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윤아 감독은 본래 미술학도였습니다. 1984년 서울대 응용미술학과에 재학중 우연히 TV에서 세계적인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 선생의 ‘조지 오웰의 ’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비디오 아티스트에 관심을 갖게 된 홍 감독은 이듬해 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뉴욕공대(NYIT) 대학원에 진학, 비디오아트로 석사학위를 받고 프로덕션에서 현장 실무를 쌓은 후 1990년 이후 픽션 단편과 장편 다큐멘터리 제작과 시나리오 작업을 했습니다.
첫 연출작은 90년 비디오 영화 ‘기억은 메아리처럼’으로 82년 31살의 나이에 요절한 한인천재예술가 차학경씨의 유작 ‘딕-티(Di-ctee)’를 소재로 한 것입니다. 이 작품으로 ‘빌리지 보이스’의 찬사를 받은 홍 감독은 두 번째 작품 ‘은하수 여로’가 이탈리아 국제비디오전시회에서 비디오아트부문 1등상을 수상,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았습니다.
85년 11월 11일엔 경향신문에 '해외에서 빛나는 한국인 시리즈'로 대서특필되는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홍 감독이 애나 메이 왕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01년 단편영화 ‘뉴욕에서 여배우 되기’를 만든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홍 감독은 현재 뉴욕 브루클린에서 건축설계사인 남편 탐 딘 씨와 열 살백이 귀여운 딸 조이 딘과 함께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있는데요. 애나 메이 왕을 연출하게 된 사연과 8년의 제작기간을 돌이키는 소회를 인터뷰 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
-애나 메이 왕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언제입니까?
“1985년 대학을 마치고 뉴욕으로 유학을 오고 얼마 안돼 우연히 오래된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에서 ‘상하이 특급열차’라는 흑백영화를 보았습니다. 애나 메이 왕과 독일 여배우, 마렌느 디트리치가 나왔습니다. 영화속에서 애나 메이는 자신을 전날 밤 겁탈한 한 중국의 게릴라 장군을 유혹해서 죽임으로써 기차에 포로로 있던 모든 승객을 구해냈지만, 신분이 애매모호한 여성을 연기했습니다. 애나 메이는 용감하고, 독립적이며, 두려움이 없으며, 유머 감각이 있는 여성으로 보였습니다. 그당시 한국에서 온지 얼마 되지않아서, 애나 메이가 연기한 아시안계 미국여성이 내가 한국에서 알고 자란 조용하고 순종적인 한국여성의 모습에 대조적으로 보이면서, 독립적이고 강한 아시아계 미국여성이 인상 깊게 남았습니다.”
-애나 메이 왕을 만들게 된 것은 2001년부터인데 그 계기는 무엇인가요?
“과연 애나 메이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지만 더 이상의 관심을 쏟을 시간이 없을만큼 계획한 일을 해야 했습니다. 2001년 여름 ‘뉴욕에서 여배우되기’라는 단편 다큐멘타리를 제작했습니다. 이 다큐멘타리는 에스터 최(채경주), 비비안 방(방자윤) 과 지나 오(오지나), 세명의 젊은 한국계 미국인들이 뉴욕에서 배우로써 경력을 쌓기위해서 노력하는 과정을 보여준 작품입니다. 다큐멘타리를 만든 후 이렇게 재능있는 여배우들이 처한 상황이 애나 메이가 활동했던 1920년대나 1930 년대와 비교해, 바뀐 것이 없다고 느껴졌습니다. 미국내에서 아시안계 배우들은 영화나 텔레비젼에서 연기할수 있는 배역이 너무 없고, 그나마 있는 역은 스테레오타입이 전부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조사를 해봐야 할것 같아서 도서관에 가서 자료조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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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뜻밖에도 애나 메이의 사진 한 장을 발견했습니다. 그녀가 처음으로 주연으로 출연한 무성영화, ‘바다의 희생’을 만들 시기쯤에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사진 속에 그녀는 정말 건강하게 생긴 이웃집 아가씨처럼 평범하게 보였습니다. 그런 평범 속에서도, 그녀의 눈매는 언젠가 정말 멋진 여성이 되겠다는 정열이 였보였습니다.
‘이렇게 펑범하게 보이는 아가씨가 어떻게 해서 세계적으로 명성을 누리고, 코스모폴리탄으로 독립적인 삶을 살며, 세대를 초월해서 앞서 간 여성이 되었을까?’ 스스로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올해는 애나 메이가 세상을 떠난지 50주년되는 해입니다. 지금까지도, 어느 아시안계 미국 여배우가 그녀의 경력을 깨뜨리지 못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애나 메이 왕이 누군지도 모른다. 왜? 그 질문에 대답을 하기위해 다큐멘타리를 제작했습니다.“
-그래서 애나 메이 왕의 어떤 면을 발견하게 됐습니까?
