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미국의 도로를 누비는 한국 차량들을 보면 상전벽해(桑田碧海)요 만시지탄(晩時之歎) 류의 한자성어(漢字成語)가 생각이 납니다. 수년전만 해도 어쩌다 눈에 띄는 차가 현대, 기아차였는데 이젠 뉴욕에서도 도로를 달리다보면 두세대가 쉽게 눈에 띄곤 합니다.
70년대 후반 포니(Pony)를 앞세워 자동차 왕국 미국 시장에 도전한지 30여년. 그냥 싼 맛에 타는 저가 자동차의 오명(汚名)을 벗어던지고 이젠 당당하게 제 값을 받으며 미국 소비자들에게 평가받는 현대차와 기아차를 보면서 감개무량(感慨無量)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 소비자들에게 특히 인기있는 차종은 역시 쏘나타입니다. 쏘나타가 탄생한 것은 1985년 10월 4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께서는 쏘나타의 첫 이름이 소나타였다는 것을 알고 계신가요?
사실 쏘나타의 영문 이름이 ‘Sonata’ 라는 것을 생각하면 외국어 표기원칙에 따라 ‘소나타’가 맞습니다. 그러나 소나타는 출시한지 얼마 안돼 공식적으로 쏘나타로 바뀌었지요. 한국 상품 브랜드의 역사에서 소나타는 이름을 바꿔 살아남은 대표적인 사례로 기억되야 할 것입니다.
▲ 1985년 출시된 쏘나타 www.ko.wikipedia.org
소나타가 출시되고 얼마 안돼 현대차 경영진은 심각한 고민에 봉착(逢着)했습니다. 야심만만하게 내놓은 신차의 이름논란 때문이었습니다. “글쎄, 현대에서 새로 나온 차 이름이 소나타래. 사람이 탈 수 있겠어? 소나 타야지..ㅎㅎ ” 일부의 비아냥에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지요.
‘소나 타는 차량 = 소나타’.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농담이었지만 거액을 주고 구입한 소비자들이 자신의 애마(?)가 ‘개나 소나 타는 차’로 인식이 된다면 기분이 좋을리 없습니다. 판매 신장이 뚝 떨어질 수도 있는 중대한 위기였던 것입니다.
결국 현대차는 한국어 표기명을 된소리가 나는 ‘쏘나타’로 변경하고 언론사에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이후 쏘나타의 ‘개나 소나’ 논란은 불식(拂拭)됐고 쏘나타는 승승장구(乘勝長驅), 오늘날 미국에서도 히트치는 인기차종으로 우뚝 선 것입니다.
차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기아는 한국 아닌 미국에서 또다른 논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영어명인 KIA 때문입니다. 한국에선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미국에서는 ‘KIA(Killed In Action)’, 작전중 사망자, 즉 전사자를 의미합니다. 최근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한 작전 이름 또한 ‘제로니모 E-KIA(Geronimo Enemy Killed In Action)’이기도 했지요.
미국에 선보인 한국의 낯선 자동차 회사 이름이 전사자라는 생각이 든다면 이건 사실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닙니다. 교통사고 사망에 빗댈 수도 있기때문이죠. 만일 기아가 자동차 브랜드였다면 분명 이름을 바꿨겠지만 회사명이니 바꿀 수도 없고 보통 고민스런 일이 아닙니다.
아닌게 아니라 미국 진출 초기에 기아 이름에 대한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이름없는 자동차 메이커였던만큼 특별한 눈길을 주지 않은 덕인지 슬그머니 잦아들었습니다. 이후 적극적인 홍보 마케팅에 힘입어 기아는 ‘전사자’를 압도하는 이름이 됐지만 아무튼 중대한 위기를 잘 넘긴 것은 분명합니다.
여담(餘談)입니다만 기아의 오피러스 후속으로 출시되는 고급신차 K-9이 미국시장에 어떻게 비춰질지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케이나인’은 미국에서 개를 연상시키기때문이죠.
▲ 기아의 K9은 내년 출시예정이다. 사진은 K7
아다시피 Canine(개)라는 단어의 발음이 바로 ‘케이나인[keɪnaɪn]’입니다. 애견을 다룬 미국 영화중에 1989년 로드 다니엘 감독의 ‘K-9’이라는 코미디 작품도 있다시피 의욕적으로 출시한 고급차량에서 개가 떠올려진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물론 미국을 비롯한 서구인들의 개사랑이 각별하니까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고급차의 이미지에 반하는 것은 아닌지 좀 걱정이 됩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 점을 노리고 작명(作名)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브랜드 이름에 따라서 흥하느냐 망하느냐가 달려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 기아차의 브랜드 작명가들이 주도면밀(周到綿密)한 계산을 했을 수도 있기때문입니다.
비록 고급차의 이미지와 연동이 되지는 않더라도 ‘케이나인’이라는 신차량이 미국 소비자에게 아주 낯익고 친숙하게 느껴진다면 이미 수백억원대의 홍보효과를 거둔 것이나 진배없겠지요. 꿈보다 해몽이 좋은건가요?
사족(蛇足)으로 어린 시절의 해프닝을 하나 소개합니다. 중학교 2학년 때 해외 펜팔을 한적이 있습니다. 미국 디트로이트에 사는 래퀴타 스캇(Laquitta Scott)이라는 동갑내기 소녀와 펜팔을 했는데 이 친구가 처음 보내온 편지의 한 문구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너와 친구가 된 기념으로 우리 집 개 이름을 ‘킹 창현로(King Chang-Hyun Roh)’로 붙이기로 했어...”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지요. 애견문화가 정착된 지금도 그럴진대 70년대 중반 남의 귀한 자식 이름을 감히 개에 붙이다니 말입니다. ^^ 그나마 제 이름앞에 왕(King)을 하사했으니 다행이라고 자위(自慰)했습니다.
아마도 그 소녀는 아끼는 강쥐에게 지구 반대편 미지의 한 소년 이름을 붙여준 것이 호의라고 생각했겠지요. 어쨌든 30여년전 제 이름이 붙은 디트로이트의 개가 행복하게 천수(天壽)를 누렸기를 소망해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