고 정화수(淨化水)를 담은 종지를 놓아 조왕신을 모셨습니다. ‘조왕각시’ 혹은 ‘조왕할망’이라고도 했고 그냥 정겹게 ‘부뚜막신’ ‘부엌신’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부엌신’은 가정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소중하게 모셔야 할 신이었지요. 세밑이면 집안 곳곳에 밤새도록 불을 환하게 켜놓는 ‘부엌 귀신 맞이’라는 것을 했는데 부엌신이 음력 12월24일이 되면 하늘나라로 가서 자기가 사는 집에서 있었던 일을 옥황상제에게 낱낱이 고해 바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선행이 많으면 복(福)을, 악행이 많으면 화(禍)를 입게 되는, 새해의 길흉화복이 조왕님의 보고에 달려 있다 믿었고 조왕신이 섣달 그믐날 밤 다시 집으로 올 때 길을 잃지 않도록 불을 켜 놓은 것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조왕신이 산타클로스 마냥 붉은 옷을 입고 있다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전야에 굴뚝을 통해 들어와 선물을 주는 산타클로스와 하늘에 다녀와 복을 내리는 한국의 조왕신이 희한하게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굴뚝의 이미지와 화덕이 있는 부엌의 유사성도 그러하구요.
오늘날로 치면 보너스인 세찬(歲饡)도 섣달그믐에 듣는 말입니다. 친지들끼리 대추와 생선알, 육포, 감자, 귤 등을 주고받는 세찬은 설날 차례상 차리는데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궁중에서도 70세 이상 되는 조관(朝官)과 명부(命婦)에게 나눠주는 쌀과 어류를 세찬이라고 했다니 듣기만 해도 마음 풍성한 보너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에는 빚 청산을 하는 관행도 있었습니다. 빚진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묵은해에 해결하는 것이 피차 후련할 테니까요. 빚을 받으러 밤중까지 돌아다니기도 했고 자정이 지나면 정월 보름까지 빚을 독촉하지 않는 관행을 노리고 종적을 감추는 약삭빠른 이도 있었구요.
새해를 기다리는 전날 밤은 제석(除夕), 제야(除夜)라 해서 윷놀이를 하거나 화투(花鬪)를 쳤습니다. 잠을 자지 않고 묵은해가 가는 것을 보면 복을 얻을 수 있다는 ‘해 지킴’을 하느라 아이들은 졸린 눈을 부벼댔고 자는 아이 눈썹에 하얀 밀가루를 칠해 아침부터 법석이 일어났지요.
섣달그믐은 새해 첫날을 위해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는 날이었습니다. 옛 기록에 따르면 조왕님에게 심판을 받는 섣달그믐은 부부간에 방사(房事)도 피했고 기방(妓房)은 파리를 날렸으며 도적들도 몸을 쉬었다고 하니 얼마나 조심스러웠는지 실감이 납니다.
뭐니 뭐니 해도 섣달그믐은 망년(忘年)이 아니라 수세(守歲)라 하여 술 먹고 흥청대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알고 보니 우리 조상들은 제야의 밤에 어른들께 묵은 세배도 올리고 도란도란 얘기꽃을 피우며 새해를 설계한 것입니다.
기왕이면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마음으로 신묘년(辛卯年) 새해 아침을 맞을 일입니다.
* 이글은 뉴시스 통신사 특파원칼럼으로 올린 글을 손질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