“처음부터 저는 애나 메이가 그녀의 영화 속에서 연기해서 비난받아온 아시안 여성의 부정적인 스테리오타입인 ‘연꽃 아가씨’(순진하고 희생적인 아시안 여성타입)나 ‘용 마담’(교활하고 잔인한 아시안 여성타입) 과 같은 피해자의 모습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녀의 영화 이미지의 뒤편에 있는 인간 애나 메이 왕을 찾아내는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제가 다큐멘타리 제작 기간동안에 인터뷰를 한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세대간의 격차를 느꼈습니다. 구세대는 아직도 애나 메이가 부정적인 아시안여성의 모습을 영화속에서 보여줬다고 비난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배우는 자신에게 주어진 연기를 할 뿐이지 역할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애나 메이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그녀에 대한 존경심이 깊어갔습니다.”
-제작기간이 8년이나 걸렸는데 처음부터 예상하셨나요?
“이 다큐멘터리를 시작했을때, 언제 완성을 할 수 있을런지 예측을 할 수 없었습니다. 애나 메이가 1961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그녀를 사적으로 아는 사람들을 발견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인터뷰를 요청하면 일 년이 넘어서 답장이 오는 경우도 여러번 있었습니다. 어떤 인터뷰는 하나 만드는데 몇 년이 걸리기도 했습니다. 제가 보낸 수많은 인터뷰 요청 편지가 우체국에서 되돌아 오기가 일쑤였습니다. 인터뷰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한번은 애나 메이의 오랜 친구가 양로원에 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연락을 해봤지만, 바로 몇 주전에 사망했다고 연락을 받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많은 좌절감을 겪었지만, 도와주는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역경에 굴하지 않고, 계속 다큐멘타리를 제작하다보니 어느새 8년이 흘렀습니다.”
-영화를 보면 아시안 배우들과의 인터뷰가 여럿 나오는데요. 이분들을 통해 얻은 소득은 무엇인가요.
“다큐멘타리 제작중에 로스엔젤레스에 가서 탐린 토미타, 비디 왕, 제임스 홍같은 배우들과 왜 애나 메이가 헐리웃의 배우로써, 중요한지 인터뷰했습니다, 영국에서는, 애나 메이가 영화속에서 헐리웃과 대조로 비교적 자유롭게 배역을 연기했고, 당시로 무명 연극배우였던, 로렌스 올리비에와 연극무대에 서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독일에서는 4편의 영화에 출연하고 대중의 인기를 독차지했지요. 헐리웃에서 영화에 출연하지 않을 때, 애나 메이는 유럽에 가서 자신이 직접 쓰고, 연출하고 출연한 카바레무대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하고, 독백을 하며 관객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녀가 헐리웃 영화속에서 제한된 연기를 했다면 그녀의 카바레무대야말로 예술가로서 진면목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뉴욕의 연극배우인 도엔 리를 애나 메이로 분해서 카바레 무대를 다큐멘타리속에 재현했습니다. 이 영화는 다큐물이지만 극영화기법도 일부 가미된 것입니다.”
-애나 메이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요.
“이 다큐멘타리의 자료 조사를 하면서 중국계 미국인들의 이민사에서 그들이 겪은 어려움을 알게 됐습니다. 1882년부터 1943년까지 있었던 ‘중국인 제한 이민법’은 애나 메이의 가족에 시련을 주었는데요. 그녀는 배우로서 성공을 위해 결혼도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당시 중국인에 대한 차별대우가 중국 남자와 결혼을 하지 않기로 한 결정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시 할리우드에서는 프로덕션 코드라는 인종차별적인 배역지침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애나 메이가 헐리우드와 싸운 것은 이 시기 실행된 ‘영화제작방침(윤리심의를 포함)’입니다. 이 지침은 애나 메이가 스타로서 필수인 로맨틱한 주연배우가 되지 못하게 가로막은 결정적인 요인입니다. 그래서 “애나 메이는 백인 남성과 스크린에서 키스할 수 없다!”는 헤드라인의 기사가 종종 신문이나 잡지에 등장했습니다. 저의 다큐멘타리는 애나 메이가 출연한 영화, 기록영화 장면들과 그녀가 쓴 편지와 인터뷰을 토대로 구성했습니다. 그녀의 편지속에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여성의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녀의 인생은 배우로서 성공을 위해 결혼이나, 가족, 모든 것을 다 바친 인생이었습니다. 그같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헐리우드는 ‘영화제작방침’을 고수했고, 애나 메이를 로맨틱한 주연으로 배정하지 않았습니다.”
