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니모(Geronimo)는 미국의 전설적인 원주민 영웅의 이름입니다. 그는 백인들을 공포에 떨게 한 용맹한 아파치 족의 신출귀몰(神出鬼沒)한 지도자였습니다.
자신들의 영토를 침탈(侵奪)한 미국과 멕시코를 상대로 투쟁을 벌인 그는 1829년 애리조나 노도욘에서 태어났습니다. 멕시코 군인들에게 어머니와 아내, 세명의 자녀들이 살해당하는 비극을 계기로 침략자들과의 무한 투쟁을 선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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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에 걸친 생존을 위한 투쟁은 울던 아이도 제로니모라는 이름을 들으면 그친다고 할만큼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전력의 차이로 결국 백기를 들었고 머리깎인 삼손이 되어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 1909년 80세를 일기로 사망했습니다.
세기의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의 사살작전 이름이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번 비밀 작전의 정식 이름은 ‘제로니모 E-KIA(Geronimo Enemy Killed In Action)’ 였습니다.
▲ ABC-TV 촬영
기아(KIA)는 작전중 발생한 사망자, 즉 전사자를 의미합니다. 결국 제로니모로 상징되는 적(敵)을 전사자로 만들겠다(사살하겠다)는 뜻인데 이것이 원주민 단체를 발끈하게 만들었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미 상원 인디언 문제 위원회의 로레타 튜엘 자문대표는 3일 “미국 원주민 가운데 가장 위대한 영웅이었던 제로니모의 이름을 미국인의 공적(公敵), 빈 라덴과 연관지어 사용한 것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원주민 출신인 그는 “미국 사회에서 원주민의 아이콘이나 문화를 이처럼 부적절하게 활용하는 것때문에 어린이들이 황폐화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시사주간지 ‘인디언 컨트리 투데이’의 칼럼니스트 스티븐 뉴컴도 “많은 원주민에게 존경받는 영웅의 이름을 무례하게 이용했다”며 특히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대통령은 원주민을 적으로 간주하는 200년 된 낡은 전통을 뒤엎지 못했다”고 비꼬았습니다.
백악관은 이같은 비판에 “제로니모는 빈 라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빈라덴을 제거하기 위한 작전 전체를 칭하는 암호명”이라며 진화(鎭火)에 나섰습니다. 일각에서는 빈 라덴을 사살한 이번 작전에 위대한 제로니모라는 이름이 사용된 것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제로니모는 위대한 아파치 영웅의 본명이 아닙니다. 본래 고야슬레이(Goyathlay 하품하는 사람이란 뜻)였던 그에게 하필 가톨릭 성인(聖人)의 스페인 이름이 붙게 된데는 사연이 있습니다. 가족을 잃고 복수를 다짐한 그가 제로니모 축일(祝日) 한 성당에 잠입해 신부를 화살로 살해하고 홀연히 사라지자 술 취한 군인들이 제로니모로 칭했다는 것입니다.
▲ 제로니모의 부인과 자녀 www.en.wikipedia.org
흥미롭게도 제로니모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낙하산 부대가 비행기에서 낙하(落下)하기 직전에 ‘제로니모!’를 외치는 전통을 시작하면서 용맹함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제로니모가 전쟁에서 군인들에게 용기를 불러 일으켜주는 용어라는 점에서 백악관의 해명이 억지는 아닙니다.
빈 라덴을 사살하기 위해 투입된 특수부대가 용맹한 제로니모의 화신(化身)이라고 주장할 수 있으니까요. 수영장의 다이빙대에서 뛰어내리는 아이들도 “제로니모~!”하고 외치기도 하는걸 보면 우리가 “화이팅~”하는 것과 대동소이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 제로니모(오른쪽)와 아파치 용사들 www.en.wikipedia.org
그러나 원주민들은 이번 작전명에서 영웅 제로니모가 빈 라덴과 동일시됐으며 결과적으로 원주민 전체를 테러리스트로 몰아붙인 셈이라고 강하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때마침 리언 패네타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2일 PBS와의 인터뷰에서 “특수부대가 투입된 후 현장에서 암호명 ‘제로니모를 잡았다’고 말했다”고 밝혀 제로니모가 빈 라덴을 의미했음을 시사했습니다.
제로니모가 용맹무쌍함을 상징하는 뜻을 갖고 있다 해도 신출귀몰한 전략으로 미국을 괴롭히다가 생포된 아파치 리더 제로니모를 10년간 깜쪽같이 미국을 따돌리며 ‘지하드(성전)’를 부르짖은 빈 라덴에 견줬다는 지적은 피하기 어렵습니다.
한쪽에서 영웅이 다른 한쪽에선 악마로 비치는 것이 역사의 양면성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땅을 빼앗고 수많은 동족을 잔혹하게 살해한 백인들을 상대로 투쟁한 제로니모와 무고한 시민들이 일하는 쌍둥이 빌딩에 납치한 민간여객기를 충돌시킨 희대의 살인마와 비교한다면 용납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작전을 제로니모로 칭한 것은 경솔했을뿐더러 거꾸로 생각하면 빈 라덴을 제로니모 급으로 올려줬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안그래도 빈 라덴이 비무장상태에서 살해됐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번 작전의 적법성 논란이 제기되고 있지 않습니까.
빈 라덴의 죽음으로 이 세상 모든 테러의 화근이 뿌리뽑힌듯 환호(歡呼)하며 “USA!”를 연호하는 것은 실로 경박합니다. 모든 죽음 앞에 우리는 경건해야 합니다.
빈 라덴의 종말을 통해 2001년 9.11테러로 숨진 꽃다운 영령들은 물론, 테러와의 전쟁을 빌미로 무고하게 희생된 이라크와 아프간의 민간인 희생자를 다시한번 기리고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돌이켜 봐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