-1930년대 최대 화제작인 펄벅의 ‘대지’가 영화화 될 때 주연인 중국여성역을 애나 메이가 맡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애나 메이가 1930년 유럽에서 할리우드로 돌아온 후 펄벅의 ‘대지’가 영화화됐습니다. 애나 메이는 주연을 맡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지요. ‘오란’이라는 중국 농부의 아내를 연기하는 이 역할은 그녀가 그동안 연기해왔던 이국적인 이민자 배역에서 벗어날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1928년에 애나 메이는 당시 기자로 활동하던, 월터 벤야민(20세기의 철학자)과 베를린에서 인터뷰하면서, ”성숙한 엄마의 역할을 연기하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란’역은 그녀에게 돌아가지 않았고, 그 이후에도 이같은 역은 아시아계 여성배우에게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대지’의 모든 주연 역은 백인 배우에게 돌아갔다.

▲ 오란역을 맡은 루이즈 레이너 www.en.wikipedia.org
더 기가 막힌 것은, ‘오란’ 역을 연기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루이즈 레이너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연기력이 출중한 애나 메이가 오란역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면, 그이후 애나 메이가 어떤 역들을 연기했을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 중국농부역을 맡은 피터 무니와 그의 삼촌역인 월터 코널리 www.en.wikipedia.org
-영화에서는 애나 메이가 1930년대 모국인 중국을 방문한 영상도 나오는데요.
“애나 메이는 ‘대지’의 배역선정에서 겪은 수모를 뒤로 하고 1936년 초 난생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했습니다. 그녀는 ‘기록영화 왕’이라는 카메라 기자를 고용해서, 자신의 여행을 기록했습니다. 광동지방에서 은퇴한 아버지, 형제들과 감동의 만남을 가졌습니다.
미국에 돌아와서, 2차 세계전쟁이 나기 직전부터 중국이 미국의 동맹이 되면서, 긍정적이고, 교육을 잘 받은, 현대적인 아시안 여성을 연기할 수 있었습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안창호 선생의 장남으로 영화배우였던 필립 안 선생과 애나 메이가 영화속에서 연인으로 나오기도 했는데 영화사가 두 사람이 실제 연인이라고 홍보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 미국이 2차 세계전쟁에 참전하면서, 영화제작 편수가 줄면서, 애나 메이와 같은 아시아계 미국인이 연기할 수 있는 역할이 줄어들면서, 그녀의 영화경력도 쇠퇴했습니다. 전쟁후 10년 이상 연기생활을 접고 은퇴상태에 있다가 1950년대 중반에 ‘루송 마담의 화랑’이라는 자신의 텔레비전프로그램을 하고, 몇 편의 텔레비젼에 출연한 것으로 배우생활을 마감했습니다.”
-이번 작품을 통해 어떤 소망을 갖고 있나요?
“안타깝게도 애나 메이 사후에도 헐리우드는 별로 변한 것이 없습니다. 현재 루시 루 같은 탑클래스의 아시안계 배우와 비교하면 애나 메이가 조건이 더 나빴지만 훨씬 더 많은 것을 성취했습니다. 애나 메이는 강한 의지로 용감하게 열심히 노력해서, 헐리웃의 복잡한 사교네트워크를 뚫고, 자신의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제가 그녀에게서 배운 가장 큰 교훈은 아무리, 어려움이 많더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투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지인들을 통해서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애나 메이가 제게 영감을 준 것처럼 그녀의 스토리를 저의 10살 난 딸이나 많은 아시아계 미국인 젊은이들이나 소수민족 젊은이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내년 미국의 공영방송 PBS 방영을 앞두고 지금 ‘킥스타터’ 캠페인을 하고 있는데요.
“제 다큐멘타리는 지난해 여름에 완성이 되었고, 작년 부산영화제에서 초연을 하고 미국과 캐나다의 영화제에서 상영되었습니다. 내년 5월 아시안문화유산의 달을 맞아 PBS에서 방영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방영의 선결과제로 영화자료의 저작권료를 소장자들에게 지불해야 합니다. 2만 달러의 비용을 만들기 위해서, 킥스타터 캠페인을 하고 있습니다. 11월 한달안에 2만달러를 모아야 합니다. 관심이 있는 분들께서는 아래의 링크를 클릭해서 제가 전하는 메시지와 다큐멘타리에서 발췌한 장면들을 보고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시안 여배우로서 선구적 역할을 한 애나 메이 왕의 전국 방영이 꼭 성사되기를 바랍니다. 킥스타더 서약(pledge)는 대부분 100 달러 이내이니까 가능한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http://www.kickstarter.com/projects/1107767469/get-anna-may-wong-on-public-tv